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현실 기반의 패션 브랜드 HAPPY99

1999년, 바야흐로 새천년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한껏 높아지던 시절. 인터넷상에는 새로운 바이러스가 등장했다. 이름하여 ‘Happy99’. 당시 메일의 첨부 파일을 통해 일파만파 퍼져나가던 해당 바이러스는 사용자도 모르는 새 설치되며 여러 오류를 수반했다. 나도 몰래 설치되는 이 바이러스의 오류를 사용자는 어떻게 눈치챘냐고? 바이러스가 실행되면 화면에는 불꽃놀이 그래픽과 함께 ‘Happy New Year 1999!’라는 메시지가 등장했기 때문. 발랄한 메시지와는 대조적으로 침투한 바이러스에 사람들은 이마를 탁 쳤으리라. 

이제는 추억 속으로 사라진 ‘Happy99’는 뉴욕의 브랜드로 재탄생했다. 2018년 나탈리 응우옌(Nathalie Nguyen)과 도미닉 로페즈(Dominic Lopez)가 버츄얼 패션 브랜드를 시작한 것. 브랜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의 레트로 감성을 기반으로 3D 특유의 퓨처리스틱하고 동시에 키치한 이미지가 혼재해 있는 브랜드다. 버츄얼 패션 브랜드라니, 무슨 말인가 의아할 수도 있겠다. 쉽게 말해, 현실 세계보다 온라인상에서 착용할 수 있는 패션 아이템을 지향하는 브랜드라는 말이다.


Happy99, 새로운 패션 바이러스의 시작

응우옌과 로페즈는 연인 사이였다. 한가로이 데이트하던 나날들. 샌프란시스코에서 미술 대학을 졸업한 이후, 응우옌은 직장 문제로 인해 뉴욕으로 거주지를 옮기게 된다. 급작스레 장거리 연애를 시작하게 된 두 사람에게는 둘을 이어줄 연결고리가 필요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지금의 HAPPY99다. 다행스럽게도 둘의 취향에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응우옌은 옛날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열렬한 팬이었고, 로페즈는 현재는 닌텐도를 제작하는 세가 사의 드림캐스트 게임기에 푹 빠져 자랐기 때문. 두 사람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어린 날의 추억은 둘의 애정을 더욱 단단히 만들어주는 동시에, HAPPY99라는 브랜드의 뿌리가 됐다. 

사실 그들이 아주 처음부터 버츄얼 패션 아이템을 제작하려던 건 아니었다. 현실에 존재하는 신발을 만들고자 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당시 두 사람이 알아본바, 한 가지 디자인의 신발 제작을 하는데 틀 비용만 해도 2000달러에 육박하는 거금이 필요했다고. 두 사람은 재빠르게 ‘지금 할 수 있는 것’으로 눈을 돌렸다. 3D 프로그램으로 신발을 디자인했고, 포토샵을 통해 본인과 친구들의 사진에 자연스레 신발을 합성했다. 그렇게 맨 처음으로 두족의 디자인이 공개됐다. 

90년대의 플랫폼 스니커즈, 네온 컬러와 컴퓨터 와이어를 본뜬 디테일의 레트로 무드. 과감한 볼륨감과 키치하면서도 퓨처리스틱한 디테일, 메탈릭하거나 반투명한 재질. 언뜻 대비되는 레트로와 미래지향적인 요소를 절묘하게 혼합하며 현실에서는 쉽게 구현하지 못할 디테일을 아낌없이 쏟아 넣은 HAPPY99의 신발은 금세 눈길을 끌었다. 스타일리스트로부터는 협찬 문의가, SNS 팔로워로부터는 구매 문의가 쏟아져 들어왔다. 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두 사람은 “어떤 팔로워는 HAPPY99의 신발을 실제로 소유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화를 내기도 했다”라고 밝혔다. 뒤이어 응우옌은 “사람이 소비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실제로 소유하는 것이 얼마나 관습화되어 있는지”를 고민하게 됐다고 전했다. HAPPY99가 두 사람의 ‘프로젝트’가 아닌 ‘브랜드’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패션 이단아로 거듭난 Happy99

위 고민에 대한 둘의 대답은 2020년 공개된 SS 런웨이 영상으로 대체할 수 있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3D로 렌더링 된 쇼 말이다. 응우옌과 로페즈는 3D 여성 모델이 늘 과하게 성적인 함의를 내포하는 이미지로 묘사되는 것에 불편함을 느껴, 이에 반기를 들고자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SNS 팔로워가 많은 본인의 친구를 실제로 섭외해 모델로 삼았다. 런웨이 장소 또한 반짝반짝하고 세련된 어느 궁전이나 공연장, 미술관이 아니었다. 뉴욕의 차이나타운을 그대로 옮겨놨다. 바닥에 고인 정체 모를 물이나 길가에 굴러다니는 쓰레기까지,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줬다. 그들은 버츄얼 세상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과 공간을 그 누구보다 충실하게 재현했다. 

