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0주년을 맞이한 전주국제영화제는 상반기에 열리는 한국의 대표적인 국제영화제 중 하나다. 2017년 당시 방문했을 때는 20년 만에 돌아온 “트레인스포팅 2 ((T2: Trainspotting)“를 오직 전주국제영화제에서만 상영한다는 소식을 숙취가 있는 상태로 접했다. 그 뒤로 한국에서는 정식 상영하지 않았고 IPTV로만 볼 수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트레인스포팅 2″를 보기 위해 전주로 내려갔던 건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반드시 영화제를 가야 만날 수 있는 경험이 있다. 위에서 말했듯 극장에서 상영하지 않는 작품을 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다거나 정식 개봉을 앞둔 영화를 누구보다 먼저 빨리 볼 수 있다는 장점이 마니아의 발걸음을 영화제로 옮긴다. 개인적으로 영화제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숨겨진 보물 같은 영화를 상영관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제가 열리는 도시에서 찾아가는 로컬 식당 투어도 빼놓을 수 없다.
영화 상영 후 한국까지 찾아온 해외 감독이나 유명 배우들을 눈앞에서 마주하는 것은 물론, 영화에 관한 질의응답에 참여할 수도 있다. 주구장창 영화만 상영하는 것도 아니다. 특별 공연과 전시, 파티와 같은 다양한 이벤트 역시 준비되어 있다. 비록 레드 카펫은 밟기 힘들더라도.
전주국제영화제는 매년 독특한 작품을 선정해서 상영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스타워즈 아카이브 특별전, 박찬욱, 아녜스 바르다를 비롯한 거장들의 영화, 100년 동안의 한국영화 등 다양한 섹션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중 인상적이었던 작품 세 편을 골라보았다.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
스케이트보드를 사랑하는 소년의 성장을 다룬 영화 “미드90s(Mid 90s)”
1990년대 미국 LA, 13살의 주인공 소년 스티비(a.k.a 써니)는 친형 이안의 방에 몰래 들어가 그가 듣는 힙합 CD를 자신의 노트에 받아적다가 들켜서 두들겨 맞는 일상을 보낸다. 체구도 작고 의기소침해 보이지만 스티비에게 자신을 가장 뜨겁게 만드는 것은 스케이트보드다. 로컬 스케이트 숍에 항상 모여있는 레이(Ray), 퍽싯(fuckshit), 루벤(Luben), 4학년(Fourth Grade)은 보드를 타고 담배를 피우거나 파티에 다니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스티비는 우연히 이 패거리와 친해졌고 자신을 받아주는 이들과 함께 어울리며 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나쁜 짓도 하지만, 이와 함께 조금씩 스케이트보드 실력과 함께 인격적으로도 성장해나간다.
영화는 단순히 한 소년의 성장기를 다루고 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영화를 이루는 다양한 요소 때문인데, 먼저 미국 LA의 다양한 문화, 90년대를 나타내는 아이템, 음악 그리고 스케이트보드가 영화 곳곳을 채운다. 먼저 90년대를 살펴볼 수 있는 아이템은 슈퍼 패미콤(Super Famicom)이나 스트리트 파이터 2(Street Fighters 2)를 비롯해 90년대에 활동했던 뮤지션의 CD와 카세트테이프 등이 있다. 영화에 흐르는 음악을 들어보면 너바나(Nirvana), 미스핏츠(Misfits), 배드 브레인스(Bad Brains)와 같은 밴드 음악이나 사이프레스 힐(Cypress Hill), 빅 엘(BIG L), 델(Del), 파사이드(The Pharcyde), ATCQ(A Tribe Called Quest) 등 90년대 올드스쿨 힙합을 느낄 수 있는 곡이 가득하다.
