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장인(Artisan)과 예술가(Artist)를 구분하기 시작한 지는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근대에 와 ‘아름다움’과 ‘예술’에 대한 담론이 순수예술을 분리해내기 시작하면서부터 기술을 가진 장인과 창작하는 예술가는 전혀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상이한 존재가 됐다. 예술가는 우리가 지금 인지하고 있듯이 ‘천재적인 창조성에 의해 자발적으로 창작하는 이’로 불리게 되었고, 우리가 흔히 부르는 ‘예술’ 또한 그 시점부터 온전히 그들만의 소유물로 넘어가 버렸다. 고대 로마ㆍ그리스에서 시작된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의 주도권이 유미주의자들에게 넘어간 것이다. 예술은 돈과 같은 세속의 유혹과 떨어져 아름다움을 위한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고. 그리고 이 패러다임은 유효해서 지금도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결국, 장인에게 남은 가치라곤 기계적인 규칙을 따라 조합하고 제작하는 따위의, 아무리 잘해봐야 예술가의 혁신을 모방하는 모사꾼 이상의 대접을 받기 어려운 것들뿐. 장인 뒤에 붙는 ‘꾼’이라는 접사에 담긴 뉘앙스에서 당신은 창의성과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가. 결국, 예술은 공예에 모든 짐을 떠넘기고 나서 홀로 고등한 존재로 승천했고, 장인은 예술에서 버림받은 듯 보였다.
그런데 생산-소비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는 이렇게 뼈만 앙상하게 남은 장인의 가치에서마저 많은 것들을 쳐내고, 고도의 효율성과 합리성을 덕지덕지 붙여 ‘예술 산업’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냈다. 이와 동시에 이 예술 산업과 대비되는 장인들의 공예품들이 명품으로 불리기 시작하면서, 장인의 공예품은 ‘너무 고고해지셔서 대중 따위는 이해할 수도 없는 예술님‘의 대안이 되기 시작했다. 소비의 시대에서 소비를 외면하는 고결한 예술은 점점 고통스럽고 시대착오적인 물건이 됐고, 사람들은 이게 도대체 뭔가 싶은 피카소의 그림보다 루이뷔통의 각진 여행 가방에 더 열광하기 시작했다. 순수 예술과 대중 예술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이른바 대중 예술의 시대가 온 것이다.
부르디외의 장 이론에 따르면, 예술의 장은 자의적으로 생산되는 순수 예술의 영역과 타의적 요소가 짙은 부르주아 예술, 그리고 산업 예술의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자 인제야 오늘의 주제가 나올 시간이다. 그렇다면 아이돌 음악은 예술인가? 그럼, 예술이지. 물론 앞 문단에서 언급한 ‘예술가’의 예술은 아니고 좀 더 광의적 의미에서 ‘대중 예술’에 포함되는 예술이라 볼 수 있을 테니. 그렇다면 이 예술의 장에서 아이돌 음악은 어떤 영역에 속해 있는가? 글쎄. 현재 국내 아이돌 음악은 부르주아와 산업 예술 어딘가에 걸쳐 있지 않을까?
기획자가 아이돌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불어넣어야 할 것은 예술이 아니라 예술을 모사하는 능력이다. 현대 산업의 핵심은 바로 ‘모사’에 있다. 어떤 대상의 특성 가운데 몇 가지 핵심을 추려 그것을 중심으로 계획적이고 합리적으로 생산한다면, 그것은 그 대상과 같은 물건이라 부를 수 있는가? 아이돌은 기존 음악가, 혹은 퍼포먼스 예술가들의 여러 레퍼런스에서 핵심적인 것만을 추려 기획해낸 산물이다. 그저 소비자를 이해시킬 수준 이상의 보컬과 이를 뒷받침하는 안무 퍼포먼스가 다양한 영상 매체를 통해 출판된 공산품, 그게 바로 우리가 ‘아이돌’이라 부르는 콘텐츠의 본질이며, 이들 보컬과 안무의 대중 예술성은 바로 레퍼런스를 매우 훌륭하게 모사함으로써 확보된다. 따라서 아이돌은 대중 예술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는 있지만, 고전적 예술의 잣대, 즉 음악적 완성도나 본질에 대한 논의에선 별 의미를 찾을 수 없고, 이와 같은 것들이 아이돌 콘텐츠 소비에 큰 역할을 차지하지도 못한다. 아이돌 그룹의 보컬들 모두가 임재범이나 이승철처럼 부를 필요도 없고, 또 아이돌이 장인의 영역에 들어선 그들처럼 노래를 부를 수도 없다. 그런데도 기획사는 대중이 대중 예술의 무엇을 보고 지갑을 여는지 누구보다 정확하게 짚고 있기에 아이돌에 대한 대중의 소비는 그 어떤 대중음악보다도 활발하다.
