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의 개척자 이두용 감독의 작품 세계

한국 영화계의 1980년대 전성기를 열어젖힌 영화감독 이두용이 지난 19일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느 때보다도 세계 무대에서 한국 영화가 사랑받는 오늘날, 국내 최초로 칸 국제 영화제에 진출하여 한국 영화를 알린 이두용 감독이었기에 그의 별세 소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만의 작품 세계에 관한 관심을 다시금 불러일으킨다. 이번 기회를 통해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운영하는 유튜브(YouTube) 채널 ’Korean Classic Film’의 이두용 컬렉션을 통해 찾아볼 수 있는 작품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뽕(1986)

서울에서 나고 자라 용산 고등학교와 동국대학교를 거친 이두용 감독은 액션 영화에 심취하여 초반의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그러나 재차 방향을 틀어 1970년대 후반부터 “초분”(1977), “물도리동”(1979) 등 한국의 토속 문화와 민중의 삶을 소재로 삼는 영화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마침내 “뽕”을 통해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거머쥐며 토속 멜로 장르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뽕도 따고 님도 보고’라는 유행어를 낳을 정도로 흥행을 기록했던 “뽕”은 노름꾼 남편을 둔 탓에 홀로 생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한 여인 안협집의 이야기를 다룬다. 자극적인 소재와 직접적인 정사 장면들로 인해 단순한 에로티시즘 영화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으나, “뽕”은 더는 밀려날 곳도 없이 가난했던 일제 강점기 시절 민중들의 절망적인 삶을 묘사한 자연주의적인 작품이다. 동명의 원작과는 달리 독립운동의 요소까지 다룬다는 면에서 80년대 군사 독재의 폭정에 대한 정치적 저항물의 색채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두루두루 회자되는 많은 명장면 중에도 필자는 유독 좋아하는 하나를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관객이 안협집의 생계 수단에 소개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영화는 일종의 “체험 삶의 현장”과 같은 방식으로 그의 업무 일과를 보여준다. 카메라는 안협집의 상반신을 클로즈업으로 담으며 관계가 절정에 치닫는 순간 안협집이 손으로 뽕밭의 포도를 쥐어짜는 숏으로 넘어가는데, 이는 안협집의 성적 능력과 욕망을 함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매춘하는 여성의 권력 혹은 타자화라는 주제까지 연장된다. 동네 사람들에게 음흉하고 험악한 시선을 받기 십상이지만, 안협집은 철저히 재화를 위해서 거래하는 여성이며, 상대방이 그 재화를 제공할 수 없는 인물이라면 거절하는 모종의 워크 에식을 가지고 있다. 억척스러운 생활인이자 팜므파탈 안협집의 캐릭터성은 “뽕”이라는 영화가 담고 있는 온갖 이질성과 모순 중 하나로, 이처럼 “뽕”은 다양한 방면에서 고민해 볼거리가 많은 포스트모던적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2. 피막(1980)

‘피막(避幕)’이란 사람이 죽기 직전에 격리하기 위해 마을 외딴곳에 마련된 집을 뜻하는데, 영화는 알 수 없는 병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강 진사의 장남 성민을 고쳐보려는 무당들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전국 각지 유명한 무당들 가운데 옥화라는 여인이 성민에게 원혼이 씐 것을 밝혀내며 성민과 강 진사, 그리고 마을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차츰 풀어나간다. 원혼에 얽힌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강 진사 사람들이 과거에 저지른 집단적 범죄와 잘못이 밝혀지며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포크 호러물의 장르적 특징이 나타나지만, 양반 며느리와 남자 노비의 사랑이 만들어낼 수 있는 비극을 통해 한국만이 보여줄 수 있는 민속적 에로티시즘과 봉건적 공포의 요소 또한 주목할 만하다.

