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기술의 흔적, 즉 기교가 눈에 띈다면 그 작품은 좋은 예술이라 부르기 힘들다. 발성, 호흡, 톤, 음정 등의 요소가 안정된 보컬은 ‘잘’하는 보컬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좋은 보컬이라고 할 수 없다. 좋은 예술 혹은 음악은 언제나 기술 너머에 있는 것들을 보여줘야 하고, 그 너머에 있는 걸 우리는 콘텐츠(Content)라 부른다. 모든 예술은 콘텐츠와 미디어로 나뉘고, 좋은 예술은 언제나 콘텐츠에 집중한다. 콘텐츠는 오리지널리티에 관한 것이고 미디어는 그 콘텐츠-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기교에 관한 것이다. 예술가는 기교적 요소를 모두 초월한 상태에서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혹은 콘텐츠라 불리는 것들을 편안하게 전달하는 이를 일컫는다.
근래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래퍼, 비와이(BewhY)는 기교가 안정된 대표적인 퍼포먼서다. 이 수준에 도달한 퍼포먼서들은 안정적인 발성을 가지고 있어서 타이트한 라임 구간이더라도 일반적인 청자들이 편하게 들을 수 있도록 전달한다. 그렇지만 딱 거기까지. 이 정도 수준의 창작물을 내는 이들이야말로 비즈니스맨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유형의 창작자들이다. 스스로 무엇을 담아야 할지 잘 모르기에 별 콘텐츠는 없지만, 그 콘텐츠를 전달하는 미디어의 날만큼은 날카롭게 살아있는 창작자, 즉 퍼포먼서. 중요한 건 대한민국 음악계에선 그 미디어만 가지고도 기꺼이 대중의 지갑을 열게 한다는 점이다.
사실 미디어에 대한 집착은 주변만 봐도 알 수 있다. 노래방에서 “She’s Gone”을 원 키로 부를 수 있는가, 아웃사이더의 “외톨이”를 절지 않고 부를 수 있는가로 누가 더 노래를 잘하는지 판가름하는 사회적 관습이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하지 않은가. 누구의 미디어가 더 수준 높은가, 즉 어떤 기교를 사용할 수 있는가에 따라 예술작품의 수준을 결정하는 맥락 속에서 매스미디어는 ‘슈퍼스타 K’, ‘케이팝 스타’, ‘쇼미더머니’ 등의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미디어를 가진 이들을 더욱 노골적으로 경쟁시키고, 그 과실을 획득하고 있다. 누구의 미디어가 더 훌륭한지 계속해서 경쟁을 부추기며 그 승자를 제도권으로 수급하는 시스템이 마련되었고, 매스미디어가 선택한 미디어들이 이 땅의 음악계를 좌지우지하는 지금 이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창작물, 그리고 창작자의 콘텐츠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필연적으로 뒷전일 수밖에 없다. 매스미디어에 픽업된 이들은 단물이 빨리는 순간 버려진다. 미디어만 있고, 콘텐츠가 없는 기능인의 말로란 뻔한 것이다.
시스템이 선택한 이들의 콘텐츠는 대부분 얄팍하다. 이들은 자신의 콘텐츠가 숙성할 시간을 가지기도 전에 스포트라이트를 먼저 받는다. 그리고 제대로 숙성되지도 않은 콘텐츠를 먼저 시장에 내어놓는다. 매스미디어는 어리고 기교를 지닌 이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고, 그들은 어느 시점이 되면 별 볼 일 없는 혹은 재능을 완전히 꽃피우지 못한 미완의 창작자로 남게 된다. 미디어와 콘텐츠는 상술했듯,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며 매스미디어는 언제나 미디어를 새로 갈아치울 준비가 되어 있다.
냉정하게 말해서 비와이의 콘텐츠, 즉 가사의 수준은 아직 인간 내면의 밑바닥에도 도달하지 못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그곳을 경험한 이라면 신을 찬미한다거나 당신도 할 수 있다는 말을 절대 그렇게 함부로 꺼내지 않으니까. 자신의 내면을 바라본 인간들은 하나같이 ‘The human parts’를 이야기한다. 따라서 비와이는 기술은 있으나 그 이상의 논의를 이어가기엔 무리인 래퍼다. 그가 추후 디스코그래피를 쌓아서 좋은 음악을 하게 될 가능성은 열어둘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다.
이센스(E Sens)가 최근 출소했다. 그는 좋은 음악을 하는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다. 누가 뭐라고 하든 간에 이센스의 압도적인 보컬은 그 배경에 오케스트라, 밴드 세션, 4마디 루프 샘플링 음악 등 어떤 것들이 와도 아무 상관이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는 편곡의 한 부품으로 자신의 보컬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보컬을 먼저 깔고 그 뒤에 편곡을 생각할 수 있는 래퍼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20년 지기 불알친구한테 소주 한잔 하고 이야기하듯 담담하게 말하면서 현대의 래퍼가 사용하는 기교 대부분을 자유자재로 사용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cr6UNeRuU3w
E Sens – 비행
E Sens – Sleep Tight
E Sens – Back in Time
이센스는 내면 밑바닥의 심연을 들여다본 인간이다. 그런 다음 자의식을 뒤로하고, 마치 관찰자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 그건 대부분 불안에 관한 것이다. 스웨거들이 존나 잘나가는 빅샷(Big Shot)을 하나 상정해놓고 자아를 투영하거나 신 혹은 어떤 절대자에 의탁해서 존재자로서의 불안을 거짓으로 해소하려 하는 데 반해 이센스는 불안을 있는 그대로 응시한다. 그리고 자신이 느낀 절절한 감정을 무던히 써내려간다.
외부에서 자신을 무어라 규정하든 간에 그는 이제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구도에 들어선다는 건 그런 거니까. 자신 역시 두렵고, 힘들고, 무섭고, 불안했으나 그래도 그 앞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기에 이제는 그래도 그게 어디에서 왔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은 경지. 창작을 통해, 내가 만든 괴물을 통해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열쇠 구멍처럼 작은 틈새로 엿보는 것. 불안을 응시할 수 있다는 건 -비록 가능성일 뿐이지만- 자기 존재를 직시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자기 존재 앞에서 똑바로 서 있는 인간에게 두려운 건 없다. 그 지점에서야 비로소 감히 콘텐츠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센스는 이제 보컬로서도 작사가로서도 적어도 국내에서는 비교 대상이 없는 경지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