버거킹의 햄버거가 반드시 브루클린 조인트 버거처럼 만들어질 필요가 없는 이유는 그렇게 만들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그렇게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소비자는 아이돌에게 예술가가 가지고 있는 자질들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획자는 소비자가 아이돌에게서 실제로는 예술이 아닌 적당히 예술 연한 것들을 바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아이돌은 산업 예술이기에 레퍼런스를 지닌다. 예술을 만들어내던 두 축인 순수 예술가 혹은 장인을 모티브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먼저 장인은 어떠한가? 장인은 반복과 경험, 그리고 인고의 시간을 거쳐 완성되기에 그들이 장인이 될 때쯤엔 탱글탱글한 피부는 축축 늘어지고 모공은 HD화면 속에서 더 크게 빛나리라. 하지만 대중예술의 시대에서 진짜 ‘순수 예술가’는 멸종되었다. 따라서 몇몇 영민한 이들은 사라진 예술가의 흔적을 접목한 마케팅을 하게 되었다. 곡 쓰고 가사 쓰는 아이돌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명품의 디테일한 마감은 따라 하기 어려워도. 소위 포스트 모던하고 아방가르드한 껍데기는 따라 만들기 쉽다. 장인인 척 하기는 어려워도 예술가인 척 하기는 쉽다. 근대가 정립한 순수한 예술가는 이제 희귀 생물이며, 있다고 해도 알아볼 이들이 적지만 기능인들은 모두가 알기 쉽다. 어설픈 예술가들이 난립하고, 대중은 실망한다. 이제는 예술가 흉내보다 제대로 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장인이 대접받는 시대다.
보아는 훌륭한 아이돌이었다. 그녀는 SM이 기획한 최고의 공산품이었으며, 한국 음악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일본의 음악 콘텐츠 시장에서도 검증을 끝냈다. 한국 아이돌 대부분이 일본에 그 레퍼런스를 뒀다면, 그녀가 가진 퍼포먼서로서의 수준은 그 어떤 레퍼런스보다도 훌륭했다. 모사품이 그 원형이 된 또 다른 모사품을 압도한 것이다. 그녀는 그 어떤 남성 백댄서보다 무대 위에서 역동적이었고 동시에 녹음물 수준의 라이브를 해내는 보컬 능력을 갖췄으며, 퍼포먼서로서 무대 위에서 자의식을 놓아버리는 법마저 터득한 ‘무대 위의 장인’이었다. 아무로 나미에조차 실은, 퍼포먼서로서 보아의 상대가 아니었다. 시간은 그녀가 만들어냈던 성과물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있었고, 어느 순간 그녀는 장인의 경지에 올랐다. 칼군무와 피 터지는 고음이 아니어도 보아만이 할 수 있는 음악을-비록 기획사와의 협업이긴 하지만- 쌓아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돌 음악’이란 장르를 따로 분류한다면 그녀보다 이 장르에서 더 능숙하게 무대 위에 설 수 있는 이는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국내로 돌아와 또 한 번 새로운 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지난 5월에 발매된 보아의 앨범, [Kiss My Lips]에 수록된 미드템포 음악들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한평생을 기획된 공산품의 뛰어난 연주자로 살아왔던 그녀가 무엇을 들어왔고, 무엇을 만들어 내고 싶은가에 대한 내용이 여기 담겨 있다. 현대 산업 예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돌 출신에서 타 공산품과 자신을 차별화할 수 있는 장인의 경지로 오른 후, 급조된 변신이 아닌 일정 기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그녀는 서서히 창작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그녀의 음악이 기존 예술 연하는 여러 아이돌과 차별화되는 이유는 바로 그녀의 음악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어설픈 예술가 흉내가 아닌 보아라는 창작자의 진실한 한 단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향한 편견을 억지로 부수려는 듯 과도하게 언플러그드한 음악을 선택하거나, 트렌디한 북유럽 작곡가 스타일 음악을 카피하지 않았다. 기타나 건반을 들고 예술가 흉내를 낼 수도 있었지만, 그저 무대 위에서 이미 자기가 잘 알고 좋아하는 음악을 통해 차근차근 새로운 영역으로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거슬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들린다. 거슬리지 않는다는 말은 자연스럽다는 말과 상통한다. 이는 분명 기존의 공산품과는 완전히 다른 음악이라는 뜻이다.
