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구가 미국에 전하는 희망

이미지 출처 : ESPN

미국 오리건주에 살며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존 쿠퍼 씨는 일과를 마치고 야구 경기를 보는 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채널은 물론 미국 최대 스포츠 채널 ESPN. 하지만 화면에 등장하는 선수는 마이크 트라웃(Mike Trout), 클레이튼 커쇼(Clayton Kershaw), 류현진(Ryu), 추신수(Choo) 등의 MLB(Major League Baseball : 미국 프로야구 리그) 스타들이 아닌 이대호, 양현종, 양의지, 구자욱 등등의 KBO 선수들이다. 존 쿠퍼 씨는 낯선 선수들의 이름이 익숙해질수록 점점 더 KBO에 빠져든다. 워낙 다이나믹한 경기 결과 탓에 ‘주말 예능’이라 불리는 잉글랜드 프로축구 리그 EPL보다 KBO의 예능감은 더 하면 더 했지, 절대 덜 하진 않다. 존 쿠퍼 씨를 비롯한 미국의 야구팬들은 이제 헤어 나올 수 없는 마구(魔球)의 늪에 빠질 것이다.

최근 많은 일의 연유가 그러하듯, 존 쿠퍼 씨는 코로나19 때문에 한국프로야구를 보기 시작했다. 코로나19에 대응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대처는 끔찍한 수준이고, 따라서 수많은 발병자와 사망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한국의 지난 3, 4월이 그랬듯 대부분의 야외 행사가 취소됐고, 스포츠 역시 예외일 순 없었다. NBA(미국 프로농구 리그)는 2020년 3월 12일을 기준으로 무기한 중단 중이다. 그리고 시장규모로 따졌을 때 NBA의 2배에 해당하는 MLB는 개막조차 못 하고 있는 상태. 스포츠에 미친 미국인들은 절망에 빠졌다. 이대로라면 9월에 개막하는 미국 최고 인기 스포츠 NFL(미국 풋볼 리그)마저도 취소되지 않을까 두려움에 휩싸였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ESPN은 아이에게 홈런볼을 건네는 인상 좋은 아저씨처럼 KBO를 가져온 것이다.

계약 내용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자. 아쉽지만 전 경기가 방송되는 것은 아니다. KBO가 개막했던 5월 5일 대구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 VS NC 다이노스’ 경기를 시작으로 매일 한 경기씩만 미국 내 전파를 탄다. 또 리그 경기뿐만이 아니라 한국시리즈를 포함한 포스트시즌까지 ESPN 중계는 이어지고, KBO와 관련 뉴스 및 하이라이트 프로그램도 편성한다는 내용이다. ESPN의 프로그래밍 수석 부사장인 버크 매그너스(Burke Magnus)는 “흥미롭고 수준 높은 시합을 선사할 KBO 리그의 영어 중계권을 단독으로 확보해 기쁘다. 우린 야구를 기록한 역사가 깊고, 스포츠 팬들에게 이런 이벤트를 전달할 수 있어 기쁘다(We’re thrilled to become the exclusive English-language home to the KBO League and to showcase its compelling action and high-level of competition. We have a long-standing history of documenting the game of baseball and we’re excited to deliver these live events to sports fans.)”라고 밝혔다.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현재, 이미 개막전 경기가 미국의 전파를 타고난 뒤 흥미로운 반응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중 가장 폭발적인 건 배트 플립(Bat Flip) 즉 ‘빠던(빠따 던지기)’에 관한 미국인들의 반응이다. 배트 플립은 주로 타자가 홈런을 쳤을 경우, 베이스를 돌기 전 방망이를 멋지게 집어 던지는 행위를 말하는데 이는 MLB에선 암묵적으로 금기시돼 있다. 상대 선수들을 무시하는 행위라는 것이 그 이유인데, KBO에선 가당치도 않다. 롯데 자이언츠의 전준우, 기아 타이거즈의 최형우 등 배트 플립 스페셜 영상이 있는 선수들도 많다. 뭐 그 모양새가 투수를 조금 조롱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타자들의 변명으론 몸과 방망이가 회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발생하는 것이라곤 하는데…ㅋ… 뭐 어떤가! 배트 플립을 보는 건 너무 즐겁고 속 시원한 일이다. 오죽하면 KBO를 소개하는 ESPN의 콘텐츠에서 배트플립 코너를 따로 만들었겠는가. 해당 코너에서 ESPN은 한국의 ‘빠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한국의 야구선수들은 마치 챔피언처럼 방망이를 집어 던진다. KBO의 빠던은 당신의 세계를 흔들고 당신의 영혼을 자유롭게 만들 것이다(Korean Baseball Player Flips Bat Like a Champion, This KBO Bat Flip Will Rock Your World, Free Your SouL)”. 과연 지당하신 말씀이다.

