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곳곳 연말연시를 알리는 형형색색의 전구, 루미나리에가 반짝이지만, 거리는 휑하다. 마음도 편치 않다. 그리 오래지 않아 잠잠해질 것 같았던 코로나바이러스(COVID-19)가 재차 기승을 부리고, 주변의 안타까운 소식만이 귀에 맴돈다. 그래도 연말연시, 다가오는 해에는 새로운 희망을 품어야 하지 않겠나.
작년만큼 가족과 연인, 혹은 친구들과 함께 떠들썩한 연말을 보내기는 힘들겠지만, 특히나 힘들었던 2020년을 보내고 2021년을 맞이하며, 마음이 담긴 선물을 주고받는다면, 조금 더 기분 좋게 한해를 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미처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VISLA 매거진 에디터가 10만 원 이하로 구매할 수 있는 몇 가지의 제품을 추천해보았으니 찬찬히 스크롤을 내려보자.
몇 해가 지나도 선물 고르는 일이 참 어렵다. ‘내 돈 주고 사긴 아깝지만, 공짜로 받으면 좋은 것’과 같은 절대 불변의 공식이 있지만, 그 안에서도 조금 더 받는 이의 취향, 그리고 브랜드와 멋 등 여러 가지 조건을 따지다 항상 얼래벌래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만큼은 그저 추천만을 하는 일이니 조금 더 느긋하게 제품을 추려봤다.
최근 꽤나 괜찮은 브랜드를 하나 발견했는데, 앗숨(adsum)이라는 패션 브랜드를 주의 깊게 보고 있다. ‘애드섬’이라고 읽는 줄 알았는데, 앗숨이더라. 라틴어로 “예, 여기 있나이다”라는 뜻이라고. 아무튼, 캐주얼웨어와 스트리트웨어가 적절히 섞인 듯한 브랜드의 무드가 꽤 볼만 하다. 최근에는 세 브랜드와 협업 블랙와치 패턴을 주제로 협업을 진행했는데, 이번에 추천할 선물은 영국의 우산 전문 브랜드 런던 언더커버(London Undercover)와 협업한 타탄 우산이다.
개인적으로 제 값 주고 사기 아까운 물건 1위가 우산인 것 같아서. 콤팩트하게 접을 수 있는 3단 우산이고, 무엇보다 손잡이가 나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게 상당히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아 해외 배송료를 더해도 10만 원이 넘지 않는다. 바깥 외출이 어려운 지금이지만, 눈이 펑펑 오는 날 블랙와치 패턴 우산을 쓰고 고요한 밤거리를 걷는 상상을 해보자. 왠지 모르게 영국 신사가 된 기분일 것 같지 않나.
오욱석 / VISLA 매거진 에디터
코로나바이러스(COVID-19)의 여파로 9시면 술집이 다 닫으니 사람들은 집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집에서 마시게 되면 바에서 마시는 것보다 가격대비 와인이나 위스키에 접근하기 쉬워진다. 고로 코로나 이후 고급주류 시장이 엄청나게 커졌다고. 주변에도 위스키나 와인, 혹은 알 수 없는 술을 집에서 이렇게 저렇게 해서 마시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아졌다. 바가 닫을 8~9시가 되면, 젊은이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는 술과 먹거리를 담은 큰 봉투를 싸 들고 누군가의 집으로 다 같이 놀러 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시대에 10만 원으로 큰 재미를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10만 원짜리 술을 사주는 것도 좋겠지만 마시고 나면 없어질 술보다는 좀 더 오래 남을 그 무언가…….
일본에는 80년대부터 연재하여 지금까지도 연재 중인 어떤 만화가 있다(단행본은 34권까지 나와 있다). 바로 ‘바 레몬하트’라는 만화인데, 주인공인 바의 마스터와 단골들이 특정 술에 관한 이야기를 짧은 에피소드로 풀어낸다. 조금이라도 유명한 술이라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닌, 지역의 역사와 함께 존재하기 마련이다. 고로 호기심 넘치는 이야기를 동반한다. 지식도 얻을 겸 소소하게 볼 만하다. 술자리나 술을 사러 갔을 때 ‘바 레몬하트’에서 봤던 술이 나오면 슬쩍 아는 척하기도 좋겠다. 세상의 모든 진귀한 것들이 일본으로 흘러갔다고 하는 버블경제 시대에 탄생한 만화다. 만화를 보다 보면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되게 일찍이 다양한 고급 주류 문화가 형성됐다는 점도 재미있다. 단점이라면 아무래도 연재가 30년이 넘었기 때문에 현실과 맞지 않는 정보나 납득하기 어려운 장면들도 간혹 등장한다.
술을 자주 같이 마시는 호기심 가득한 친구에게 ‘바 레몬하트’ 1권부터 20권을 선물하면 어떨까. 20권이라는 분량이 좀 부담스럽다면, 1-10권 정도로 돈을 아낄 수도 있다. 심지어 돌려볼 수도 있고, 받는 이가 재미없어서 당근마켓에 팔면 어쨌든 또 누군가는 재밌게 볼 수도 있는 지속가능한.. 만화책 ‘바 레몬 하트’를 추천해본다.
