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VISLA 인물 열전의 다섯 번째 순서가 찾아왔다. 이번 회차에서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우주를 창조한 한 남자를 다루고자 한다. 평소 자신이 무려 6억 살이라고 주장한 이 남자는 ‘검은 피카소’라 불리는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와 함께 힙합 트랙을 발매했으며, 락스테디 크루(Rocksteady Crew), 아프리카 밤바타(Afrika Bambaata), 팹 파이브 프레디(Fab Five Freddy)와 유럽을 돌며 힙합의 탄생을 알리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그는 고딕 퓨처리즘(Gothic Futurism)이라는 독창적인 예술론을 창조했으며, 거리와 미술관에서 자신의 예술 세계를 활발히 알렸고, 훗날 슈프림(Supreme)과 협업을 진행한 첫 번째 아티스트가 된다.
한 사람의 업적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성취를 이룩한 이 남자의 이름은 라멜지(RAMM:ΣLL:ZΣΣ). 외모와 이름, 예술세계까지 어느 하나 평범한 것이 없는 종합예술가이지만, 국내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소개된 적이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에 VISLA가 그를 직접 소개하기로 결심, 라멜지의 유일무이한 삶을 따라가 본다.
괴짜의 젊은 시절
“당신이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만 있다면, 라멜지는 단 20분간의 짧은 대화만으로도 당신의 삶 전체를 바꿔놓을 수 있는 사람이다.”
짐 자무쉬(Jim Jarmusch)
라멜지는 1960년 12월 15일, 뉴욕의 저소득층 거주지역 파 로커웨이(Far Rockaway)에서 태어났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어머니와 이탈리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유년 시절 대부분은 베일에 싸여있는데, 특히 그의 본명은 주변인들 사이에서 철저한 비밀에 부쳐져 대중에게 공개된 적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 라멜지는 그가 1979년에 정식 개명한 것으로, 문화·종교적 움직임인 네이션 오브 갓스 앤 어스(Nation of Gods and Earths)의 일원, 자멜-지(Jamel-Z)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그는 ‘RAMM:ΣLL:ZΣΣ’가 일반적인 이름이 아닌 하나의 공식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M’은 진도(Magnitude)를 뜻하는 것이고, 두 개의 ‘L’은 경도와 위도(Longitude와 Latitude)를 의미하는 등 철자마다 의미가 부여된 식이다.
청년 시절 라멜지는 매우 다양한 경력을 쌓았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클라라 바튼 보건 전문학교(Clara Barton High School for Health Professions)에서 치기 공학을 공부했으며, 맥라멜지(Mcrammellzee)라는 이름으로 모델로 활동했고, FIT(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주얼리 디자인을 단기간 공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라멜지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이 중 그 어느 것도 아닌 그래피티였다. 필라델피아에서 시작되어 1970년대에 뉴욕에 상륙한 그래피티는 도심을 달리는 지하철 위에서 그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라멜지 역시 자신의 아버지가 철도경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불법적이고 위험한 흐름에 동참했는데, 이 선택은 그의 예술가적 삶의 시작점이 되었다.
그래피티 문화의 흥망성쇠, 그 중심에서
위에서 언급했듯, 뉴욕에 상륙한 그래피티 문화가 가장 빠르게 정착한 곳은 지하철 위였다. 그라피티 작가(Writer)들이 지하철을 선택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우선 지하철은 다양한 지역의 작가 간 소통을 가능케 했으며, 작품을 뉴욕시 전체에 노출시켜 더 큰 명성을 얻을 기회를 제공했다. 이 같은 이점 덕에 작가들은 감전사, 충돌과 같은 위험과 존 린지(John Lindsay) 뉴욕 시장이 이끄는 반-그래피티 연합(1971-1973)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너도나도 지하철을 점령해나갔다.
그래피티 문화의 부흥에 발맞춰 라멜지 역시 1974년부터 자신만의 표식을 새기기 시작했다. ‘Phase One’, ‘Dondi’와 같은 전설적인 라이터들로부터 영감을 받은 그는 특히 자신이 거주하는 파 로커웨이 지역을 지나는 지하철 A 노선을 주 활동 무대로 삼았다. 그는 데스 코맷 크루(Death Comet Crew)와 종종 함께했으며, ‘A-One’, ‘Delta2’, ‘Kool Koor’, ‘Toxic’과 함께 태그 마스터 킬러스(Tag Master Killers)라는 크루를 결성하기도 했다.
