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미국에선 대통령 자리를 두고 한바탕 승부가 벌어졌다. 한국에선 프로야구 한국시리즈가 진행됐다. 전 세계는 전염병과 언제 끝날지 모를 승부를 이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연말을 향해가는 시간 앞에서, 막판 스퍼트를 가하며 성공적인 일 년의 마무리로 돌진하고 있다.
비즐라 비디오 룸(VISLA VIDEO ROOM)의 이번 주제는 대결이다. 하지만 ‘VS’란 주제로 글을 쓰는 것이 간단치만은 않았음을 고백한다. 글을 쓰는 내내 승부의 본질을 자문해야 했다. 답을 찾기 위해 승부와 관련된 여러 유명인의 말을 찾아보기도 하고, 기억에 남아 있는 승부들을 곱씹어 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선명해지는 것은 없었다. 승부로 결정되는 승자와 패자가 중요한 것인지, 그 결과를 내기 위해 쓰인 드라마가 중요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질문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고, 어쨌든 우리에겐 네 편의 영화가 찾아왔다. 보내온 글들을 읽다 보니 승부를 향한 각기 다른 시선에 더욱 혼란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위로를 받는다. 당신의 현재 진행형 승부에도, 이 영화들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선거 캠페인(The Campaign)
11월 전세계가 주목한 세기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대통령 선거. 선거전부터 막장급 토론을 비롯해 지지자들의 무력 충돌 등 소란스럽기 그지없는 뜨거운 대결이었다. 그만큼 이 선거는 코로나19 상황을 비롯해 노선은 다르지만, 미국의 위태로운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는 미국인들의 불안감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더 격렬했다.
공교롭게도 이번 선거의 주요 경합주였던 노스캐롤라이나를 배경으로 격렬한 대결을 펼친 작품이 있었으니 영화 “선거 캠페인 (The Campaign)”이다. 영화는 북부 캐롤라이나주의 하원의원 ‘캠 브래디(윌 페렐)’의 재선을 앞두고 휘말린 스캔들로, 그를 지지하던 재력가들이 지역 관광 센터 대표이자 어딘가 너드 같은 구석이 있는 ‘마티 허긴스(잭 갤리퍼내키스)’를 지지하면서 대결 구도가 펼쳐진다. 킹 메이커가 마티 허긴스에게 붙고 그는 점점 싸움견처럼 변하게 된다.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온갖 인신공격과 흑색선전을 주고받는 것에서 더 나아가 서로에게 무력을 행사하고, 심지어는 상대방의 아내를 탐하는 비디오를 찍어 폭로하는 자충수까지 두며 점점 본질은 사라지고 상처뿐인 승리를 향해 상황은 치닫는다.
지난 9월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와 조 바이든(Joe Biden)의 미 대선 1차 TV 토론은 그야말로 막장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영화에서도 사실상 별 차이 없는 막장 토론을 보여주며 소름 돋는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막장으로 치닫는 흑색선전과 헛소리와 같은 공약과 의혹을 대충 얼버무리는 유세 현장의 모습은 현실 정치판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낄 것이다.무엇보다 선거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 재벌들의 입김과 지역 경제보다는 자신들의 탐욕의 배를 채우려 하는 모습을 그려내면서 미국의 금권주의를 비꼬고 있다.
어찌됐든 영화의 결말은 현실과 다르게 다행히 따뜻한 편이다. 자신들의 양심 고백을 통해서 잊고 있던 정치인으로서의 초심을 되찾고 서로 화해하면서 행복하게 끝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영화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이유는 진짜 정치계에서는 그런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지금은 야인으로 있는 정봉주는 오래전 한 강연에서 “국회의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재선”이라고 말 한적이 있는데, ‘금 뱃지’가 가져다주는 파워가 그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 힘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더러운 개싸움을 펼치면서 상대방을 절멸에 이르게 만들어버리는 공격을 성공시키는 것이 승리의 열쇠고 지금 정치판의 현실이다.
한국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 보복을 통해서 목숨을 잃거나 감옥에 간다. 결코 편한 자리가 아닌 것이 한국의 대통령 자리인가 하는 회의감이 든다. 이 땅에서 정치권들이 화해를 이루어낸 것은 1946년에 있었던 좌우합작 운동을 제외하고 그야말로 유혈이 낭자한 파이터 클럽 혹은 마치 끝나도 끝난 것 같지 않은 누아르 필름 같다.
