제이크 질렌할의 광기가 돋보였던 영화 “나이트 크롤러”는 사고 현장을 기록하는 특종 기자의 이야기다. 갈수록 더 자극적인 이미지에 열광하는 대중. 그들의 만족을 위해 매체는 더욱더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장면을 요구한다. 영화에서 제이크 질렌할이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비극에 집착하는 모습은 광적이다. 도덕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그가 찍은 비극은 어김없이 특종이 된다.
그렇다면 대중은 왜 비극에 열광할까? 이것은 우리가 공포 영화를 보며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비극을 목도한 시청자의 연민. 타인의 불행을 보고 마음 아프게 공감하면서도, 자신의 삶은 안전하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비극 앞의 연민은 그저 감상적일 뿐. 자신의 삶보다 무겁게 잴 대상은 없을 것이다. 연민이나 동정심에 피해자의 의견은 중요치 않다.
타인의 비극을 이용해 경각심을 일깨우는 행위는 흔한 일상이다. TV에서는 블랙박스 사고 영상을 보여준다. SNS에서는 길거리 싸움이나 애인의 외도를, 신문에서는 매일 충격적인 사건 사고를 찍어낸다. 여기서 우리는 피해자보다 피의자를 먼저 보게 된다. 피해자는 그저 비극의 등장인물로 소비되고 결국 비극만이 남는다. 비극은 그렇게 관망의 대상이 된다.
오늘 소개할 사진작가 엔리케 메티니데스(Enrique Metinides)는 사고 현장의 비극을 찍는 사진작가다. 그러니 미리 양해를 구해야겠다. 오늘 글에는 죽음에 매우 가까운 사진이 있으니 보기 어렵다면 피하길 권한다.
멕시코 출신의 사진작가 엔리케는 10살에 사진을 시작한다. 카메라를 잡게 된 이야기도 참 비극적인데, 관광객에게 카메라와 필름을 판매하던 아버지 사업이 망하게 된 것이 그 계기였다. 팔다 남은 카메라를 집어 든 엔리케는 유독 사고 현장에 관심을 가졌다. 사고 현장은 자신을 매료시켰던 갱스터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훗날 엔리케는 사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게 바로 ‘미국 갱스터 영화’였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엔리케의 사진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또한 그의 사진집은 실제인지 허구인지 모호하게 보이도록 시선을 재배치한다.
사진을 시작한 지 1년 뒤, 엔리케의 아버지는 식당을 열었고, 부근 지역을 관할하는 경찰이 점심을 먹으러 매일 찾아왔다. 그 덕에 엔리케는 경찰을 따라다니며 사고 현장이나 시신을 찍게 되었다. 어린 엔리케는 범죄 사진가가 되길 원했다. 전 세계 언론의 범죄 사례를 스크랩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11살에 식당 주변에서 일어난 자동차 충돌 사고를 찍다가 ‘La Prensa’ 신문의 사진기자와 인연을 맺는다. 그가 엔리케를 조수로 고용하면서 정식으로 범죄 사진가로서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범죄 사진가로 50년간 활동하며 암살, 재난, 교수형.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다. 그러나 엔리케를 가장 매료시켰던 것은 비극보다 사건을 보러온 구경꾼이었다. 자신이 희생자가 아님을 신에게 감사하는 사람, 단순한 호기심, 죽음의 매혹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엔리케는 그들이 어디서 왔든지 상관없이 가십을 좋아했다고 말한다.
엔리케 메티니데스의 사진은 잔혹하다. 비윤리적이다. 그는 숱하게 많은 시신을 촬영했지만 애써 연민하지 않았다. 비극은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으니. 그는 사진에 죽음만 아니라 죽음을 보러 몰려든 구경꾼까지 담았다. 맥없이 쓰러진 시신 곁에 서서 불행의 화살이 비껴난 사실에 안도하는 모습이다.
모든 생명의 끝은 같기에 타인의 죽음을 우리는 멀찌감치 서서 바라볼 수 있는 걸까. 동정심과 함께 동시에 느껴지는 거부감. 일치되지 않는 감정에 혼란을 느낀다. 그의 사진은 감상자에게 비극을 어떻게 마주할지 잠시 생각할 시간을 제공한다. 직접 감상해보자.
“인생 최악의 순간에 저를 만나게 되실 겁니다”. ― 영화 “나이트 크롤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