라멜지가 이후 고딕 퓨처리즘(Gothic Futurism)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되는 개념을 떠올린 것도 이즈음이다. 라멜지의 태그는 마치 무기를 연상케 하는 뾰족하고 폭발적인 선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설명할 때 “언어, 정보의 오류 그리고 억압적인 사회와의 전쟁을 위해 단어들을 무장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그는 “대부분의 사람은 전쟁이라고 하면 총을 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것만 떠올리지만, 우리의 전쟁에서는 단어가 우리를 대신해 싸워주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폭발적인 기세로 뻗어 나가던 그래피티 문화는 불행히도 한 정치인이 주도한 캠페인으로 갑작스러운 변화를 맞게 된다. 존 린지 뉴욕 시장의 뒤를 이은 에드워트 카치(Edword Koch) 시장이 그래피티 문화를 뉴욕시의 범죄율 상승과 시민 의식 저하의 원인으로 지목하며 2차 ‘그래피티와의 전쟁(1980-1983)’을 주도한 것이다. 그가 진행한 반-그래피티 캠페인은 해당 문화에 대한 시민의식을 부정적으로 바꿔놓았다. 또한, 메트로폴리탄 교통국(Metropolitan Transportation Authority)의 국장으로 임명된 데이빗 L 건(David L. Gunn)은 무려 2,000명의 청소 인력을 고용해 24시간 언제라도 그래피티가 새겨지는 즉시 전동차 청소를 감행하는 등 초강수를 두었다.
결국 카치 시장의 조치는 그래피티 문화를 지하철 위에서 다시금 도심 속 골목으로 돌려보내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장 미셸 바스키아나 키스 해링(Keith Haring)처럼 불법 그래피티 작업을 해오던 라이터 중 일부는 순수 미술로 전향했다. 라멜지 역시 지하철역을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그래피티 문화가 갤러리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문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을 잃고 말았다. 명성을 얻기 위한 그래피티 작업은 이 문화가 하위문화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다”라고 말하며, 그래피티 작품이 상업적으로 거래되는 옥션에서는 더 이상 영감의 ‘가열제’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탄했다.
시대적 변화에 낙심한 그는 결국 트리베카(Tribeca) 지역에 위치한 한 건물의 꼭대기 층으로 숨어들어 간다. 그는 56평 남짓한(2,000 제곱 피트) 그 공간을 ‘배틀 스테이션(Battle Station)’이라고 불렀고, 그곳에서 사회적 관습, 언어, 문화에 맞서기 위한 자신만의 전쟁을 준비한다.
라멜지와 바스키아
‘배틀 스테이션’을 깊게 다루기 전에,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라멜지와 그의 슈퍼스타 친구, 바스키아의 관계를 알아보도록 하자.
1978년, 두 사람이 브래스 웨이트(Fred Brathwaite)의 소개로 만났을 때 바스키아는 낙서 화가로 막 활동을 시작한 참이었고, 라멜지는 뉴욕 지하철을 종횡무진하는 그래피티 라이터로 활약하고 있었다.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친구가 된 두 사람은 종종 티격태격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며 서로 많은 영감을 주고받았다. 바스키아가 1983년에 그린 작품, ‘할리우드 아프리칸(Hollywood Africans)’을 보면 그의 자화상 옆에 그래피티 라이터 톡식(Toxic)과 라멜지의 얼굴이 함께 그려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두 사람의 협업 작업물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힙합 싱글 “Beat Bop(1983)”이다. K-Rob과 라멜지가 랩을 하고, 바스키아가 프로듀싱과 앨범 커버를 맡은 이 프로젝트에는 꽤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어느 날, “Beat Bop”의 프로듀싱을 마친 바스키아는 라멜지와 K-Rob을 불러 자신의 곡을 리뷰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한때 마돈나(Madonna)와의 열애 사실을 공공연히 드러낼 정도로 유명세에 집착했고, 소싯적 밴드 활동을 하기도 했던 바스키아는 프로듀서뿐 아니라 래퍼로서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직접 쓴 가사를 내밀었지만, 훗날 라멜지의 회고에 따르면 바스키아의 랩 실력은 형편없었고, 특히 그의 라임은 너무 유치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K-Rob과 라멜지는 그 자리에서 가사를 찢어버렸다고 한다.
결국 ‘찐 친구들’의 충고로 “Beat Bop”의 방향성은 수정되었고, 바스키아는 래퍼의 자리에서 밀려나 앨범 커버와 프로듀싱을 맡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이 싱글은 공개 즉시 뛰어난 음악성을 인정받아 15만 장 이상 팔리는 히트를 기록하는데, 비음이 돋보이는 라멜지의 ‘갱스타 덕(Gangsta Duck)’ 스타일 래핑은 이후 사이프러스 힐(Cypress Hill)과 비스티 보이즈(Beastie Boys)에게 영향을 끼쳤고, 이 앨범은 라멜지가 뮤지션으로 활동하는 데 탄탄한 기반이 되었다. 훗날 그는 한동안의 공백기를 가진 뒤 2003년에 데뷔 앨범 [This is What You Made Me]를 발매하면서 다시금 음악 활동을 이어가기도 했다.