박진우 / VISLA 매거진 그래픽 디자이너
Vince Guaraldi Trio / A Charlie Brown Christmas
친구의 집에 턴테이블이 없다고 바이닐 선물을 망설이지 말자. 12인치 바이닐의 커다란 커버아트는 인테리어 소품 역할 또한 충실히 수행할 것이니. 특히, 찰리 브라운 크리스마스 바이닐은 연말연초 인테리어 소품으로 제격이다. 단, 구하기 쉬운 바이닐이니, 레코드를 꽤 모은 친구에게 선물할 생각이라면 소장 여부를 반드시 체크하자.
황선웅 / VISLA 매거진 에디터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떠나보내는 술자리는 마음속 시원섭섭한 감정을 털어낼 목적이기도, 동시에 다가오는 새해에 대한 묘한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함이기도 할 것이다. 비록 이전처럼 함께 모여 시간을 보내기엔 힘든 상황이지만 연말연시마다 늘어나는 술 소비량은 그만큼 많은 이들이 술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는지.
여러모로 조심스러워지는 이 시점. 안전하고 건강한 음주문화를 즐기고 과한 음주로 인한 후폭풍을 예방할 수 있을 법한 음주 측정기를 주변 애주가에게 선물해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 주변의 흔한 일상용품처럼 자주 사용하게 될 물건은 아닐 테지만, 본의 아니게 하게 될 수 있는 숙취 운전을 예방함은 물론, 휴대폰과 연동되는 전용 어플리케이션을 통한 자가 측정은 음주 이후 다음날의 숙취 여부를 파악, 본인만의 ‘숙취 데이터’를 객관화하여 당사자의 일상생활 가능한 주량을 예측하는 것 또한 가능하기에 하나쯤 구비해두고 있다면 괜스레 든든할 법하다. 마음을 담아 선물을 주고받는 순간은 그 선물이 무엇이 되었건 간 기분 좋은 순간이지만 내 돈 주고 사기엔 어딘가 애매한 물건을 선물하며 받는 이의 만족도를 높여보자.
윤태영 / VISLA 매거진 컨트리뷰팅 라이터
Braun Classic Reflex Control Travel Alarm Clock
한번 살 때 제대로 된 제품을 사서 오래 쓰자는 마음가짐으로 쇼핑에 임하다 보면 가격은 한도 끝도 없이 비싸지곤 한다. 갖고 싶지만 넉넉지 못한 주머니 사정에 괴로울 때 나 같은 경우 빈티지라는 대안을 이용하는 편인데, 그마저도 일찍이 그 가치를 인정받은 제품들은 오리지널리티라는 미명 아래 가격이 떨어지지 않거나 더 비싸지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그럴 때 찾아오는 달콤한 유혹이 바로 원하는 브랜드나 디자이너가 제작한 물건 중 가장 저렴한 녀석으로 이상적인 것에 대한 소비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다. 차선책이다 보니 당장은 나에게 필요 없는 물건일 가능성이 높지만, 하나씩 차곡차곡 모으자는 마음으로 임하면 이쪽도 꽤 만족도가 높다. 그러나 잔고가 딱한 수준일 경우 가진 돈 내에서 최상의 만족도를 내기 위한 갈등에 또 한 번 부딪치게 된다. 그렇게 쓸 돈을 모아서 큰 놈 하나를 산다면 하는 전제가 또 한 번 마음을 흔들어놓기 때문이다. 대놓고 눈치챘겠지만 구구절절 늘어놓은게 사실 내 얘기라서, 조금 염치 없지만 내가 선물로 받는다면 자잘한 만족도가 대신 채워질 것만 같은 선물을 골라보았다.
최근 살림살이를 구매하는 데 푹 빠진 터라 식기류를 권하고 싶었지만 왠지 VISLA 독자가 그다지 원하지 않는 선택지일 것 같아 고른 것이 바로 여행용 알람시계다. 이미 알 사람은 다 알겠지만 “Less But Better”이라는 슬로건을 남기며 일찍부터 클래식함의 정수를 선보인 디터 람스(Dieter Rams)가 30년간 수석 디자이너로 임한 브라운(Braun)사 제품으로 자취생이나 제시간에 기상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 이에게 주면 좋겠다. 딱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아이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미니멀한 디자인은 호불호 없이 받는 이의 마음을 무난하게 충족해 줄 것. 특히 해당 모델은 디터 람스가 직접 디자인에 참여한 제품은 아니지만 그와 동시대에 브라운에서 활동하던 디트리히 룹스(Dietrich Lubs)의 90년대 제품을 2000년대에 리이슈 한 것으로 디터 람스가 활동하던 시절 브라운의 미학을 지켜낸 제품 중 아직까지 비교적 새 상품으로 구하기 쉬운 제품으로 알려져 있고, 2015 s/s 슈프림(Supreme) 협업 제품으로도 제작된 바 있다. 가격은 네이버 최저가로 검색했을 때 배송비 포함 10만 원이 채 넘지 않는 82,330원이다.
