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제법 기묘한 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바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열세에 놓인 러시아가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예술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일선에 배치했다는 것.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군이 사상 처음으로 2개 예술 여단을 창설했으며, 해당 부대는 성악가, 가수, 연주자, 배우, 서커스 배우 등이 포함된다고 했다. 전쟁 참가자들의 ‘도덕적, 정치적, 심리적 상태를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특별군사작전 지역(우크라이나)에 있는 전사들을 위해 문화적·예술적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는 게 러시아 국방부의 설명이다.
처음엔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했는데, 뭐 생각해 보니 세계 각국의 군대에서 운용 중인 수많은 군악대나, 전선에서 펼쳐지는 위문공연 등을 떠올려 보면 사기 진작을 위한 예술인 부대라는 게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닌 듯했다(아니면 매드맥스 군단에 등장하는 기타맨이랄지). 그래, 별일이라고 생각하고 기사를 닫는다. 그런데… 어떤 망설임이 남는다. 이게 그렇게 설명되고 말 일인가?
이 의문의 기원을 추적해 보자. 아무래도 우크라이나 전쟁의 본질이 침략전쟁이고, 나아가 그 예술인 부대라는 이들이 징집병이란 점을 먼저 짚어야 할 것이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을 두고 가름되는 선악의 축은 거의 명확하다. 러시아가 명분 없는 전쟁을 벌여서 평화를 파괴했다는 관점은 서방과 비서방을 막론하고 이제 거의 확고해졌다. 러시아의 침략과 거기 맞서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필사적인 모습은 전쟁 초기부터 미디어에 널리 확산되었고, 독재자 푸틴(Vladimir Putin)과 수도에 남아 그에게 맞서는 젤렌스키(Volodymyr Zelensky)의 구도는 전 세계인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결과적으로 이런 이미지와 영상들은 지구적 네트워크를 순환하면서 선악의 대결이라는 보편적인 서사를 형성했다. 이제 푸틴이 악의 축이라는 사실은 동네 길고양이들도 안다. 한 마디로 러시아는 이미 서사적으로 패배한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사람들의 크고 작은 감정 상태는 이런 서사에서 비롯된다. 다시 한번 러시아 국방부의 말을 빌리자면, 전쟁 참가자들의 ‘도덕적, 정치적, 심리적 상태’말이다. 사람들은 내러티브와 인과관계에 감응해서 약자를 응원하고, 선에 대한 지지를 호소한다. 하지만 지금 러시아에겐 그런 서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러시아 군인들이 전쟁의 의도에 공감하지 못하고, 시민 역시 국가 징집에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 이를 방증한다. 그들이라고 보편적 감수성이 부재하진 않았을 테니까. 당연히 권력의 나팔수로 예술인 부대를 부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러시아가 조직한 예술인 부대의 존재가 뭔가 기이하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푸틴의 예술인 부대 운용 전략엔 예술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원하는 대로 조직화할 수 있다는 예술을 향한 어떤 도구주의적 태도가 감지된다. 마치 창작자와 감상자 사이에 전달과 수용이란 수직적인 낙차가 있어서 톱다운 방식으로 감상을 조정할 수 있다고 보는 태도. 어쩌면 최루성 신파와도 일맥상통하는 이 관점을 글의 맥락에 기대어 ‘전쟁이 예술을 대하는 태도’라고 불러보자. 공감과 감동에 대한 몰이해에 뿌리내린 이러한 관점은 당연히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진정한 공감이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해와 ‘내가 저 순간‧저 상황에 있었다면?’이라는 공감 능력에 근거한다. 이는 우리가 동일한 본성, 동일한 어휘, 동일한 신념을 공유하지 않더라도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전쟁이 예술을 대하는 태도’의 반대 경우도 있을까? 보편적 공감이란 기초 위에서 사람들의 정서적 응집점을 마련해 주는 예술. 어쩌면 그런 양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사건들이 있었던 것 같다.
영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Banksy) 는 지난 11월 자신이 우크라이나의 호스토멜에 총 7점의 그림을 남겼다고 밝혔다. 이에 우크라이나에선 그의 작품이라고 추정되는 벽화들이 속속들이 발견되며 화제가 됐다. 뱅크시는 본래 전쟁, 기아, 난민, 환경, 국가권력 등 인류가 처해 있는 위기의식을 주제로 게릴라적인 작품 활동을 선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과거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가로막은 장벽에 그라피티를 그리며 두 나라의 화해를 염원하기도 했고, 시리아 난민촌에 벽화를 남기며 내전을 피해 목숨을 걸고 바다로 탈출하는 난민들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가 이번에는 우크라이나로 향해 전쟁의 불씨가 가시지 않은 폐허 위에 희망적 메시지를 남겨놓은 것이다. 무너져 내린 건물 터에서 발견된 그의 그림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길게 잡아끌며 전쟁의 상흔에 치유를 건넸다.
우크라이나의 바이올리니스트 일리아 본다렌코(Illia Bondarenko)는 러시아의 무차별한 폭격에 피신한 지하 벙커에서 우크라이나 민요를 연주했다. 총성과 폭발음이 가득한 전쟁터의 지층 밑에서 피어오른 바이올린 선율은 아름다움을 넘어서 비장하기까지 했고, 영상을 본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전 세계 바이올리니스트들은 그의 연주에 화답하기 위해 연대했고, 총 25개국‧94명으로 이뤄진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줌(zoom)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뤄 우크라이나를 위한 공연을 펼쳤다. 이 합주는 인종과 국가를 넘어서 연대하는 음악이란 공용어가 전선의 포성에 저항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프랑스의 포토그래퍼 지에르(JR)는 키이우(Kyiv)의 한 광장에서 시민 100여 명의 도움을 받아 ‘우크라이나의 회복력(The Resilience of Ukraine)’이라는 게릴라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둘둘 말린 45m 대형 사진을 시민들이 함께 잡아당기면, 다섯 살 우크라이나 발레리나 소녀의 미소가 광장 위에 펼쳐지는 대형 퍼포먼스다. 시민들의 참여로 전개되는 소녀의 뭉클한 미소는 우크라이나인들의 굽히지 않는 희망의 확산을 드러낸다. 해당 퍼포먼스는 미국 타임지(TIME)의 커버스토리가 되며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사기도 했다.
위 사례들을 비롯해 지금 이 시각에도 세계 어딘가에선 전쟁의 폭력에 대항하는 크고 작은 창조적 저항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연대의 기반 위에 서 있는 한, 이러한 자생적인 저항은 어느 순간에도 멈추지 않는다. 폭력에 굴종하지 않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그것에 대항하고자 하는 것. 그렇게 상처받은 이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타인의 공감을 촉발하는 것. 이 모든 행위의 총체를 이 글을 마무리하며 ‘예술이 전쟁을 대하는 태도’라고 불러볼 수 있을까. ‘전쟁이 예술을 대하는 태도’와 ‘예술이 전쟁을 대하는 태도’. 우크라이나 전쟁이란 비극 위에서 이 양자의 진동이 드러나고 있다. 예술이란 정답 없이 무수한 갈래로 분기하는 가능성으로 존재하기에 그것에 대해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이르기 쉽지 않고, 또 그래서도 안 되지만, 적어도 주지한 두 예술의 양상에서 내 마음을 주고 싶은 방향은 일방적이다.
이미지 출처│BBC, CNN, TIMES, The Moscow 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