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방유람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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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친구들과 재미 삼아 종로 어느 한 다방에 들어간 적이 있다. 머리 희끗희끗한 노인들이 모든 소파를 차지한 곳. 오래된 테이블과 푹신한 소파가 즐겨가던 프랜차이즈 커피숍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그곳은 묘한 향으로 가득했다. 커피 종류는 단 두 가지, 커피와 냉커피다. 설탕과 프림의 평소 취향을 주인에게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 이곳에는 혼자 노트북을 두들기는 사람도, 책을 읽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편한 자세로 대화를 나눌 뿐. 계산대에 선 아주머니는 이런 가게에 카드기 같은 게 있겠냐며 모자란 현금 대신 또 놀러 오라는 말을 남겼다. 눈 오던 그 날의 다방 정경을 우연찮은 기회로 다시 떠올린 건 약 열 달이 지난 지금에 와서다.

다방은 지금 청년세대에게도 매력적인 공간일까. 값비싼 커피 머신에서 질 좋은 원두를 갈아 만드는 세련된 카페만 해도 서울 바닥에 널렸는데, 다방이 웬 말인가. 허름한 골목에 드문드문 남아 있는 다방은 이제 연탄이나 주판 같은 신세가 아닐는지. 군 시절, 외박 나왔을 때 선임들이 다방에서 티켓을 끊고 놀자고 유혹하던 기억이 난다. 티켓이라는 말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우연히 들른 그 다방도 예전에는 다방 아가씨들이 커피를 타주던 곳이었을까? 다방 문화를 경험한 적 없는 세대니 어처구니없는 궁금증들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인터넷에서 무작정 검색해보니 죄다 ‘빽다방’이다. 무수한 파워 블로그를 걷어내며 찾은 다방 몇 개, 여기저기 물어가며 얻은 정보를 모아 한 여덟 개 정도의 다방을 골라냈다. 기준은 하나. 옛 정취를 흉내 내지 않은 곳, 즉 오래전부터 그 장소에 자리하던 곳이어야 했다. 이제 발걸음을 옮길 일만 남았다. 다방은 지금 서울 골목마다 자리한 카페를 대신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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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 마시러 갈 뿐인데, 묘하게 긴장된다. 낯선 세계로의 출입. 그것은 커피 한 잔이 아니라 삶에서 한사코 거부해오던 아버지 세대를 이해하기 위한 뜻밖의 시도이기도 했다. 우선 을지로에 있는 한 다방을 방문했다. 안 그래도 요새 ‘을지유람’이라고, 서울시 중구청이 진행하는 프로그램 덕에 젊은이들도 많이 찾는 곳이란다. 30년 넘게 운영한 주인은 단골이 워낙 많은 데다가 육사 6기니 서울 대학교수니 하는 분들도 즐겨 찾는다며 한껏 자부심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단골로 보이는 어르신들 테이블에 앉아서 대화에 장단을 맞췄다. 지금 가장 큰 화두인 최순실 박근혜 국정 농단에 관한 이야기였다. “최순실이 X년이긴 한데, 박근혜는 그래도 불쌍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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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방을 대표하는 음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니다. 매체에서 줄기차게 등장하는 그 이름 쌍화차. 계란을 띄울지 말지 잠시 고민했지만, 뜨내기처럼 보이기는 싫으니 결국, 계란동동을 주문했다. 쌍화탕과 비슷한 맛일까. 차를 주문하자 곧 주방 주전자가 팔팔 끓었다. 꽃이 정갈하게 수 놓인 찻잔과 정성스레 담긴 차. 달착지근한 게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디저트라 할 만한 먹거리가 없던 시절, 여름은 팥빙수, 겨울에는 쌍화차가 그들의 텁텁한 입을 달래지 않았을까. 다시 동그란 계란을 숟가락으로 떠먹을지, 휘저어서 먹을지 고민하던 찰나, 어리숙한 내 모습을 지켜보던 주인이 명쾌한 답을 내려주었다. “그거 그냥 아무렇게나 먹는 거야”. 비릿한 맛을 상상했는데, 뜻밖에도 궁합이 좋았다. 팥, 견과류, 계란이 어울려서 맛이 담백해지는 게 마치 카스텔라를 우유에 적셔 먹는 기분이다.

다방은 담배와 떼어놓기 힘들다. 정부가 실시한 전면 흡연 금지구역 확대 정책에 따라 다방의 수입도 예전만큼 만족스럽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다방의 단골층인 연세 지긋한 노인들은 담배를 거의 피우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중년층, 젊은 직장인들이 재떨이를 찾는다고. 삶의 애착일까. 일정한 성취를 이룬 노인들은 손주 얼굴이 아쉬워서라도 담배를 끊는단다. 오랜 친구로 보이는 그들의 대화 장면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었지만, 사진은 끝내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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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내려앉는 11월의 밤, 다방에는 아무도 없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이곳엔 금세 쓸쓸함이 자리했다. 친절히 다방을 소개하던, 다방 소파만큼이나 아늑한 블로그 글도 시간대를 퍽 잘 만난 것인가 싶다. 그렇다. 늦은 시간 방문한 다방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다. 문을 열자 다방 주인은 내가 여길 올 사람이 아니라는 듯, 빤히 쳐다보았다. 잠시 정적이 지나고, 경계심을 덜어낸 주인은 다행히도 나를 손주처럼 반겼다. 그녀는 젊은 여자가 일해야 장사가 잘되는데, 요새는 다방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통 없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노래방이 생긴 뒤로는 다방에서 일할 만한 여성들이 모두 노래방에 간다고 했다. 아마도 도우미를 말하는 것 같았다. 입구에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여기 예쁜이 있으니 놀러 오세요”라는 문구가 붙어있던 것 같다.

주인은 자기도 나와 같은 시절이 있었을까, 하고 되뇌며 지금 나로서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가구는 낡았고, 다방 구석구석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벽 곳곳에 붙은 핀업걸 사진이 추레한 다방과 오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그 다방은 예전에는 퍽 화려했으나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는, 수십 년 전 유행하던 옷을 입고 과거의 로맨스를 노래하는 한물간 가수 같았다. 그녀는 예쁜 여성을 동경했다. 동경이라기보다는 지나간 젊음을 계속 갈망하는 듯했다. 잡지에 등장하는 모델 사진을 오려서 다방 벽에 붙이기 시작한 건 아마도 자신이 더는 젊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한 바로 그때부터일 터다. 벽에는 수십 년 전 미모를 뽐내던 다방 주인의 사진도 보였다.

 

 

퉁명스러운 다방 주인도 만났다. 그녀는 마지못해 다방을 운영하는 것 같았다. 그곳에 있자니 동네 상인들의 사랑방이라는 말도 다방 나름이었다. 단골은 무슨, 교포부터 잡상인, 회사원, 사업 말아먹은 놈, 억척스러운 노인네까지 온갖 부류의 손님이 다 온단다. 무표정으로 나물을 다듬던 주인은 지겹다는 말을 반복했다. 세상사는 일, 이제 다 웬만큼 겪어봐서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는 표정으로. 방문하는 손님도 주인과 닮아서인지, 권태로워 보였다.

지금의 다방은 이제 제법 삶의 굴곡을 맛본 세대가 찾는 곳이다. 그곳에는 추억을 불러내어 어린아이처럼 떠드는 노인들이 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커피를 들이켜는 생에 지친 중년도 있다.

다방유람 -下-

사진 ㅣ 권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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