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새해가 밝았다. 녹록지 않았던 2019년이 지나고 맞은 새해. 작년의 고민과 염려는 모두 케케묵은 것이 되어버렸으니 이제 털어버리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달려갈 때다. 물론, “MY YOUTUBE LIBRARY”의 여정 역시 2020년에도 계속된다.
멜트미러(Meltmirror)의 바통을 건네받은 2020년의 첫 주인공은 다름 아닌 황휘(HWI). ‘HWI’라는 이름으로 음악과 영상을 만들고, 공연도 하는 그녀는 작년 7월 말 에이전시 이어와이어(Earwire)를 통해 데뷔 EP [ExtraPlex]를 발매하고 동명의 쇼케이스를 진행했다. 현재는 미술관, 클럽, 전시 등 다양한 곳에서 매서운 속도로 자신의 활동 범위를 넓혀가는 중이다.
개인 작업을 이어감과 동시에 HWI는 오디오-비주얼 프로덕션인 업체(eobchae)의 일원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기획자 오천석, 프로그래머 김나희, 영상/음악 제작자 황휘로 이루어진 이 콜렉티브는 다양한 영상 작업과 퍼포먼스 등 비물질적 작업을 주로 선보인다.
그동안 “MY YOUTUBE LIBRARY”를 통해 소개된 많은 이들처럼 한 가지 명칭만으로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 HWI. 그녀는 새해 첫 주자답게 무려 7편의 영상을 추천하는 대인의 면모를 보였다. HWI가 선택한 영상이 본인을 더욱 생생히 드러내길 기대하며, 유튜브 플레이리스트를 슬쩍 훔쳐보도록 하자.
HWI의 “나의 레퍼런스 선생님들”
음악과 영상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관을 선보이는 HWI에게 유튜브는 단순한 스트리밍 서비스가 아닌, 레퍼런스의 보고다. 하단의 글은 자신의 플레이리스트에 관해 HWI가 직접 보내온 내용이다.
“뭐랄까, 나의 유튜브 플레이리스트를 공개하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내가 유튜브를 보는 모습을 들키는 건 수치스럽다. 나에게 유튜브는 거대한 레퍼런스의 우물이자, 매일매일 새로이 악해지며 가치관을 무너뜨리는 지옥이다.
유튜브는 명실공히 세계 최대의 비디오 수장고로, 이곳의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어떤 영상들은 미술품 전시를 보는 것보다 더 큰 미적 (불)쾌감을 주기도 한다. 나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인터넷에 처넣은 (불)쾌한 영상들을 선별하여 비공개 플레이리스트에 아카이빙하는 것으로 레퍼런스 창고를 구축한다. 작업이 막힐 때면 창고를 뒤져보며 아이디어를 훔쳐 온다. 아마 유튜브가 없었다면 나는 아예 영상 작업을 하지 못했을지도.
레퍼런스의 장 안에서 가장 외연으로 튀어나오신 분들을 모아봤다. 내 작업에 써먹으려고 벼르고 있는 영상도 있고, 이미 써먹은 것도 있다. 물론 작업에 써먹지 않고 그냥 감상만 해도 좋은 영상들도 있다. 아름다운 것들은 휴일 아침에 보면 좋고, 이상한 것은 밤에 보면 좋다.”
1) “HWI – Into the Basement (M/V)”
영상 길이: 3분 6초
채널: HWI_
레퍼런스라고 했는데 제 작업이라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뮤직비디오 또한 유튜브의 무수한 주차장 영상을 자료 삼아 만들어졌으니, 내 딴에는 레퍼런스로부터 뽑아낸 정수(精髓) 같은 영상이라고 볼 수 있다.
어릴 적 종종 부모님이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앉아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가던 기억이 있다. 그럴 때마다 거쳐 갔던 공간이 바로 나선형의 지하주차장이었다. 머지않아 자극으로 복작거리는 소비의 천국에 입성할 생각에 들뜬 채, 음침한 통로를 따라 지하로 내려가던 기억은 지금까지도 꽤 강하게 남아있다.
서울처럼 시공간적으로 초 압축된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의 유년기 기억을 지배하는 풍경 같은 데 관심이 있다. 집약적 도시 계획이 어떻게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무의식을 조형하는지, 초현대적 도시 풍경이 어떻게 노스탤지어의 대상이 되는지.
2) “Youngg P – Morning Smoke [Steve Murphy Remix]”
영상 길이: 5분 11초
채널: OOUKFunkyOO
‘OOUKFunkyOO’는 아마 비즐라를 구독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최소 한 번쯤은 본 적 있는 채널일 테지만, 사실 이 영상에 깔린 음악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고, 그냥 영상 전반부의 세차장 장면이 너무 좋다.
사실 이 영상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내가 모은 플레이리스트를 뒤적거리다가 관련 영상으로 떠서 보게 됐는데, 내 오래된 기억 속 어떤 장면을 그대로 영상으로 출력한 것 같아 깜짝 놀랐다. 위에서 전술한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내가 관심 있는 부분을 건드리는 영상이었다.
계속 자동차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실외에서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는 안락한 실내라는 자동차의 양가적인 콘셉트나, 자동차 안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과 감각(이를테면 내 뒤로 풍경이 ‘지나간다’는 감각)이 재미있다. 자동차/운전과 관련된 영상 기술도 그렇고.
