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머천다이즈 문화를 위하여

20대 초반의 나는 뉴요커 매거진(The New Yorker Magazine)의 토트백이 그렇게 갖고 싶었다. 잡지를 정기 구독해야만 사은품으로 받을 수 있던 이 토트백을 멘 사람은 그 시절의 나에게 곧 지성인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뉴요커 매거진을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번도 완독한 적 없던 나는 사실 뉴욕에서의 삶이 처음이었다. 다만 뉴욕이 자연스러운 똑똑하고 깨어 있는 젊은이처럼 뉴요커 매거진 토트백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고 싶었고, 이 토트백을 든 다른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싶었다.

나의 소비가 곧 나의 정체성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제 내가 사는 집, 내가 모는 차, 내가 입는 옷, 내가 뿌리는 향수, 내가 차는 시계를 넘어, 내가 추구하는 특정 가치까지 구매하여 전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머천다이즈(Merchandise), 혹은 머치 컬쳐(Merch Culture)를 통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듯한데, 별 어려움 없이 수많은 예시가 떠오른다. 공원의 자연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주기적인 만남이나 조치 없이 온라인에서 구매할 수 있는 프로스펙트 파크 얼라이언스 x 파크스 프로젝트 네이처 클럽(Prospect Park Alliance x Parks Project Nature Club) 티셔츠, 정작 책은 아마존에서 싼 금액에 사더라도 로컬 서점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스위트 피클 북스(Sweet Pickle Books) 토트백, 깊이 없이 보이기에만 예쁜 이미지들의 모음집이 되어버린 핀터레스트(Pinterest)를 떠나 진지한 연구와 호기심을 독려하는 플랫폼을 사용하는 나를 보여주는 아레나(Are.na) 모자 등… 모두 바람직하고 좋은 의도가 껴있는 듯함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꺼림칙하다.

또한 가지고 싶은 정체성을 얻지 못할 때면 머천다이즈를 대체제 삼아 만족하기도 한다. 억대를 왔다 갔다 하는 예술품을 구매하는 아트 컬렉터가 될 수는 없지만 뉴욕 근대 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혹은 뉴욕 현대 미술관(MoMA) 머그컵에 커피를 따라 마시며 이 미술관에 다녀온 흔적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구매할 수는 있다. BMW 차량을 타지는 못해도 BMW 로고가 박힌 우산을 쓰며 이 독일차의 소유자 같은 모습, 혹은 어떻게든 관련이 있는 듯한 이미지를 살 수는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머천다이즈를 구매할 때 우리는 남들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정체성에 대한 착각의 벽돌을 쌓아 올리기 시작한다. 마침내 뉴욕커 매거진의 1년 정기구독을 완료한 후 도착한 토트백을 들며 잡지는 여전히 띄엄띄엄 읽지만 마치 그 모든 지식과 견해를 집어삼킨 사람이 된 듯한 우쭐한 기분의 나처럼 말이다. 좋은 가치도 값싼 상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깊은 고민과 탐구, 오랜 시간과 땀,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들의 연대가 아닌, 순간의 소비에서 나의 정체성과 내가 추구하는 가치관을 찾는 여정이 끝나버린다. 또한 이러한 구매는 내가 어떤 의미 있는 대의를 위해 한몫했다는 착각 역시 안겨준다. 행여나 오리들이 삼킬 수도 있는 공원 내 플라스틱을 줍는 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대신, 귀여운 티셔츠를 구매하며 내가 자연 생태계를 돌보고 있다고 망각하듯 말이다.

이렇게 암울한 결론에 이르기 위해 머천다이즈에 관한 고민을 시작한 건 아니다(더이상 뉴요커 매거진을 즐겨 읽지도 않을 뿐더러 토트백 역시 지금은 그리 멋지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실제로 필자는 여전히 다양한 머천다이즈의 광팬이다.

매해 브루클린에서 열리는 브루클린 아트 북 페어(Brooklyn Art Book Fair)에선 올해 페어 운영비 모금을 위해 반팔 티셔츠를 미화 55달러에 판매했다. 100퍼센트 봉사자로 이루어지는 해당 페어를 후원하는 방법이기도 한 동시에 대규모 예술 기관이 아닌 대안적인 아티스트,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세계의 일원이 된 듯한 소속감을 느끼게끔 해주는 이 티셔츠를 선물 받았을 때 너무나 행복했다. 또한 1세대 벵골계 미국인인 제낫 배검(Zenat Begum)이 그의 부모님이 수십 년간 운영해온 철물점을 정리하며 생긴 공간에 카페, 서점을 열고 청소년과 지역사회 공동체를 위한 (싱싱한 농작물을 필요한 주민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냉장고를 포함한) 커뮤니티 공간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진심으로 응원하며 커피 한잔 값보다 훨씬 비싼 플레이그라운드 커피숍(Playground Coffee Shop)의 후디를 구매했을 때 역시 내 자신이 뿌듯했다.

이 외에도 나의 옷장은 백인 남성 창립자들로만 가득한 미국의 커피계에서 베트남계 미국인 여성이 시작한 첫 베트남 스페셜티 커피회사 구엔 커피 서플라이(Nguyen Coffee Supply)의 티셔츠, 거대한 테크(Tech) 거인들이 판치는 인터넷 세상 속에서 우리만의 공간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잊지 말자는 메시지를 나누는 디자이너 로럴 슈얼스트(Laurel Schwulst)html 에너지(html energy) 티셔츠 등 수많은 머천다이즈로 가득하다. 개중에는 뉴요커 토트백처럼 허영심에 구매한 것도, 플레이그라운드 커피숍 후디처럼 진심 어린 응원의 마음으로 구매한 것도 존재한다. 빈 환상을 전시하는 허울이 아닌 진솔한 응원과 지지를 담은 마음 역시 앞서 말한 자본주의의 덫에서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의미 있는 머치 컬처는 아직 존재하기에 또 다른 건강하고 바람직한 가능성 역시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필요한 변화를 위해서 요구되는 불편함과 실천의 땀을 인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귀여운 머치와 함께라면 좀 더 힘을 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약간은 순진한 생각을 하며 구엔 커피 서플라이 티셔츠를 꺼내어 본다.

Nguyen Coffee Supply 인스타그램 계정
Brooklyn Art Book Fair 인스타그램 계정
Playground Coffee Shop 인스타그램 계정


이미지 출처│The New Yorker, Parks Project, Sweet Pickle Books, Are.na, MoMA Design Store, BMW USA, Brooklyn Art Book Fair, Playground Coffee Shop, Nguyen Coffee Supply, html ener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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