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과 액세서리, 생활에 하등 필요 없으나 미친 듯이 갖고 싶은 아이템이 하루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나오는 시대. 마음에 쏙 드는 건 왠지 꼭 비싸거나 이미 품절이다. 눈물을 머금고 몇 달 치 봉급을 쏟아부어 몇백만 원짜리 재킷을 사고, 그것도 모자라 박물관의 그림처럼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은가. 반면 눈이 벌게지도록 이베이를 뒤져도 좀처럼 매물로 나오지 않는 희귀한 골동품도 있다. 멋쟁이가 되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법. 이번 달부터 VISLA는 그간 천장에 달아놓은 굴비처럼 입맛을 다시며 바라보는 것들을 독자에게 하나씩 소개하려 한다. 자, 본격 소비 조장 콘텐츠 1-800-8282-4949로 전화 한 통 부탁한다.
Vans Authentic Checkerboard (Blue/White/Gum)
개인적으로 반스(Vans) 신발을 매우 좋아한다. 문득 반스 신발을 좋아하는 이유를 자문한 적이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싸니까. 희귀한 신발을 비싼 값을 치르고 사는 것보다는 더 다양한 신발을 신고 싶은 내게 반스 가격은 옛날 말로 표현하자면 ‘따봉’이다. 두 번째 이유는 반스라는 브랜드의 이미지는 내가 좋아하는 멋진 요소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어센틱(Authentic), 올드스쿨(Oldskool), 스케이트보드(Skateboard), 이 3강 트리오는 10년간 내가 제일 선호하는 3인방이었고, 그 공식은 2017년 오늘까지 유효하다.
오늘 소개하려는 제품 역시 반스 트리오 중 하나인 어센틱이다. 어센틱은 애증의 존재다. 최근에는 반스도 울트라 쿠션이라는 기술력을 탑재해 발 건강을 고려했다지만, 어센틱의 착화감은 여전히 나를 힘들게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반스의 매력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나는 내 발을 끊임없이 학대하고 만다. 최근 빠져든 녀석은 아직 한 번도 구매한 적 없는 올 체크무늬 패턴의 어센틱 ‘체커보드’다. 특히 스케이터 제이슨 딜(Jason Dill)이 이걸 신고 보드를 타는 영상을 본다면 올 체크무늬가 과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분명 생각이 바뀔 것이다. 그렇다. 올 체크무늬 어센틱을 살 때가 왔다.
개인적으로는 튀는 색상을 좋아한다. 파란색의 올 체커 패턴과 생고무 창이라니 정말 과한 조합 아닌가. 내 바지의 절반은 이 친구와 색 매치가 안 될지도 모르지만 튀는 컬러의 신발을 신는 일은 너무나도 신나고 즐거운 도전이다. 인생은 짧고 살 수 있는 신발의 수는 정해져 있으니 하루라도 빨리 더 과감한 색상, 요상한 디자인에 도전해보자.