라멜지와 바스키아의 우정에 관한 에피소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에피소드는 이들이 한때 둘 중 누가 상대방의 작품을 더욱 실감 나게 모방하지 내기한 적이 있다는 것. 바스키아는 라멜지의 스타일을, 라멜지는 바스키아의 스타일을 모방하여 작품을 제작했는데, 훗날 라멜지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내기에서 승리했을 뿐 아니라, 자초지종을 듣지 못한 바스키아의 아트 딜러로부터 자신이 바스키아 풍으로 제작한 작품이 ‘바스키아의 커리어 통틀어 최고의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후 바스키아가 젊은 나이에 약물 중독으로 생을 마감하자 라멜지는 ‘배틀 스테이션’에 틀어박혀 자신만의 예술 세계로 더욱 깊이 빠져들어 간다. 완전한 은둔형 아티스트가 되어버린 그는 마치 금을 연성하는 연금술사처럼 그래피티, 아프리카 전통 예술, 애니미즘, 일본 애니메이션, 스케이트보드 등 다양한 문화를 한 데 섞어 자신만의 기묘한 우주를 창조해나간다.
고딕 퓨처리즘
라멜지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계속해서 ‘고딕 퓨처리즘’이라는 말이 언급된다. 한정된 지면을 통해 전달하기에는 꽤나 복잡한 개념이지만, 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인 만큼 간단하게나마 이 개념을 설명해보고자 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라멜지는 기존의 언어 체계(혹은 알파벳)가 인류에게 규율을 강요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곧 언어를 통제하는 사람은 누구든 다른 사람의 생각과 상상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뜻이다. 때문에 그는 기존의 언어 체계를 대체할만한 다른 시스템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영어 자체를 없애버리기 원했다.
그런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중세 수도승들이었다.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 읽고 쓰는 능력은 곧 권력이었다. 당시 성서를 포함한 사본을 베껴 쓰는 일을 담당했던 수도승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과도하게 장식된 문체를 만들어냈고, 심지어는 교황까지도 이해할 수 없는 독자적인 스타일, 즉 고딕체를 만들어냈다.
수도승들의 고딕체가 그랬듯, 기호를 파괴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더욱 강력한 기호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라멜지는 자신의 독특한 그래피티 문체를 비롯해 다양한 그림, 조형물들을 통해 언어 체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1979년에 자신의 예술론을 정리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라멜지의 독자적인 예술세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 이들이 있다면 링크를 통해 해당 논문을 직접 확인해 볼 것을 추천한다.
배틀 스테이션 속 수도승
“길을 걷다 보면, 종종 ‘도대체 이건 누구야?’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글쎄, 나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남자(Average Joe)다.”
한 인터뷰에서, “Garbage Gods” 마스크를 쓴 라멜지
1980년대 중반, 지하철을 떠나 방구석으로 숨어 들어간 라멜지는 그야말로 수도승같은 삶을 살기 시작했다. 아내와 단둘이 지내던 그곳에는 종종 지인들이 방문하곤 했는데, 라멜지는 특히 자신이 즐겨 마시는 술인 올드 잉글리쉬 800(Olde English 800, 40-ounces)을 들고 찾아온 친구들에게는 더욱 친절했다고. 하지만 은둔자의 소굴을 직접 목격한 이들은 그야말로 영문을 알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거리의 고물들과 세계 각지의 예술적 요소들이 뒤죽박죽 섞인 그곳은 그야말로 멜팅팟(Melting Pot), 즉 뉴욕의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은 복잡한 창고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입체적인 조형물을 주로 만들기 시작했던 그의 여러 작업물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Garbage Gods’ 시리즈다. 고물로 만든 사무라이 복장 같기도, 한바탕 전투를 치른 트랜스포머(Transformer) 같기도 한 22개의 수트로 이루어진 이 시리즈는 라멜지의 다양한 정체성을 상징했으며, 각각의 수트에는 ‘Alpha Positive’, ‘Reaper Grim’, ‘Crux the Monk’, ‘Destiny Destiny’, ‘Vain the Insane’과 같은 독특한 이름과 특징이 부여되었다.
