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이 단 한 벌의 의상을 입는다’는 것은 다양한 영화적 설정을 가능케 한다. 우선 등장인물이 다양한 의상을 입지 않는다면, 영화는 하루 안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을 때가 많다. 보통 극 중 시간의 경과를 나타낼 때 등장인물의 의상에 변화를 주기 때문이다. 주요 캐릭터의 직업도 고려해봐야 할 요소이다. 이를테면 은행원, 승무원, 호텔리어와 같은 직업을 가진 캐릭터는 영화에서 유니폼을 입고 노출되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등장인물이 유니폼을 입어야 한다면 역시 의상은 한정적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하루 안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면, 또는 캐릭터 의상이 단순히 직업적 특성의 의미가 아니라면? 우리는 좀 더 풍성한 관점에서 의상과 영화의 상관관계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필름 드 모드(Film De Mode) 4화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다양한 의상이 주는 시각적 즐거움에서 벗어나 단 하나의 의상이 영화에 스며드는 방법이다.
갑옷과 투구가 된 점프슈트.
-영화 “쓰리 빌보드(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2017)”
영화 “쓰리 빌보드(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2017)”의 주인공 밀드레드는 딸을 잃은 엄마다. 딸이 강간범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고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이제는 아무도 이 사건에 관심이 없는 듯하며 수사는 종결될 위기다. 밀드레드는 수사를 촉구하는 의미로 마을 외곽 대형 광고판 3개에 도발적인 3줄의 메시지를 올린다. 그중 하나의 광고판에는 경찰 서장의 이름을 명시하는 대담함까지 보이면서 말이다.
한 편, 그녀는 언제나 같은 점프슈트를 입는다. 광고판을 빌리러 갈 때, 본인이 지명한 경찰서장과 대면하러 갈 때, 자신을 위협하는 치과의사의 손톱에 구멍을 낼 때도 여전히 그 옷이다. 분노로 가득 찬 밀드레드가 격전지로 향하는 전사라고 한다면, 그녀의 물 빠진 점프슈트와 반다나는 갑옷이자 투구다.
밀드레드의 퀭한 눈, 시니컬한 표정, 거칠고 폭력적인 언행 또한 기존 할리우드 영화 속 여성 주인공에게 쉽게 허락되지 않은 캐릭터였다. 캐릭터의 의외성만큼이나 이 영화의 신선한 점은 단순 복수극이 아니라는 것이다. 밀드레드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딕슨이란 캐릭터와 상충한다. 경찰서장 윌러비의 죽음과 불타오르던 빌보드, 경찰서에 번진 화염과 같은 시각적 자극은 극 중 밀드레드와 딕슨에게 내적 자극으로 작용하며 각자의 방법으로 깨달음을 얻어나가는 데 일조한다.
영화 “쓰리 빌보드”는 ‘분노는 더 큰 분노를 일으킨다’라는 단순명료한 명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밀드레드와 딕슨의 동행은 더 확장된 층위에서 볼 때 인간 근본에 대한 이야기라고 느껴진다. 딸을 잃은 엄마 밀드레드와 아버지 같던 윌러비를 잃은 딕슨이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남겨진 사람들의 연대를 그리는 것. 밀드레드와 딕슨은 범인으로 착각했던 그 남자를 찾으려 함께 떠난다. 밀드레드는 여전히 낡고 해진 점프슈트를 입고 있다.
서로 다른 목적의 무장.
-영화 시카리오: 암살자들의 도시(Sicario, 2015)
“시카리오: 암살자들의 도시(Sicario, 2015)”는 지상 최악의 마약조직 카르텔을 소탕하기 위해 투입된 세 명, FBI 요원 케이트와 CIA 소속 맷 그리고 정체불명의 컨설턴트 알레한드로가 서로 다른 목표를 향해가는 영화다. 미국과 멕시코의 접경 도시인 ‘후아레스(Juárez)’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법도 원칙도 없는 지옥 같은 도시의 참혹한 일상을 담아낸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에서 펼쳐지는 사건과 이야기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등장인물의 의상은 ‘완전 무장’이다. 그러나 동일한 무장을 하고 하나의 목표를 따라간 케이트와 맷, 안레한드로 이 세 사람의 사고와 목적이 달랐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영화는 더욱 극적으로 치닫는다.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도 용인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영화는 중심에 놓는다. 개인적 복수를 위해 법의 테두리를 넘나드는 알레한드로와 악을 제압을 위해 그의 행동을 묵인하는 맷, 그리고 무너져가는 선악의 경계에서 허우적대는 케이트를 통해 우리는 윤리적 딜레마를 함께 떠안는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무장을 할 것인가?
‘상처받는 만큼 성장한다’의 어폐.
-영화 “파수꾼(Bleak Night, 2010)”
백과사전은, ‘교복은 학생의 공식적인 의복으로 신분과 소속감, 유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이 된다’고 명시했다. 또한, 교복은 단체생활을 원활히 하고 학생에게 면학의식을 지니도록 의도적으로 제작한 의복이라고 한다. 영화 “파수꾼(Bleak Night, 2010)”은 ‘교복’을 입는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통해 그 연약한 집단에서의 단체생활과 소속감이 야기할 파국의 형태에 다가간다.