최승원(Contributing Editor)
똑바로 살아라(Do The Right Thing)
지난 11월 3일 미국 대통령 선거에 이르기까지 미국에서는 인종주의로 분열된 사회의 개선을 촉구하는 이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그리고 무려 31년 전 미국 대선에 앞서 촬영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스파이크 리 감독의 “똑바로 살아라(Do The Right Thing)”는 뜨겁게 달궈진 2020년 미국 사회와 매우 흡사한 모습을 반영한다.
1989년 뉴욕 브루클린의 한 여름날, 스파이크 감독이 직접 연기하는 주인공 무키(Mookie)는 푹푹 찌는 열기를 뚫고 피자 배달을 다닌다. 카메라에 잡힌 다양한 유색인종 주민들이 살고 있는 동네의 모습은 활기찬 음악이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것은 당연하며 서로에게 인종 차별적 디스를 내뱉는 것은 덤인 듯하다. 일상적인 잡음 속 묵직한 붐 박스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던 무키의 동네 친구 라디오 라힘(Radio Raheem)은 길 한복판에 멈춰 영화의 펀치라인을 전한다. ‘사랑’과 ‘증오’가 적힌 너클을 휘두르며 그는 스크린 넘어 관중에게 사랑과 증오 중 사랑이 언제나 이기게 된다는 예언적인 말을 남긴다. 하지만 짙어가는 하루의 폭염과 함께 지역 상권을 두고 주민들 사이의 충돌은 결국 걷잡을 수 없는 대립에 도달하게 된다.
스파이크 감독이 직접 듣고 자란 지침인 ‘올바르게 행동해라(Do the right thing)’에서 구성하게 된 이 영화는 일상에 뿌리 내린 인종차별을 직면하겠다는 감독의 의지가 확고히 드러낸다. 그는 단조롭게 다뤄지는 흑백 갈등에서 벗어나 명확한 선과 악을 정의할 수 없는 뒤얽히고 일그러진 현실에서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묻는다. 그 어느 때보다 ‘흑인 생명은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가 열정적으로 이루어진 올해인 만큼 인종차별에 맞선 연대의 물결이 지속될 수 있도록 다시 되뇌어 본다: Do the right thing!
류다연(Contributing Editor)
45년 후(45 Years)
대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결을 펼치는 두 인물 간의 밸런스가 아닐까. 대결 상대가 너무 강하거나 약하면 붙어보기도 전에 흥이 떨어지기 마련. 먼치킨 상대보다는 진흙탕 싸움이 가능한 적절한 설정이 대결 구도를 더욱 쫄깃하게 만들어준다 생각하는 나에게 영화 “45년 후(45Years)”는 기막힌 밸런스 구도라 생각한 영화 중 하나다.
영화는 결혼 45주년 파티를 5일 앞둔 영국의 노부부‘제프(톰 커트니)’와 ‘케이트(샬롯 램플링)’에게 편지 하나가 도착하며 영화가 시작된다. 편지의 내용은 바로 50년 전 알프스 산을 등정하다 사망한 남편의 첫사랑 ‘카티야’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소식. 영화의 대결 구도는 바로 ‘45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 VS 남편의 첫사랑’이다. 45주년 결혼기념일 파티의 첫 댄스곡으로 45년 전 결혼식 때 사용한 플래터스(The Platters)의 “Smoke Gets in your Eyes”로 하자며 들떠 있는 아내에게 이 편지는 마치 결투 신청서와 같다.