한지은 / VISLA 매거진 에디터
SUBU x THE MUSEUM VISITOR ‘Printed Down Sandal’
잠시 나갔다 들어오는 것이 일상이 된 요즘. 감각적인 슬리퍼를 선물하고 싶다면 더 뮤지엄 비지터(The Museum Visitor)와 수부(SUBU)의 협업 제품인 ‘다운 샌들’은 어떨까. 더 뮤지엄 비지터가 도쿄 기반의 샌들 브랜드인 수부와 함께 특유의 둥그런 패딩 샌들 쉐입을 활용한 총 2가지 디자인의 샌들을 출시했다. 더 뮤지엄 비지터의 시그니처인 플라워 패턴과 데님을 혼합한 프린팅, 어퍼 전면을 덮은 패치워크 식의 디자인이 돋보인다.
부드러운 스펀지 바닥과 단열재가 충전된 어퍼로 발에 편안함을 제공하며, 생활 방수가 되는 나일론 소재라 발을 따뜻하게 유지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추운 연말, 편리와 보온성, 멋까지 잡고 싶은 이들에게 포근한 다운 샌들이 제격. 가격은 9만8천 원, 더 뮤지엄 비지터 공식 웹사이트에서 구매 가능하다.
강다솔 / VISLA 매거진 컨트리뷰팅 라이터
선물에 앞서 그 선물을 받을 누군가를 생각한다. 선물 자체는 그저 가격이 붙은 소비재에 불과하나 상대의 취향, 기호를 고려해 오랜 시간 그가 바라왔거나 시기적절하게 필요한 것을 찾는다면 똑같은 물건도 그 가치는 고민의 시간에 비례해 높아질 것. 그저 순간적인 충동에 집어 온 선물이나 사회적 관계의 압력으로부터 비롯된 선물 등 선물의 상황과 사정은 다양하게 나뉠 수 있다 하더라도 지금 적절한 예는 아니니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선물로 하여금 상대방이 크게 기뻐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때, 선물하는 주체로서는 답례보다도 그 선물을 고르고 준비하는 시간이야말로 소중한 대가로 돌아올 터. 상대와 내가 함께 통과한 세월을 거슬러 오르는 열정적인 탐색의 기쁨. 결국 길고 긴 말로 늘어놓았지만 선물이라는 것은 ‘선물을 받는 사람이 기뻐할 만한 물건’일 때 제 값을 한다는 뻔한 이야기다. 꽃을 살 돈이 없어 꽃을 그렸다는 클림트의 편지지부터 티셔츠로 12억을 번 염따의 벤틀리까지, 이 세상 모든 것은 선물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이 화면을 보고 있는 독자에게 무엇을 추천해야 할까? 맥 빠지는 결론이지만 나는 앞서 말한 과정을 생략하더라도 불특정 다수가 무난하게 선택할 수 있는 선물, 고민 없이 제임슨 위스키를 고르겠다. 요즘 같은 시기에 불쑥 집에 놀러 가도 될 만큼의 친분이 있고, 답례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적당한 심리적 무게의 선물이라면 3만 원 안짝의 위스키 한 병이 좋겠다. 나를 알 만큼 알고 있는 술친구들은 대부분 소주파지만, 이제 우리는 나이도 먹었고 몸도 예전 같지 않다. 다행인 건 평생 소주만 먹을 것 같은 친구들도 이제 조금씩 와인이나 위스키 등 서방에서 흘러들어온 낯선 유리병들을 대충 양주로 퉁치지 않고 제법 라벨을 솎아내며 한두 잔씩 곁들일 줄 아는 나이가 됐다는 것이다. 세월이 야속하다는 어른들의 말이 조금씩 피부에 와 닿을 때쯤 이에 저항할 방법은 역시 더 좋고 비싼 술을 사 먹는다는 자본주의적 해법에 도달한다.
소주로 점철된 술자리는 곧 전투에 가깝고, 실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우발적인 사고도 잦게 발생하지만 여럿이 둘러앉아 위스키 한 병을 따고 그 자리를 시작한다면 아무래도 언더록 한 잔을 천천히 음미하며 속내도 터놓고, 얼음을 굴리는 사이 진심 어린 덕담까지 주고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주보다 무겁고 달큰한 이 위스키는 오크통 속에서 몇 년을 숙성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하는데, 그것은 마치 상대와 내가 타인으로 만나 인연의 굴레 안에서 관계를 쌓아 온 시간처럼 들리기도 한다. 결국 다시 소주로 귀결되어 골이 빠개지고, 지갑 하나쯤 없어지는 게 어색하지 않은 똥술로 지나가더라도 시작만큼은 우아하게, 적당히 문학적인 풍경을 자아내 보는 것이 어떤가. 집에 제임슨 빈 병이 좀 쌓이면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려서 조촐히 지난밤의 부끄러움을 위안할 맛도 날 테니까.
권혁인 / VISLA 매거진 편집장
에디터│오욱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