공산품은 대체품이 나타나면 언제든 사라진다. 하지만 어떤 예술은 불멸한다. HOT의 음악은 이제 추억의 한 조각일 뿐이지만, 비틀스의 음악은 온전히 ‘음악’으로 다시 들어도 좋은 것처럼. 물론, ‘그녀가 창작자가 되었다’라는 명제와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있을까’의 문제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장인의 영역에 있던 이들이 좋은 창작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 그녀를 현재 완전한 예술가 혹은 창작자로 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사실, 필연적으로 현 시점에서 보아의 음악을 ‘좋은 음악’의 영역에 놓기는 어렵다. 트랙 구성은 좋게 말하면 일관성이 있고 나쁘게 말하면 ‘그게 그거’같이 들릴 여지가 있다. 달리 말해 아직 걸음마 단계의 그녀가 창조할 수 있는 음악적 색채는 한계가 있으며, 다층 위에서 즐길 여지도 적다는 것. 이런 그녀를 변호하는 건 퍼포먼서로서 쌓아놨던 팬덤과 대중들의 긍정적인 인지뿐이다.-이 또한 그녀가 시행착오를 거듭한다면 금방 산산 조각날 것이다-그녀는 한 번에 패러다임을 바꾸는 종류의 창작자가 아니고 그렇게 될 수도 없기에 앞으로도 긴 시간 동안 서서히 자신의 음악을 쌓아가야 한다. 그 시간은 퍼포먼서로서 그러했던 시간보다 더 오래 걸릴 것이다.
보아 – “Sweet Impact” (2008 The Face Live Tour)
중요한 점은 가능성을 열었다는 것. 그녀의 행보는 지드래곤이 작곡ㆍ작사에 참여했다는 언론 기사와는 그 무게가 다르다. 대중음악의 주류가 아이돌 음악인 이 시대에서, 앞으로 많은 이들이 그녀의 행보를 따라갈 것이다. 루이 암스트롱이나 빅터 우튼이 예술가로 불리는 시대에 살고 있고, 무라카미 다카시가 루이뷔통과 협업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아이돌이 장인의 한계를 넘어 자기본위적인 콘텐츠를 생산하는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실제로 해본 적이 없다. 그녀는 비록 예술적 ‘천재’라 불리는 인간의 유형도 아니었고, 아이돌 퍼포먼스에서 장인의 경지에 올라 어설픈 창작자 흉내 없이도 대중 예술가로서 존경을 받으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내 음악을 하고 싶다는 의지는 그녀를 완전히 다른 세계로 나가게 하고 있다. 추억 속의 공산품으로 남기를 거부하고, 대중 예술의 장 속에서 불멸하는 다른 선대 예술가들의 길을 걸어가려는 것이다.
나는 언젠가 보아를 마이클 잭슨에 비유한 적이 있다. 그것은 물론 퍼포먼서로서의 완성도를 칭찬하기 위해 붙인 상용구에 지나지 않았다. 근데 거짓말처럼, 그녀는 진짜로 한국의 마이클 잭슨이 되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