또 관심을 끄는 것은 스케이트보드 아이템이다. es, 걸(Girl), 초콜렛(Chocolate skateboard), 인디펜던트(Independent)와 ORBS 등 스케이트보드 브랜드의 제품이 영화에 등장하고 보더를 촬영한 스케이트 비디오는 여전히 친숙한 느낌이다. 아무래도 배우들이 실제 보더이기에 만약 스케이터라면 그들의 굿즈나 구사하는 트릭 등에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철조망을 넘어 보드 타기 좋은 건물 공터에 들어가 담배를 피우던 패거리에게 경비원이 다가와 말다툼하는 신이다. 흡연을 저지하는 경비원에게 예수도 담배를 피운다고 하는 패거리, 그럼 무슨 담배를 피우냐고 묻던 경비원에게 ‘멘솔’이라고 대답하는 장면은 온갖 욕설과 함께 혼합되어 영화에서 가장 코믹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주제가 한 소년의 성장이듯, 기존 많은 청춘 영화를 답습한 것 같은 기시감 또한 느꼈다. 자비에 돌란(Xavie Dolan) 감독이 제작한 “마미(Mommy)”는 1:1 화면 비율로 인물의 감정을 돋보이게 한 촬영기법으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미드 90s”에서도 역시 인물을 화면의 가운데에 배치시키고 4:3의 좁은 비율을 사용했다는 점 그리고 영화 “신비한 동물사전”의 히로인이자 극에서 스티비의 엄마로 출연한 캐서린 워터스턴(Katherine Waterston)에게 스티비가 중2병을 폭발시키는 모습은 영화 “마미”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가장 유사하다고 느낀 작품은 80년대 영국의 스킨헤드를 다룬 셰인 메도우스(Shane Meadows) 영화 “디스 이즈 잉글랜드(This Is England)“다.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 숀도 외톨이 소년이며 스킨헤드 패거리를 만나 함께 어울리며 온갖 못된 짓을 하고 다닌다. 그리고 하우스 파티에서 자신보다 나이 많은 여성과 첫 경험을 하는 장면이나 엄마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장면까지 매우 비슷한 전개 과정을 보여준다. 물론 영화는 조금 더 유쾌하고 배경도 다르지만, 비슷한 부류의 작품을 오마주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짧은 런닝 타임으로 전개 과정이 조금은 엉성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주인공의 성장과 사건의 갈등이 해소되는 구성은 비교적 담백하다. 영화의 각본과 감독은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THE WOLF OF WALL STREET)”, “슈퍼배드(Super Bad)”, “40살까지 못해본 남자(The 40 year Old Virgin)” 등에 출연한 배우 조나 힐(Jonah HILL)이 맡았고 그의 첫 장편 감독 데뷔작이기도 하다. 영화에 흐르는 음악은 그가 실제 유년 시절에 열광하던 힙합 뮤지션의 음악을 사용했다. 영화는 토론토 필름 페스티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고 로튼 토마토 지수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한국에서는 올해 7월 개봉을 앞두고 있으며 영화 “데드풀(DEADPOOL)”의 황석희 번역가가 번역을 맡았으니 욕설의 뉘앙스만큼은 확실히 전달될 것이다. 90년대의 향수를 지닌 이들이나 스케이트보드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보더들에게는 충분히 볼만한 작품이지 않을까.
강남 자본주의의 민낯 그리고 느낌 있는 배우 하정우가 선보이는 최고의 연기 “비스티 보이즈(The Moonlight Of Seoul)”
호스트 3개월 차의 승우(윤계상)는 호스트 바의 에이스다. 매일 밤 테이블을 돌며 여성 고객을 접대하는 일상을 살아간다. 호스트바 마담 재현(하정우)은 매일 사장 창우(마동석)을 피해 다니며 돈을 갚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어느 날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지원(윤진서)과 그 친구들이 가게에 방문하고, 승우는 지원의 취한 친구와 다투며 인연이 시작된다. 우연히 헬스장에서 만난 승우와 지연은 연인 사이로 발전하지만, ‘텐프로’ 업소에 나가는 지원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승우는 지원에게 가게에 갚아야 할 선불금 ━ 마이킹 ━ 을 대신 내주며 일을 관두게 한다. 그러나 자신을 상대로 공사친 것이 아닌지, 혹여나 바람을 피우는 건 아닌지 불안해하며 그 의심과 갈등이 나날이 깊어져만 간다. 한편 다른 여자를 꾀어 대신 창우의 돈을 갚으려던 재현의 작전이 실패하며 여자친구이자 승우의 누나인 한별(이승민)이 대신 돈을 갚게 된다.
가끔 영화 채널에서 하정우 특별전으로 방영되는 영화는 대부분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가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하정우 최고의 연기는 지금 소개할 영화 비스티 보이즈가 아닐까. 단순히 많은 사람이 기억하는 “사랑한다고 XXX아”가 인상적인 대사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의 미워할 수 없는 능구렁이 캐릭터 연기는 무겁게 전개되는 이 작품을 중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영화는 2005년 “용서받지 못한 자들”로 주목받은 윤종빈 감독의 첫 상업 영화지만 아쉽게도 흥행 성적은 좋지 못했다. 하지만 상당한 마니아층을 가진 작품이기도 하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의 ‘100년 동안의 한국영화’ 섹션에 선정될 만큼 작품성은 확실히 인정받은 작품으로, 이번에는 필름 상영으로 진행되며 매진을 기록했다. 영화 상영 후 진행된 GV에서는 윤종빈 감독이 참석해 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영화 촬영에 앞서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고 싶었던 윤종빈 감독은 우연히 호스트바의 이야기에 끌렸고 취재를 위해 직접 한 달 정도 호스트바에 취직해 웨이터 생활을 겪으며 취재했다고 한다. 캐릭터도 상당 부분 자신이 만난 호스트의 모습에서 따온 부분이 있으며 당시에 유명하지 않은 무명 배우의 연기와 대사는 호스트의 실감 나는 분위기를 더욱 짙게 그려냈다. 거기에 더해 지금은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배우 마동석은 실제 깡패를 섭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할 정도로 등장마다 강렬하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영화를 관통하는 주요 사건은 결국 돈으로 시작해서 돈으로 끝난다. 남녀 간의 사랑은 돈 앞에서 손쉽게 부서지기 일쑤며 등장인물의 붕괴 과정은 차갑고 잔잔하게 흘러간다. 그리고 확실한 결말이나 반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석연치 않은 엔딩이기에 궁금증을 유발한다. 지원은 과연 승우에게 공사친 것인지, 과연 이후의 인물은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드러내지 않고 있다.