‘이미 죽은 사람인데 상대나 되겠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감독은 특이한 설정 하나를 넣으며 대결의 밸런스를 맞춘다. 바로 카티야의 시신이 빙하 속에 갇혀 있어 20대의 외모를 유지한다는 것. 70대의 나이를 먹고 20대 첫사랑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다면 어떤 남자가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 ‘살아있지만 70대의 외모를 가진 케이트’와 ‘죽었지만 20대의 외모를 유지하는 카티야’. 45년의 결혼 생활이 5일이라는 시간만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정말 미묘한 밸런스 설정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영화는 회상 장면 하나 없이 오직 연기 디테일 만으로 카티야에게 생명을 부여한다. 남편 제프는 편지가 도착한 이후 시내 한번 나가지 않던 사람이 여행사를 찾아가 스위스 비행기를 알아보고, 끊었던 담배를 피우며, 밤마다 다락방에 올라가 통 나오질 않는다. 이런 남편의 이상 행동을 지켜보는 아내 케이트는 샬롯 램플링의 연기를 통해 경탄을 자아내는 수준으로 질투와 불안감을 보여준다. 결국 다락방에 올라가 남편이 숨겨둔 카티야의 사진을 발견할 때 표정 연기만으로 카티야를 처절한 상대로 환생시킨다. 하지만 45년간 몰랐던 충격적인 사실들을 5일 동안 발견하면서도 작중에서 케이트는 제프에게 한 번도 화를 내지 않는다. 온 다락방을 다 뒤진다 하더라도 결국 남편의 머릿속은 어쩔 수 없다는 패배감일지도.
결국 영화는 두 가지 사랑의 형태 중 어떤 사랑이 더 강한지 대결하는 듯하다. 연인 몰래 머릿속 다락방을 가진이라면 이 영화를 보며 누구의 승리인지 한번 판단해 보시길. 영화의 엔딩곡으로 45년 전 결혼식의 첫 댄스곡인 플래터스의 “Smoke Gets in your Eyes”가 흘러나오는데, 감독은 이 영화의 시작이 편지가 도착한 5일 전이 아닌 45년 전 결혼식부터라는 뜻으로 엔딩곡을 배치한 건 아닐까. 이 곡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과 함께 오묘한 수미상관을 완성시키며 영화를 마무리한다.
‘They asked me how I knew, My true love was True‘
(내 진실한 사랑이 진실인 것을 어떻게 아냐고 물었죠)
박한수(Contributing Editor)
폭스캐처(FOXCATCHER)
레슬링 매트 위에 두 남자가 서 있다. 둘은 서로를 붙잡고, 빠져나가고, 다시 붙잡고, 다시 빠져나가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끝내 한 남자가 쓰러지고, 뒤집어지기까지 하면 시합은 종료된다. 시합은 종료됐다. 하지만 영화는 종료된 시합의 승자를 축하할 생각도, 패자를 연민할 마음도 없는 것 같다. 애당초 이 승부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천천히 살펴본다. 분명 카메라는 밀착해 이 승부를 찍고 있다. 그럼에도 카메라의 관심사는 승부가 아닌 다른 무언가에 가 있다. 이 말을 달리 적어보자면 카메라가 붙잡고 있던 승부는 매트 위의 레슬링이 아닌, 링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또 다른 어떤 승부다.
그 승부를 단순히 형을 향한 동생의 열등감, 명분과 정통성을 원하는 재력가의 욕망 등이 충돌하는 것 정도로 해석한다 해도 오류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성조기와 후반부 관중이 연호하는 ‘U.S.A’가 마음에 걸린다면, 이 승부를 미국의 역사와 결부시켜 볼 수도 있다. 각 인물의 욕망과 결여는 미국 역사가 지닌 근원적인 콤플렉스와 그로부터 파생된 열등감, 폭력성 등과 닮았다. 이런 해석은 감독인 베넷 밀러가 전작인 “머니 볼”에서 보여준, 그러니까 스포츠를 소재로 삼되 그 자체를 재현하는 것엔 관심도 없다는 듯한 태도를 생각하면 결코 과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모든 승부를 둘러싼 또 하나의 승부는 현실과 영화 사이의 승부다. “폭스캐처”는 익히 알려진 대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주연 배우인 마크 러팔로 역시 실제 레슬링 선수 출신이다. 그러나 영화는 현재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현실이 될 순 없으며, 현실은 영화를 통해 재현되는 순간 사라지고 만다. 따라서 현실을, 현재의 영화로 옮길 때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이냐 하는 팽팽한 줄다리기가 “폭스캐쳐”가 진행되는 화면 위에 함께 존재한다. 밀착할 것인가, 떨어질 것인가. 관객 역시 그 승부의 일원이 되는 것을 피하기는 힘들 것이다.
최직경(Contributing Editor)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