“피막”의 장르적 특성과 토속적 색채에 비해 덜 거론되는 듯한 음악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고 싶다. 공포 영화는 고통이나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최대한 많은 지점에서 표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 원천을 종종 배경에 깔리는 소리와 음악에서 찾곤 한다. “피막” 또한 마을을 둘러싼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첫 장면부터 강렬한 음악으로 간담을 서늘케 한다. 다가올 파국을 예상하는 듯한 높은 피치의 피리 부는 소리는 마치 사이키델릭한 고블린(Goblin)의 “Suspiria”를 연상시키며, 이를 배경으로 비장한 표정의 무당들이 한 명씩 마을에 들어서는 모습은 마치 전쟁에 임하는 병사의 그것과도 같아 보인다. 이어지는 민속적 장면과 옥화가 굿을 할 때마다 박진감을 더해주는 무악은 당대 해외 관중에게 얼마나 색다르게 느껴졌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3. 용호대련(1974)

홍콩의 이소룡과 대만의 왕우, 맨몸으로 승부하는 중화권의 액션 스타들은 1960년대와 70년대 한국을 지배하며 한국만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국산 액션에 대한 갈증을 자극하기도 했다. 그러한 목마름이 커져가던 와중 이두용 감독은 앞서 언급했듯 무술 액션물에 심취해 초대 캡틴 코리아인 외다리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 이번에 소개할 “용호대련”은 모두 한해 내에 제작된 일종의 ‘이두용 외다리 시리즈’의 6편 중 첫 번째로,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난 재미교포 한용철을 졸지에 태권 스타로 만들어준 작품이다. 

액션 스타일은 중화권의 무술 영화를 표방했으나 전반적인 줄거리는 세르조 레오네(Sergio Leone)의 “황야의 무법자(Per un pugno di dollari)”를 참고했다는 면에서 한용철이 연기하는 주인공은 이름조차 없는 만주의 고독한 태권 고수로 나타난다. 어느 날 한용철은 중국인 왕으로부터 일본인 사사끼의 금을 훔쳐달라는 요청을 받는데, 이 금은 한국 독립군이 사용하고자 했던 자금을 탈취한 것으로 밝혀진다. 독립운동자금을 둘러싼 삼국 고수들의 대결 이야기는 다소 비약적인 인과관계와 내용 연결로 인해 어딘가 허술하게 느껴지지만, 다리로 따귀를 때리는 기발한 태권 액션과 격투 열전은 가히 환상적이라 할 수 있다. 


4. 최후의 증인(1980)

“최후의 증인”은 검열로 인해 거의 절반이 잘려 나간 상태로 개봉했을 때와 달리 추후 박찬욱, 오승욱 등 후배 감독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원래의 상태로 다시금 주목과 호평을 받은 대작이다. 작품은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한 형사가 연루된 인물의 과거를 파헤치다 과거 지리산 토벌대와 빨치산의 싸움을 접하게 되며 진실에 접근하는 여정을 다룬다. 약 20년에 걸쳐 지속된 정치적 다툼과 그 사이에서 생존해야만 하는 소시민의 비극을 그려내며 한국 범죄 스릴러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두용 감독은 영화의 시작 부분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어놓았고, 이 글귀 또한 물론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 1980년 이 시대에 어제의 진실이 무엇이고 가짜가 무엇이라는 것을 한 수사관의 집념적인 인간보호를 통해 가식 없이 토론하고 싶었다. 얘기도 어두운 얘기, 화면도 어둡다. 80년대엔 이런 어둠이 사라졌으면 한다” 짧았던 서울의 봄과 그 시기의 공포가 다시금 상기되는 요즘, 영화를 통해 빨치산이라는 민감한 단어를 당당하게 건드리며 과거를 외면하는 권력 세력을 비난하는 이두용 감독의 행동력이 더욱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안타깝게도 “최후의 증인”은 현재 유튜브와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제공되고 있지 않지만, 한국영상자료원에서 VOD를 소장하고 있으니 호기심이 간다면 링크를 통해 확인해 보기를.


이미지 출처 | K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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