VISLA 매거진 디렉터 최장민
UNDERCOVER x Medicom Toy ‘Underman’
특별한 취미랄 것까지는 없지만, 여윳돈이 생길 때마다 일본을 대표하는 특촬물, 울트라맨(Ultraman)에 등장하는 여러 종류의 괴수 피규어를 조금씩 수집하고 있다. 대체로 생김새가 비슷한 울트라맨보다는 각 개체의 개성과 상상력이 물씬 묻어나는 게 괴수 피규어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집 곳곳에 괴수를 놓아두는 것만으로 부족한 창의력을 북돋워 주며, 수집욕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아무튼, 최근 휴가차 홍콩에 놀러 가 삼수이포 지역의 장난감 거리를 방문해 괴수 소프비를 디깅하다 굉장한 박력의 피규어를 만나버리고야 말았다. 이름하여 언더맨(Underman). 2011년 일본 유수의 하이엔드 브랜드 언더커버(UNDERCOVER)가 메디콤 토이(Medicom Toy)와 협력해 제작한 12인치 피규어로 언더커버의 2011년 S/S 컬렉션 룩북 주인공을 역임한 바 있다. 정체 모를 악의 조직이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은 20XX년, 우리의 호프 언더맨이 악당을 무찌르며, 마음을 되찾아 준다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스토리, 이에 곁들여진 언더커버의 컬렉션은 이제는 아저씨가 되어버린 그 옛날 소년의 동심과 우라하라 제왕 언더커버의 미친 디자인을 동시에 선보이며 양면적 감성으로 내 마음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누가 착한 놈이고 누가 나쁜 놈인지 헷갈리는 괴랄한 디자인 역시 언더맨 피규어의 감상 포인트. 도시 하나를 통째로 옮겨 놓은 마스크, 고(故) 김정일을 연상케 하는 황토색 슈트, 수족냉증인지 털 부츠를 신고 있는 언더맨의 모습 그리고 빙산을 옮겨 놓은 듯한 얼굴로 언더커버 감성이 진득하게 묻은 피쉬테일 파카에 검정 부츠를 매치한 악당 피라노이드(PYRANOID)는 그야말로 완벽한 한 쌍이 아닌가. 떨리는 손으로 확인한 가격표엔 머리가 쭈뼛할 정도의 액수가 적혀있었고, 난 박스를 내던지다시피 한 후 그곳을 황급히 빠져나왔다. 당시 아쉬운 마음을 이곳에 옮겨본다.
VISLA 매거진 패션 에디터 오욱석
Camelbak Thermobak
최근, 3월 초 구매한 ‘고스트 리콘: 와일드랜드’라는 게임에 푹 빠져 있다. 이 게임은 일당백의 특전사가 되어 볼리비아 거대 마약 카르텔을 제거하는 오픈 월드 TPS(3인칭 슈팅) 게임이다. 이 게임은 자신의 캐릭터 착장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상, 하의뿐 아니라 선글라스, 모자, 가방 등 다양한 물품이 등장하는데, 이중 몇몇은 실제 존재하는, 쉽게 말해 현실 세계에서 구입할 수 있는 제품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심지어 브랜드 이름, 모델명까지 적혀있는 아이템도 있다. 나는 캐릭터 착장을 선택하면서 하나의 콘셉트를 잡았는데, 방탄조끼, 방 헬멧, 커다란 배낭을 두르지 않은 컴팩트한 평상복의 슈퍼 전사였다.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다 떼어낸 슈퍼 전사를 디자인하던 중에 배낭 카테고리에서 유난히 눈에 띄고 마음에 쏙 드는 작은 백팩을 발견했다. 그것의 이름은 ‘Camelbak’. 찾아보니 이미 국내에도 정식 매장이 있는 유명한 브랜드였다. 하지만 내 캐릭터가 멘 가방과 디자인이 유사한 제품은 공식 웹사이트에서 찾을 수 없어서 글로벌한 웹 서핑을 통해 최대한 비슷한 모델을 찾았다. 제품의 이름은 ‘Camelbak Thermobak’이다.
이 가방의 특징은 내부에 물을 넣고 나서 가방과 연결된 내부 호스로 물을 빨아 먹을 수 있는 거추장스러운 기능이 있다는 것. 이런 낯선 테크놀러지가 내 캐릭터가 추구하는 미니멀리즘을 방해한다고 생각했지만, 등에 착 달라붙는 컴팩트한 디자인이 부정적인 생각을 말끔히 지워냈다. 군 시절, 비록 취사병이었지만 와일드한 세계를 탐험하는 판타지는 가슴 깊은 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물과 비상식량을 넣은 이 가방을 메고 북한산으로 떠나는 상상을 해본다.