두 번째는 ‘PIZZA GUY 김준현’이다. 5월 5일 ESPN을 통해 중계된 경기는 앞서 말한 대로 대구에서 진행된 ‘삼성 라이온즈 VS NC 다이노스’의 경기였는데, 해당 경기장 외야 펜스에 개그맨 김준현이 모델로 활약하는 피자 광고가 붙어 있었다. 공이 외야로 갈 때마다 김준현과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피자를 본 미국인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트윗에 떠도는 김준현과 피자에 관한 반응을 잠깐 살펴보자.

마지막으로 눈여겨 볼만한 반응은, 어떤 팀을 응원할 것인지 결정하는 미국 야구팬들의 모습이다. 역시 스포츠는 응원과 함께할 때 더욱 재밌기 마련. 응원할 팀을 고르는 일에는 지역, 팀의 역사, 주변 사람들의 성향,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 등 많은 것들이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현재 미국 팬들의 KBO 응원 팀 고르기는 매우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를테면 자신이 응원하는 메이저리그 팀과 같은 색의 유니폼을 입는 팀을 응원한다거나, 삼성과 LG등 평소 사용하던 가전제품을 이유로 응원할 팀을 고르기도 한다. 그중 절정은 노스캐롤라이나주(North Carolina)에 사는 사람들이 NC 다이노스를 응원하는 배경에 있다. 이 이유는 나름 복합적인데, 자신들이 사는 노스캐롤라이나의 각 첫 글자가 붙은 데다가,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는 공룡 연구로 유명한 학교여서 NC 다이노스의 다이노스가 이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미국 팬들이 귀엽게 보이기조차 하는 이 상황은 그 열기가 매우 뜨거워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마이너리그 팀까지도 공식 트윗 계정을 통해 NC 다이노스에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전 세계는 분명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도 즐겁게 웃고, 희망을 나누고자 하는 시도는 단 하루도 멈춘 적이 없다. ESPN의 KBO 중계는 소수의 야구팬 정도를 기쁘게 할 사건처럼 보였지만, 단 하루 만에 다양한 이슈를 만들어내며 많은 이들을 즐겁게 하고 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예상치 못한 상황은 늘 등장했지만, 우리는 상상력과 서로에 관한 연대로 끝내 웃으며 떠드는 일로 마무리했다. 그날을 기다리며 알베르 까뮈가 쓴 소설 ‘페스트’를 다 읽고 덮었을 때를 떠올린다. 소설은 전염병이 발생하는 것으로 시작해 450여 페이지 내내 절망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긴 페이지의 절망을 참아가며 겨우 넘겼을 때 결국 날 맞이한 건 희망의 30여 쪽이었다. 그 짧은 분량이 주었던 벅찬 청량함. 이 코로나19가 현재 어디쯤 와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에겐 끝내 웃을 수 있는 페이지가 주어질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 저녁은 치킨을 시켜 야구를 봐야겠다. 아, 참고로 나는 롯데 자이언츠의 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