그렇다고 HAPPY99가 실제 존재하는 상품에 적대적인 태도를 갖고 있냐고 묻는다면, 이에 대한 대답은 당연히 ‘아니다’. 실제로 2021년부터 몇몇 의류와 대표 캐릭터를 사용한 굿즈 역시 꾸준히 선보이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제품을 판매하는 과정은 여타의 브랜드와 확연히 다르다. 비싼 돈을 주고 이상화된 체형의 모델을 카메라 앞에 전시하는 방식이 아닌, ’굳이’ 아주 작은 사이즈를 만들어 인형에게 입힌 사진으로 캠페인을 전개하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지 않을까. 2023년, HAPPY99는 리복(Reebok)과 협업하여 스니커 한족을 두 가지 컬러웨이로 발매했다. 이때 역시 실제 모델이 이미지에 등장하지 않았다. 실제 뉴욕의 사진 위에, 각각의 스니커를 신은 두 인형의 이미지를 메인 비주얼로 공개한 것이다. HAPPY99가 그들의 기조를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는 것을 확인시켜 준 순간이었다.

HAPPY99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이미지 중엔 그들의 마스코트 캐릭터를 빼놓을 수 없다. 이름이나 탄생 배경 등 캐릭터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90-00년대의 게임 및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듯. 얼굴 양옆의 눈에 띄게 큰 귀, 배의 동그란 시계, 몸의 비율에 비해 큰 머리와 발은 넥슨 사의 크레이지 아케이드 게임 캐릭터 다오를, 더 나아가 9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구슬동자’를 연상케 한다. 더욱이 캐릭터는 늘 볼드한 스니커와 펑퍼짐한 배기핏의 바지, 이에 비해 딱 맞는 상의 패션을 선보이며 HAPPY99가 추구하는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일까, 해당 캐릭터는 HAPPY99가 만들어내는 의류에도 종종 등장하는 중. 그중에서도 특히 캐릭터 귀마개는 키치한 HAPPY99의 무드를 보여주는 아이코닉한 제품. 캐릭터는 제품 자체가 아니라 모델로서도 활약하는데, 특히 그들이 착용한 스니커는 실제 슬리퍼 제품으로 제작됐다. 뾰족한 스파이크나 채도가 높은 색상의 조합, 부피감이 과한 밑창 등 일상적이지 않은 디테일이 슬리퍼의 패브릭 소재로 옮겨와, 한층 더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들이 여타의 브랜드와 다른 점은 확연하다. 2021년, 한 인터뷰에서 응우옌은 “우리의 창작 과정은 늘 캐릭터로 인해 파생된 세상에 방점이 찍혀 있다”라며 소비 지향적인 트렌드와 인플루언서 마케팅은 지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들이 만드는 실제 상품은 언제나 창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것. 오히려 HAPPY99가 제작하는 비디오, 버츄얼 아이템 등이 그들의 세계관에 한 겹의 레이어를 덧씌우며, 동시에 그들의 이야기를 더욱 섬세하게 만들어주기 위한 장치다.

실제로 HAPPY99의 공식 웹사이트에 접속하면, 초기 인터넷 세대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MySpace’를 비롯한 초기 개인 웹 페이지를 떠올리게 하는 디자인 때문이다. 제품은 또 어떻게 판매되고 있을까? 통상적으로 실제 모델이 제품을 입고 있는 사진 혹은 디테일 컷을 메인 썸네일로 사용하는 여타의 판매 플랫폼과는 달리, 360도 회전하는 3D 이미지가 우리를 맞이한다. 게임 스킨을 사는 듯한 이 구매 행위는 언뜻 2000년대 초기 인터넷 사용자들에게는 익숙지 않을 법도 하다. 하지만 과한 물질주의를 지양하고 지속 가능성을 추구하는 브랜드의 신념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진다.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패션 업계의 특성상 버츄얼 아이템에 대한 관심은 점점 늘어났으며, 앞으로 더욱 시선이 쏠릴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시에 제품을 판매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패션 브랜드의 홍수 속, HAPPY99는 어떤 방식으로 그들의 가치관을 지킬지 궁금해지는 이유다. 

다시 이 글의 맨 처음에 언급됐던 ‘Happy99’ 바이러스로 돌아가 보자. 바이러스는 윈도우의 커뮤니케이션 라이브러리를 스스로 수정하며 본인의 확산 범위를 넓힌다. 사용자가 의도치 않게 발신하는 이메일에 자동으로 바이러스가 부착되어 퍼진다. 컴퓨터를 재부팅하면 바이러스도 다시 시작한다. 응우옌과 로페즈의 HAPPY99 또한 마찬가지다. 늘 자신의 신념에 따라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그것은 널리 널리 퍼질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시작한 브랜드는 새로운 패션계의 버그로 기억될 테다.

HAPPY99 공식 웹사이트


이미지 출처 | HAPPY99

김소라
Visual.... something...☆〜(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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