VISLA 매거진 그래픽 디자이너 박진우
Yoshiyuki Sadamoto – Carmine
일본 만화가 사다모토 요시유키(Yoshiyuki Sadamoto)의 아트북 ‘카마인(Carmine)’을 소개하려 한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사다모토 요시유키는 유명 애니메이션 회사 가이낙스(Gainax) 소속으로 신세기 에반게리온(Neon Genesis Evangelion), 왕립우주군(Wings of Honneamise),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The Secret of Blue Water)의 캐릭터 디자이너다. 그가 그린 에반게리온 코믹스는 만화가를 꿈꾸던 어릴 적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작품 중 하나. 애니메이션판에서 볼 수 없는 세밀함을 코믹스를 통해 찾을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이 책은 사다모토 요시유키의 개인 화집이다. 2009년 첫 출시 이후 1년 만에 통상(일반)판으로 다시 세상에 나온 책인데, 그간 작가가 가이낙스에서 디자인에 참여했던 캐릭터들이 총출동한다. 물론 어느 하나 빠질 곳 없는 훌륭한 작품들로 재탄생해서. 이왕 구매하는 거 2009년 화보를 샀으면 더 좋았겠지만, 은근히 가격 문턱이 높은 관계로 통상판으로도 만족한다. 사실 내용도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에반게리온 부분만 놓고 이야기하자면 신극장판에 등장하는 마리(Mari Makinami)의 모습과 코믹스 앞부분에 실린 일러스트가 대거 포함되어 있다.
VISLA 매거진 패션 에디터/포토그래퍼 백윤범
Egon Schiele – Death and the Maiden
평소에 좀처럼 뭘 사지 않는 편이다. 거창한 신념이라기보다는 사고 싶은 것들을 전부 살 만한 여유도 없는 데다가 막상 없어도 살아가는데 크게 지장을 주지 않다 보니 그냥 눈 돌리고 사는 쪽을 택했다. 게으른 성격 탓에 인터넷을 뒤지는 일은 번거롭고, 백화점 같은 곳은 치를 떨 정도로 싫어한다. 다만 갖고 싶은 물건을 하나 꼽는 건 글 몇 자 적으면 되는 일, 이제 그림의 떡에 관한 이야기를 마음껏 풀어볼 수 있겠다.
이번에 내가 고른 물건은 현재 오스트리아 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1915년 유화, ‘죽음과 여인(Death and the Maiden)’이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 한 놈이 당시에는 잘 몰랐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굉장히 힙스터 같은 멘트로 나를 감동하게 한 적 있다. 내색은 안 했지만, 매일 보던 친구에게서 갑자기 고상한 아우라가 느껴지니 참 당혹스러웠다. 그때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좋아하는 그림에 관한 이야기 한 보따리쯤 풀어놓을 수 있다는 건 꽤 멋진 일이구나, 하고. 그날 밤, 집에 돌아와 클림트라는 작가를 찾아보다가 에곤 실레라는 이름을 알았다. 위대한 발견이라도 되는 양 친구에게 실컷 유식한 척 떠들어대는 나를 상상하며 그의 그림과 삶의 궤적을 밤새도록 좇았다.
2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에곤 실레의 그림은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어딘지 고통스러워 보이는 인물, 황폐한 풍경화, 헐벗은 여성의 드로잉 등 작가가 뱉어낸 감정이 옆구리를 찔러댔다. 에곤 실레가 미술사에 어떤 족적을 남긴 인물인지 당시 나로선 알 턱이 없었지만, 왠지 이런 것들이 예술이라면 한 번 공부해보는 것도 퍽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미술이라는 말이 굉장히 낯간지럽게 들리던 때였으니 이 그림은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쨌든 우연히 접한 ‘죽음과 여인’은 오랜 시간 싸이월드 프로필 사진이었을 정도로 – 당시 싸이월드 프로필 사진은 많은 의미를 내포했다 – 오래 두고 본 그림이다. 두 연인의 절망적인 포옹. 누가 이 그림에서 사랑의 환희를 느낄 것인가? 삐뚤빼뚤 그려진 선과 음울한 분위기. 마치 사형대에 끌려가기 전 마지막으로 연인을 끌어안는 듯한 처절함. 서로가 더 세게 끌어안을수록 그들을 맞이하는 건 깊은 수렁일 뿐. 자, 방황하던 10대 시절, 이 그림이 나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지 감이 오는가? 생화를 살 돈이 없어 꽃을 그려줬다는 클림트처럼 이 작품의 가격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으니 그냥 스캔해서라도 어딘가에 붙여놓아야겠다.
VISLA 매거진 편집장 권혁인
*이 기사는 무신사 매거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글 ㅣ VISLA Magazine
이미지ㅣ박진우, 이혜원
제작 ㅣ VISLA, MUSIN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