호스트바 마담을 연기한 하정우의 캐릭터는 돈 말고는 자신의 친구도, 가까운 사람도 모두 등쳐먹는 인물이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다. 영화에는 놓치기 아쉬운 명대사가 수두룩하다. 영화 초반부에 호스트를 차에 태우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볼튼 원더러스의 경기 이야기에 대해서 마구 떠들어대는 하정우의 대사는 마치 ‘혼이 담긴 구라’와 같다. 영화를 다시 자세히 본다면 하정우의 재밌는 대사들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윤종빈 감독은 애초에 이 캐릭터를 구상할 때 하정우를 염두에 뒀으며 비스티 보이즈 메이킹 필름에서는 본 촬영 전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는 하정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가 왜 느낌 있는 배우인지 다른 영화가 아닌 “비스티 보이즈”에서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리얼 허슬러들의 익살스러운 연대와 투쟁, “가마가와사키 가마솥 전쟁(The Kamagasaki Cauldron War)”
가마가와사키는 전후 일본 경제성장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지역으로 발전한 곳이다. 이후 일본 경제가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이 지역 대부분의 남자는 일용직 근로자, 여자는 매춘부가 되어 살아간다. 힘겹게 살아가는 매춘부 메이(오타 나오리)와 성당 보육원의 친구이자 소매치기인 니키치(카와세 요타)는 어느 날 아버지를 잃게 된 소년 칸타로를 만나 함께 살아가기로 한다. 한편 개발업자들이 갱단, 경찰과 결탁해 지역 노숙인과 매춘부를 몰아내려 한다. 갱단이 애지중지하는 가마솥을 찾기 위해 혈안이었는데, 가마솥은 가마가사키 갱단이 애지중지하는 물건이자 가마가사키 노동자와 극빈층을 먹여 살린 상징이다.
영화의 첫 시작은 공원에서 무료 급식을 받는 노숙자와 노동자의 모습을 비춘다. 마을 구성원 대부분 허름한 슬럼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개발업자가 주민을 내쫓기 위해 조직과 경찰과 결탁하는 모습은 현실에서도 일어날 법한 서슬 퍼런 현실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인 주제이기에 매우 무거운 영화일 것 같았지만, 속도감 있는 전개와 영화 속 코믹한 장면은 현실의 무게를 덜어주었다.
노숙자와 매춘부를 쫓아내기 위해 고용된 갱단과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노숙자의 골이 깊어지고, 다시 연대가 성립되는 과정 역시 매우 익살스럽게 그려지고 있다. 60년대 후반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과 전공투(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 세대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장면도 코믹하게 그려지며 노숙자 그리고 갱단의 마지막 격돌은 흩날리는 돈 앞에서 방향을 잃고 만다. 단결하면 밥이 나오냐며 돈을 줍기에 바쁜 노숙자의 모습은 자본주의에 쉽게 무너지는 연대를 드러낸다.
인상 깊었던 장면은 석방된 니키치에게 응원과 연대의 메시지를 읽어 내려가는 장면이다. 메이데이에 전 세계 노동자들이 합창하는 “인터내셔널가(The Internationale)”를 흐르게 했는데, 우연히 노동자와 노숙자에게 투쟁의 아이콘으로 추앙받는 소매치기 니키치의 기회주의적인 모습이 코믹하게 나온다.
사회적인 주제와는 별개로 메이는 거리에서 호객하는 매춘부다. 성냥에 불을 붙인 메이에게 남자가 다가가 불을 담배에 붙이면 매춘이 성립하는 암묵적인 룰이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메이가 사용하는 성냥은 강가에서 주어온 젖은 성냥이다. 아무리 튕겨봐도 타지 않는 성냥은 비록 매춘부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몸을 팔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텐데, 영화 속에서 그녀의 캐릭터는 뜻을 굽히지 않는 강건한 성격이기도 하고, 더불어 이 영화의 갈등을 촉발하고 그 끝을 장식하고 있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실제로 영화에 등장하는 노동복지센터는 강체 철거되었고, 감독 사토 레오(Sato Leo)는 직접 이 지역에서 함께 투쟁하며 노동자와 노숙인과의 신뢰 관계를 얻어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작품이 다큐멘터리 필름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픽션이기에 오히려 다큐멘터리에는 담지 못할 장면을 더 끌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영화는 일본의 전통 예능인 ‘라쿠고(고전 만담)’의 이야기 중 일본 전국시대에 활약했던 대도 이시카와 고에몬의 스토리를 재해석한 픽션이다. 그리고 현재 일본의 현실을 빗댄 대사가 코미디의 소재로 활용되기도 한다. 감독은 현재 일어나는 사회현상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회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카메오로 잠깐 등장한 아다치 마사오 감독은 일본 전공투 세대 영화의 상징적인 사람으로 영화의 색깔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영화는 1년의 촬영과 5년의 모금으로 완성됐다. 한국인의 시각으로도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사회 문제이기에 기회가 된다면 찾아보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