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유년기는 항상 게임과 함께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집에 있던 짝퉁 패미컴으로 섭렵한 해적판 합팩 게임으로 시작해서 90년대 말부터, 00년대 초반 오락실 예절 주입 게임이었던 “철권”, “스트리트 파이트”, “킹 오브 파이트” 시리즈와 온갖 리듬 게임까지. 한 게임을 진득하게 못 하는 성격인지라 이 게임 저 게임 다 건드려 보느라 정작 실력은 형편없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다양한 게임을 즐겼다는 게 인생에서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게임 업계도 출렁였다. 오락실은 사라져 갔고 그 자리엔 피시방이 들어섰으며 콘솔 게임기는 구석으로 처박히고 나는 게임 패드 대신 키보드와 마우스를 잡고 게임을 즐겼다. 집에 있던 짝퉁 패미컴이 언제 버려졌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젠 다음 날 컨디션 조절을 위해 게임 한 판 더 하는 것보다 일찍 자는 게 정신과 몸 건강에 도움이 되는 걸 느낀 작년 이른 겨울, 같은 작업실을 쓰는 친구가 발견한 수유동의 작은 오락실에서 오랫동안 묵혀왔던 봉인이 풀리고 말았다. 내 인생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게임. “EZ2DJ”를 발견한 것이다.
“EZ2DJ”는 아케이드 건반형 리듬 게임 시리즈로 출시 당시 다른 국내 리듬 게임이 가지고 있던 ‘싼마이’ 이미지를 탈피한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오락실 좀 들락거렸다 하는 20~30대는 기계만 보면 어떤 게임인지 바로 알 수 있으리라. 2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뒤 다시 마주한 “EZ2DJ” 기계 앞에 서서 500원짜리 동전 뭉치를 화면 옆에 쌓아두고 어른의 사치를 부려가며 건반을 두드리길 어느덧 두 시간. 손끝에 남아있는 그 묘하고 찰진 타격감을 품은 채 집으로 돌아간 그날부터, 내 플레이리스트엔 “EZ2DJ”의 수록곡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최근에 발매한 곡이라고 해도 전혀 손색없을 정도로 세련된 리듬과 멜로디는 무엇 하나 버릴 것 없이 주옥같은 수많은 곡 중에서 정말 힘들게 여섯 곡을 꼽아봤다. “EZ2DJ”를 즐겼던 동년배들 모두 각자의 최애 곡이 있을 터, 필자가 꼽은 곡 중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이 없다고 해서 실망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 기억을 가지고 여러분의 플레이리스트에 최애 곡을 추가하길 바라면서 함께 “EZ2DJ”의 수록곡을 즐겨보자.
LIE LIE (작곡: 앤디 리)
이런 내게 꿈이란 사친거야
영원히 함께라 말해도
더 이상 넌 짐이 될 뿐이야
뒤돌아 떠나가줘
아무도 믿지 않아 그게 너라도
어차피 이 세상엔 나 하난걸
이대로 내버려둬 그냥 떠나줘
그게 모두를 위한거야
“EZ2DJ”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곡이 아닐까? 오락실에서 건반을 두드리던 추억에 젖어 다시 이 곡을 찾은 이들 덕분에 유튜브 조회수가 51만에 육박한다. LIE LIE의 작곡가 앤디 리는 1999년에 출시한 “EZ2DJ”의 첫 번째 시리즈부터 DJMAX, TAPSONIC TOP 등 후발주자 리듬게임 음악 제작에 참여한 게임음악계에선 잔뼈 굵은 인물이다. 메탈 드러머로 음악 활동을 시작해서인지 그가 작곡한 곡에서 맛깔나는 드럼 라인을 즐길 수 있다. 리듬게임 작곡뿐 아니라 대중가요 작곡 활동도 이어갔는데 가수 장나라의 대표곡 ‘나도 여자랍니다’를 비롯해 2010년대 초중반까지 카라, 인피니트 등의 아이돌의 앨범 작업에도 참여한 바 있다. LIE LIE 역시 2001년 반짝 활동했던 걸그룹 AL의 1집 수록곡 ‘경고’을 원곡으로 하고 있다.
여담으로 이 곡은 “EZ2DJ” 세 번째 시리즈 제작 당시 막바지에 추가된 곡으로 LIE LIE에 맞는 백 그라운드 애니메이션을 완성하지 못해 무작정 캠코더를 들고 밖으로 나와 압구정 거리를 찍어 약간의 효과를 더해 사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용량 문제로 전부 쓰이지 못했다고. 한 게임에 세 곡을 플레이할 수 있는 “EZ2DJ”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곡으로 많이 선택됐었는데, LIE LIE를 올 콤보 클리어하고 게임 스위치를 꺼버리는 형들의 모습이 어찌나 쿨해 보였는지.
