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그러니까 필자가 스케이트보드를 정말 열심히 탔던 그때엔 친구들과 스팟에 모여 “어느 브랜드 필름이 멋있더라, 스케이터 누가 쿨하더라” 등의 대화를 나누곤 했다. 잘 모르는 스케이트 비디오나 스케이터가 나오면 “그 영상은 아직 안 봤어”, “그 스케이터는 잘 몰라” 등의 대답으로 넘겨버리곤 했는데, 재밌게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집에 돌아온 어느 날, 옷장 속 하나 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스케이트보드 브랜드 의류가 눈에 띄었다. 순간 문득 “내가 이 문화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게 맞나? 겉모습만 스케이터이길 바라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트릭팁 비디오만 보면서 “어떻게 하면 스케이트보드를 더 잘 탈 수 있을까?”란 생각에 빠져 문화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스케이트보드를 잘 타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화를 관통하고 있는 큰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지식을 갖춰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 그날 이후 한동안 브랜드를 막론하고 스케이트 비디오란 비디오는 있는 대로 모두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젠 나이를 먹고 새로운 트릭을 배우는 것보다 할 수 있는 트릭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 된 지금. 기억 속에 묵혀있던 주욕(ZOO YORK) 스케이트보드의 “Spread the Word” 영상이 문득 떠올랐다.
로고를 살아있는 바퀴벌레 등에 마킹해 뉴욕 월 스트리트 길바닥에 뿌리는 이 영상 하나로 주욕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브랜드 정체성을 한 번에 보여줬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영상을 기획했다면 여러 갈등으로 갈라진 인터넷 커뮤니티를 하나로 대동단결시킬 공공의 적이 될 것은 당연하며, 모든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으리라. 가히 폭력적이고 자극적이지만 위 영상이 공개된 2008년 당시 시대상과 세계정세를 돌아보면 주욕 브랜드의 자국민인 미국인 입장에선 묘한 쾌감을 느꼈을 수도 있을 것이라 감히 추측해 본다(물론 바퀴벌레가 뿌려진 곳이 자기 집 앞마당이 아니라 그런 것일 수 있겠지만 말이다).
2007년 무렵 미국과 러시아, 중국 사이 차가운 기류가 흐르고 이 세 나라를 필두로 한 진영 이념 갈등을 일컫는 ‘신냉전’의 서막이 오르고 다음 해 이어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경제 대침체는 미국을 절대 패권국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들었다. 2008년 경제 대침제 시기 미국 금융의 상징인 뉴욕 월 스트리트까지 초박살 났는데, 시민들이 보기에 고위층은 바퀴벌레와 같은 존재였을 터, 당시 주욕이 프로모션과 데크 디자인의 소재로 바퀴벌레를 채택한 것이 이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바퀴벌레만 한 못한 놈들을 뿌리고 짓밟는 것에 환호하지 않았을까 싶다. 시기적으로 몇 달의 차이는 있지만 주욕의 “Spread the Word” 영상이 그해 가장 많이 시청된 온라인 비디오인 것을 감안하면 꿈보다 해몽인 필자의 해석도 무리는 아닐 테다.
포토그래퍼 지오바니 레다(Giovanni Reda)와 스케이터 펠릭스 아르겔레스(Felix Arguelles)가 성우로 참여해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주욕 멤버들에게 무참히 짓밟히는 바퀴벌레를 담은 짧은 바이럴 시리즈 “Zoo York Roaches” 역시 빼놓을 수 없다. 2012년 시리즈 중 한편이 광고를 보는 이로 하여금 불쾌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MTV와 어덜트 스윔(Adult Swim)으로부터 광고 게재 금지 조치를 당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는데, 스케이트보드에 밟혀 바퀴벌레의 내장이 튀어나오는 것은 의외로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당시 최고의 슈퍼 모델이었던 케이트 업튼(Kate Upton)이 디렉터로 참여한 시리즈에서 바퀴벌레가 주고받는 대화가 노골적인 성적 농담으로 들린다는 것이 그 이유. 대화 내용만 놓고 보면 레일을 이용한 스케이트보드 트릭에 관한 주제지만, 화면에 교차되어 나타나는 글래머러스한 케이트 업튼이 대화 내용의 주체가 되면 큰일 날 소재였나 보다. 그걸 보는 여자 친구 바퀴벌레의 잔소리에 못 이겨 자살을 선택하는 엔딩 역시 주욕답다.
2000년대 초 마크 에코(Marc Eckō)에게 매각된 이후에도 주욕은 그들의 색을 잃지 않으려 했고 이름 있는 스케이터를 영입하며 스케이트 브랜드로서 입지를 다졌다. 하지만 2011년 아이코닉스(Iconix)에 매각된 이후로는 주욕 소속 프로 스케이터들의 지원이 대폭 축소되며 스케이터뿐 아니라 주욕을 사랑하고 서포트하는 팬 역시 하나둘 주욕을 떠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브랜든 웨스트게이트(Brandon Westgate)의 이탈은 주욕의 추락에 날개를 떼어 버리는 수준이었다. 이후엔 스케이트보드 브랜드를 탈피하고 싶었는지 요상한 요가 레깅스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고 결국, 미국의 대표적인 할인 매장 벌링톤 코드 팩토리 한 구석에 ‘파격 할인’ 코너에 박히게 되어버렸다. 그 상황에서 주욕 인스타그램 피드 게시물에 올라가는 이미지에선 스케이터의 머리 부분이 잘려 업로드되는 등 스케이트보드가 기반인 브랜드라고 도저히 볼 수 없는 수준으로 전락했다. 후일담으로 당시에 스케이트보드에 전혀 관심이 없는 아이코닉스 직원이 주욕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을 관리했다고 하니 어쩌면 상술한 주욕의 하락세는 당연한 수순.
2017년, 다시 스케이트보드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되찾고자 ‘Bronze56K’와의 필름 “Amber Alert”을 공개했고 2018년에 들어서 주욕의 창립자 3인방 로드니 스미스(Rodney Smith), 엘리 모건 게스너(Eli Morgan Gesner), 아담 샤츠(Adam SCHATZ)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합류했지만, 199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중반 주욕 스케이트보드가 보여줬던 그들의 색깔을 보여주기엔 아직 갈 길이 먼 것처럼 보인다. 주욕의 공식 홈페이지의 샵 카테고리엔 판매하는 제품이 아무것도 없고 주욕의 스케이트보드 데크(Deck)는 다른 사이트로 연동되어 버린 지 오래며, 업계에 정통한 관계자는 주욕 본사에서 스폰서하는 프로 스케이터들이 공식적으로 아무도 없음을 밝혔다. 일본, 호주, 브라질 등에서 주욕 스케이트보드 스폰서를 받는 스케이터는 주욕을 사입하는 현지 판매업체에서 자체적으로 스폰서를 주는 입장이라고 하니 주욕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슈프림도 한 번 망하지 않았는가.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바퀴벌레처럼 그들이 보여준 “Zoo York Roaches”의 끈질김을 보여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