3) “Sónar 2019 – First artists announced”
영상 길이: 1분 58초
채널: Sónar Festival
이 영상은 사실 유튜브가 아니라 트위터(Twitter)에서 처음 봤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 페스티벌의 아티스트 어나운스(Artist Announce) 영상이 매해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이 영상은 페스티벌 참여 아티스트 발표라는 단순한 목적에 비해 지나친 정성, 아름다움, 재치를 쏟아부음으로써 유머까지 발휘하는 멋쟁이 영상이었다.
풀샷과 클로즈업을 비교하며 뜯어 보는 게 묘미다. 어떤 게 라이프 사이즈고 어떤 게 미니어처일까?
4) “Laurie Anderson – O Superman [Official Music Video]”
영상 길이: 8분 27초
채널: Nonesuch Records
롤모델로 삼고 있는 여성 솔로 아티스트가 몇 명 있다. 말 그대로 ‘나도 이런 걸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선생님들이다.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은 그중 한 명이다. 조각과 바이올린을 배웠고, 아트 신(Scene)과 팝 컬처 사이에서 음악을 만들고, 스스로 개발한 웃긴 전자악기를 연주하면서도 너무나 멋진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이다.
요즘 로리 앤더슨의 영상을 자주 돌려보게 되면서 반드시 이 리스트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영상으로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내가 로리 앤더슨을 처음 알게 된 “오 슈퍼맨(O Superman)”의 뮤직비디오를 추천한다. 로리 앤더슨이 독일 방송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Home Of The Brave” 퍼포먼스 풀 영상, 백남준의 “Good Morning, Mr. Orwell” 속 로리 앤더슨도 꼭 봐야 한다.
5) “Grimes screaming for 10 minutes straight”
영상 길이: 10분 12초
채널: marinaslabel
컴퓨터로 음악을 만드는 이들은 전자음악가인가? 전자음악가는 왜 라이브 공연을 하는가? 왜 컴퓨터의 일에 인간이 개입하여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가? MR을 깔아놓고도 굳이 런치패드를 누르고 노브(knob)를 돌리는 행위는 연주인가, 연기인가? 사람들이 공연에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기예인가, 흥분인가? 이런 생각들로 공연 준비를 할 때마다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고 전자음악 라이브라는 형식 자체를 미심쩍게 여겼다.
그런데 이 영상이 작은 해답을 준 것 같다. 불확실성은 웃기고, 전자음악 라이브는 연기고, 적당한 빠르기의 비트는 MR이든 라이브든 소리가 클수록 신나고, 이 모든 게 혼란스러운 전자음악가는 화가 난다. 공연에서는 화풀이를 하자! 그라임스(Grimes)가 10분 동안 괴성만 지르는 라이브 영상이다.
6) “1부- 칭하이 무상사의 ‘신성한 연결에 관한 일기’ Supreme Master Ching Hai’s Diary of Divine Connections P1”
영상 길이: 25분 38초
채널: Kyungsoo Kang
칭하이(Ching Hai) 무상사 국제협회를 아시는지? 만약 15개국의 언어로 자막을 넣은 기이한 레이아웃의 이 영상을 서울의 어느 한적한 주택가 골목, 낡은 비건 식당에서 마주쳤다면? 할리우드의(Hollywood) 채식주의자 연예인 사진을 주루룩 걸어놓은 그 식당에서 시켜먹은 햄버거(?!) 속 정체 모를 고기 패티(??!!)가 정말 맛있었다면?
칭하이 무상사와 그녀의 비건 외식 브랜드 ‘러빙헛(LovingHut)’에 대한 정보는 나무위키에 엄청 상세하게 서술되어있으니 굳이 더 설명하지는 않겠다. 영상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세계 각국에 신도를 거느린 요상한 종교가 있다는 것. 그 종교 교주의 이름이 칭하이고, 무상사(無上師)는 그녀에게 붙는 칭호다. 이 종교의 공식 유튜브 채널(Live SupremeMasterTV)도 있는데, 이곳에선 위와 똑같은 레이아웃의 영상이 무려 7개월 가까이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 라이브 스트리밍 영상이 채널의 유일한 게시물이다.
7) ”HWI – mígōng (M/V)”
영상 길이: 1분 33초
채널: HWI_
마지막 영상은 또 다시 제가 만든 영상이어서 죄송합니다.
이 뮤직비디오 또한 유튜브에서 본 몇 편의 영상들에서 기법적인 부분을 참고하여 만들었다. 그 영상들에서 조명 치는 법, 레어(rear) 스크린 활용법, 실사와 3D애니메이션 소스를 우아하게 결합하는 법을 배웠다. 레퍼런스들 중 하나는 이 목록에도 포함되어있다.
마지막으로, HWI가 “MY YOUTUBE LIBRARY”의 다음 타자로 추천하고 싶은 인물이 있다면?
과연 저 사람은 평소에 뭘 볼까 싶은 사람들의 이름이 머릿속에서 몇 지나가는데, 그 중 아무래도 영상을 만드는 사람들의 플레이리스트가 궁금하다. 3D 애니메이터 co.pic를 추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