‘교복’은 ‘학생’이란 신분을 드러낸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미성숙함을 당연한 듯 인정하고 포용하지만, 정작 그 주체인 학생은 10대란 모두가 상처받을 수 있는 불완전한 시기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현재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이 가장 강력하고 충격적인 세계일 뿐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초점이 흐릿한 학생 무리를 비추며 시작되고, 초점이 맞을 무렵 장면이 전환된다. 그들의 형상을 정확하게 알아차릴 수 없다. 누가 누군지 모르겠고, 이 아이들이 어딜 향해 가는지 알 수 없다. 파수꾼은 초점이 흐릿한 파편화된 사건 내 퍼즐을 맞춰가며 전체의 그림을 완성한다. 어디서부터 그 전조가 시작되는지 알 수 없지만, 어느 순간 파국을 마주한다.
‘죽음’에 관련한 다수의 영화가 그렇듯, 파수꾼 역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조를 띤다. 영화 속 주인공 남학생 3명의 아지트인 ‘기찻길’. 기찻길은 출발과 도착이 있고 누군가 떠나기도, 돌아오기도 하는 공간이지만 이들에게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정서적 공간이다. 영화의 플래시백은 아이들 중 ‘동윤’이란 캐릭터에 집중돼있다. 동윤은 몇십 년이 지난 후에도 죄의식을 가져갈 수밖에 없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나 파수꾼 속 진정으로 죄의식 혹은 상처에서 자유로운 인물은 없다. 모두가 소외되어있고, 지켜낸 사람도 없다. 우리가 “파수꾼”을 대해야 하는 자세는 서툴고 미숙했던 사람에 대한 애정과 연민 정도면 충분하다. 영화는 내내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는 이분법적 시선이 얼마나 얄팍한 행위인지를 전면에서 드러내기 때문이다. 파수꾼은 상처받은 만큼 성장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상처받은 만큼 흔적이 남는다고 역설한다.
같은 수도복 다른 가치관.
-영화 “다우트(Doubt, 2008)”
영화 “다우트(Doubt, 2008)”는 1964년 브롱크스의 성 니콜라스 교구 학교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알로이시스 교장 수녀, 플린 신부, 제임스 수녀 이 세 사람이 영화의 주축을 이룬다. 신부나 수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 남은 생을 바친다는 의미로, 그들이 입는 수녀복과 신부복은 그 자체로서 그들이 택한 삶에 경건함을 부여한다. 더 나아가 이들에게 수도복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란 통일성을 준다. 그러나 같은 종교 아래 같은 수도복을 입고 생활하는 이들에게도 균열이 일어나는데 그 뿌리는 영화 제목 그대로 의심에서 발생한다.
먼저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짚고 넘어가보자. 1964년은 종교 집단의 제도와 위계질서 내부에 존재한 견고한 진리를 벗어 던지게 된 중요한 시기였다. 많은 종교인이 기존의 조직 구조에 의문을 품은 시기였는데, 영화는 플린 신부가 그 대표적 인물로 묘사한다. 이와 대립하는 인물이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알로이시스 교장 수녀다.
언제나 엄격함을 유지하고 규칙과 규율을 준수하며 금욕적인 생활에서 벗어나지 않는 알로이시스. 영화 오프닝 시퀀스에서 그녀의 첫 등장을 떠올려보자. 설교 중 떠들거나 자는 아이들을 잡아내는 몸짓은 전형적인 수녀상의 모습으로 관객에게 각인된다. 그리고 플린 신부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 역할의 제임스 수녀. 그녀로 인해 알로이시스 수녀는 플린 신부를 집단에서 내쫓을 계획을 세운다. 이 과정에서 플린 신부를 향한 알로이시스의 의심은 확신으로 바뀐다. 단, 뚜렷한 물증 없이 말이다.
보수와 진보, 수녀와 신부, 금욕과 욕망 등 알로이시스 수녀와 플린 신부에게서 발견되는 극도의 이분법적 설정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판단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다. 우리 사회에서 불확실성은 거대한 공포로 다가온다. 우리는 ‘확신’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마음 한구석엔 언제나 의구심이 자리하고 있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 ‘내가 판단할 자격이 있나?’, 영화는 ‘불확실성’ 즉, ‘의심’을 관객에게 기꺼이 권하며 자문하고 답하길 원한다.
영화 내 캐릭터가 단 한 벌의 의상을 입는다는 게 영화 전체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 살펴보았다. 캐릭터의 의상은 영화 그 자체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쓰일 수도 있고, 캐릭터의 신분을 드러내기도 하며, 캐릭터의 내적 갈등을 드러내기도 한다. 등장인물이 여러 명일 경우에는 같은 옷을 입었음에도 다른 가치관, 다른 목적을 지닌 캐릭터를 통해 영화는 생명력을 부여받기도 했다. 끈질기게 고집하는 하나의 의상이 캐릭터가 지닌 의지를 투영하기도 했고, 종교라는 거대한 집단 또는 10대 시절이라는 제약과 만나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옷 그 이상의 영화적 의미를 더한다. 때때로 의상의 단순함은 영화적인 다양성으로 치환돼 큰 울림을 준다.
글 │ 최세담
커버 이미지 │ 박진우
제작 │ VISLA, MUSIN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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