‘Garbage Gods’ 중 라멜지가 가장 공을 들였던 것은 ‘Gash/Olear’으로, 이 수트는 완전히 착용하는 데만 4시간 이상이 걸리지만, 제대로 입고 나면 꽤나 근사할 뿐 아니라 불을 뿜는 등 다양한 기능을 선보일 수 있었다. 라멜지는 장난감 회사들이 ‘Garbage Gods’ 시리즈를 장난감으로 만들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해당 시리즈에 큰 애정과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며, ‘배틀 스테이션’ 밖으로 나갈 때는 거의 항상 수트를 입고 있었을 정도로 새로운 정체성에 흠뻑 빠져있었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라멜지의 기이한 독창성은 점점 더 심해져 1985년에는 ‘The Requiem of Gothic Futurism’이라는 제목의 오페라를 썼으며, 1990년대에는 자신이 정립한 고딕 퓨처리즘의 개념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만화책과 보드 게임을 제작하기도 했다. 지금은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었지만, 1990년대만 해도 작은 스케이트보딩 브랜드에 불과했던 슈프림(Supreme)과 힘을 합쳐 브랜드의 첫 협업 제품을 제작했던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지구를 떠나 다시 우주로
라멜지는 자신의 예술세계가 고스란히 잠들어 있는 ‘배틀 스테이션’을 사랑해 마지않았지만, 2001년에 9/11 테러가 터진 후 럭셔리 콘도 건축을 위해 그가 살고 있던 건물이 매각되면서 라멜지와 그의 아내 카멜라 자가리(Carmela Zagari)는 정든 보금자리를 떠나게 된다. 라멜지의 절친한 작가였던 데이브 톰킨스(Dave Tompkins)는 그가 ‘배틀 스테이션’을 떠나던 날, 처음으로 라멜지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다.
‘배틀 스테이션’을 떠난 라멜지 부부는 배터리 파크 시티(Battery Park City)의 작은 공간으로 이사했고, 그의 작품들은 고스란히 창고에 틀어박히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부는 경제적인 어려움마저 겪게 되는데, 라멜지는 취리히(Zurich)에서 개인전을 열고, 재즈와 실험 음악의 전당인 니팅 팩토리(The Knitting Factory)에서 기타리스트 버킷헤드(Buckethead)와 공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지만, 그의 친구들은 라멜지의 상태가 평소같지 않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2008년에 한 차례 발작을 겪는 등 위태로운 모습을 종종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배틀 스테이션’을 떠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2010년 6월 27일, 라멜지는 지구를 떠나 그가 왔던 미지의 세계로 다시 돌아간다. 4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그의 공식적인 사인은 심장병이었지만, 라 플라카(La Placa)를 비롯한 그의 친구들은 라멜지의 음주 습관과 작업 도중 들이마신 각종 유독성 가스가 진짜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그는 평소 작업할 때 마스크를 잘 쓰지 않았다고 한다). 라멜지의 절친한 동료 델타(Delta)는 그의 죽음에 대해 “나는 그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라고 말하며, “나는 그가 영원히 살 줄 알았다. 새로운 심장을 발명하든지 해서 말이다”라며 초월적 존재인 줄만 알았던 라멜지의 죽음을 비통하게 여겼다.
라멜지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 그의 작품들은 뒤늦게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된다. 로스앤젤레스 MOCA에서는 그의 회고전이 열렸으며, 창고에 갇혀있던 라멜지의 작업물들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레드불 아츠 뉴욕(Red Bull Arts New York)은 2018년에 “RAMMΣLLZΣΣ: Racing for Thunder”라는 이름의 전시를 열고 이를 “20세기의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지만 간과되어왔던 예술가 중 한 명에 대한 최대의 기록”이라고 밝혔다.
비록 이 기괴한 남자는 이제 우리 곁에 없지만, 외계에서 불시착한 듯한 그의 작품들은 아직도 지구에 남아 예술가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자신의 예술세계를 제외한 대부분의 것들을 비밀에 부쳐왔던 그는 어쩌면 정말로 우주, 혹은 먼 미래에서 찾아온 수도승이 아니었을까. 지금쯤 하늘 어딘가에서 자신의 ‘쓰레기 신(Garbage Gods)’들과 함께 우리를 내려보고 있을 그를 추억하며, 라멜지가 평생을 바쳐 구축한 그의 작품과 철학이 더욱더 많은 이들에게 소개되길 기대해본다.
이미지 출처 | Mari Horiuchi, Picture collection Dutch Graffiti Library, Stephen Torton, Jean Michel Basquiat, Angela Boatwright, Brian Williams, Keetja All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