2nd Jewel (작사, 작곡, 보컬: 앤디 리)
너의 머릿결 너의 목소리
내겐 모두 커다란 삶의 이유
이제 더 이상 이별은 없어
넌 내게 마지막 사랑이 되어줘
가사가 가슴을 후벼 판다. 일단 사랑하는 사람을 고인으로 만들고 절절함을 노래하는 00년대 초 대중가요 바이브가 물씬 풍긴다. 이 곡의 백 그라운드 애니메이션을 담당했던 제작자는 사실 19금 느낌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싶었다고. 너의 머릿결 너의 목소리를 애타게 찾는 후렴구 파트가 세 번이나 나오니 그럴만하다. 그래서인지 곡에서 달콤한 샴푸 향이 나는 것 같기도…
Back for more (작곡: Ruby Tuesday)
Should’ve stayed away
너한테서 멀어졌어야 했는데
But now you’ve got me
지금 넌 내게 와버렸어.
Coming back for more.
기어코 돌아오고 말았어.
The Boy (작곡: Ruby Tuesday)
He said he’s gonna love me
그는 날 사랑한다고 말했어
He’ll never let me go and
그는 날 떠나게 두지 않을거야
He can’t imagine,
그는 상상하지 못할거야
His life without me there
그의 인생은 나 없이는 안된다고
여성 보컬이 좋다 싶으면 10중 9는 루비 튜즈데이(Ruby Tuesday)의 음악이었다. 위 두 음악을 작곡한 루비 튜즈데이는 이즈미 츠네히로, 미야베 히카리, 이노우에 카즈요시로 구성된 작곡 그룹으로 “EZ2DJ”의 두 번째 시리즈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며 많은 명곡을 남겼다. 지금은 해체되었으나 이즈미 츠네히로는 여전히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필자가 리스트에 꼽지 않았지만 루비 튜즈데이가 작곡한 “Look Out” 역시 “EZ2DJ” 마니아들에게 여전히 사랑받는 곡이다. 날씨가 풀리면 주말에 따릉이를 타며 루비 튜즈데이의 음악을 들어보길.
20000000000(작곡: 크루브)
제목부터 무시무시한 200억이다. “EZ2DJ”의 세 번째 시리즈에 수록된 곡으로 어려운 레벨의 보스 곡으로 악명 높았다. 제작 당시 베타 테스터가 너무 쉽게 클리어하자 절대 클리어 하지 못할 때까지 패턴의 수정을 반복했다고 하는데, 후에 밝혀진 사실로는 이 게임의 제작사 대표가 “EZ2DJ”의 세 번째 시리즈 매출 200억을 달성하라는 압박을 가해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아 탄생한 곡이라고. 영상 중간에 고통스럽게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제작자의 모습과 ‘We must do it’, ‘Pain’이 당시의 고통을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Minus 2 (작곡: 크루브)
인트로 사운드만으로 길 잃고 방황하던 오락실의 패배자들을 구경꾼으로 불러 모았던 “Minus 2”. 지옥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작곡가 크루브의 코멘트처럼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던 곡으로 올 콤보는 고사하고 클리어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후반부의 엇박자 노트는 대놓고 플레이어를 농락하는데, 인터넷에서 패턴 공략법을 찾기 쉽지 않았던 시절인지라 이 곡을 클리어하기 위해 하루 종일 오락실에 눌러앉아 “Minus 2″를 플레이하는 형들 옆에서 건반 패턴을 일일이 공책에 그려가며 공부했던 친구도 있었다.
작곡가 크루브에 대한 얘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 앞서 소개한 200억을 비롯하여 “EZ2DJ”의 네 번째 시리즈까지 수많은 명곡을 남기고 한국의 게임 개발사 펜타비전로 이직하여 리듬게임 “DJMAX”의 작곡가이자 음악 감독으로 활동한 그는 제10회 유재하 음악 경연 대회에서 은상을 수상자라는 사실. 오롯이 게임 음악 한 우물만을 팠던 그답게 2005년 암 투병 중에도 꿋꿋하게 작곡 활동을 이어나갔다. 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건강을 되찾은 크루브는 현재 “검은 사막” 등을 제작한 한국의 게임 제작사 “펄어비스”에서 음악 감독을 맡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EZ2DJ”는 1997년 코나미사가 제작한 비트매니아의 표절작이다. 5개로 이루어진 건반과 1개의 턴테이블을 사용해서 화면 상단에서 내려오는 음표를 하단의 판정 선에 맞춰 건반과 턴테이블을 조작하는 형식을 그대로 베껴 만든 탓에 코나미사에 법적 소송을 당하게 되었고 최종 패소하면서 더 이상 “EZ2DJ”란 타이틀을 사용하지 못하게 됐다. 또한 게임 생산과 대여 금지 처분까지 받게 된다. 이후 EZ2AC, EZ2ON 등의 타이틀로 명맥을 이어나가려 했으나 아케이드 리듬 게임의 쇠퇴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다.
필자 역시 작년 수유동의 작은 오락실에서 마주한 “EZ2DJ” 오락기가 아니었다면 이 글에서 소개한 음악 역시 여전히 기억 한편에 고이 묻어놓고 있었을 것이다. 이 에세이가 “EZ2DJ”를 즐겼던 이들에겐 추억을 소환하는 작은 오락실이, 그렇지 않은 이들에겐 재밌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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