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요지 야마모토(Yohji Yamamoto)의 푸어 옴므(POUR HOMME) 24 FW 컬렉션 런웨이에 의외의 인물이 등장했다. 바로 독일의 영화감독 빔 벤더스(Wim Wenders). 큼지막한 화이트 칼라 셔츠 위로 베스트, 크레이프 코트를 껴입은 그는 느릿느릿 런웨이를 걸어 나오더니 이내 뉴질랜드 발레 무용수 한나 오닐(Hannah O’Neill)과 함께 무대를 빠져나갔다. 얼마 뒤 다시 등장한 빔 벤더스와 오닐은 빔 벤더스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적힌 롱 스커트, 화려한 플라워 패턴의 셔츠, 검은색 서스펜더와 페도라로 차려입고 다시금 무대 위를 누볐다.
최근 영화 “퍼펙트 데이즈(PERFECT DAYS)”를 개봉하며 이래저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만 같던 그가 패션쇼 모델이라니. 사실 두 사람은 때로는 작업자로, 때로는 술친구로 장장 3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해 왔다. 빔 벤더스가 “우리는 오래전부터 형제처럼 친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라고 밝힌 것처럼 둘의 인연은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빔 벤더스가 요지 야마모토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도시와 옷에 놓인 공책(NOTEBOOK ON CITIES AND CLOTHES)”이 있다.
“도시와 옷에 놓인 공책”은 패션계와 정반대의 세계에 살던, 오히려 경멸에 가까운 시선을 가진 벤더스가 패션 디자이너에 관한 단편 영화를 만들지 않겠냐는 퐁피두 센터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탄생했다. “패션.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초반부 내레이션만 봐도 벤더스의 솔직한 심리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패션이 아닌 패션 세계를 마치 영화의 세계처럼 바라보려는 벤더스의 호기심 어린 눈은 요지 야마모토의 생활 구석구석을 쫓기 시작한다.
훗날 요지의 말에 따르면 벤더스는 대규모 영화팀이 아닌 오직 35mm 대형 카메라 아이모(Eyemo)만을 들고 홀로 그를 찾아왔다고 한다. 이후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도쿄와 파리를 오가며 쇼를 준비하는 요지의 모습을 조용히 담았다. 때로는 그에게 질문을 던기기도 하고 그와 함께 당구도 치면서. 행여 카메라 필름 회전 소리가 요지의 컬렉션 준비에 방해가 될까 노심초사 한 벤더스가 후에 아키하바라에서 가정용 비디오카메라를 구입했다는 일화는 첫 만남의 조심스러운 공기를 상상케 한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나면 영화는 한 패션 디자이너의 면면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밀착 취재 프로그램으로 보일 수 있겠다. 그러나 영화는 초반부 내레이션에서부터 끊임없이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도시의 정체성, 현대인의 정체성, 패션의 정체성, 영화, 이미지의 정체성. “어떤 도시를 원하느냐”는 질문으로 물꼬를 튼 벤더스는 요지 그리고 스스로의 입을 빌려 삶을 구성하고 있는 다수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한다.
요지 야마모토의 셔츠와 재킷을 입고선 빔 벤더스가 던지는 “나는 마치 기사가 된 듯 보호받는 느낌을 받았다. 이들의 비밀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은 요지의 작업실에 놓인 사진작가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의 사진집 ’20세기 사람들’으로 이어진다. 요지는 당시 사람들의 사진, 특히 그들의 얼굴과 옷만 보더라도 그들의 직업과 정체성이 여실히 드러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그러한 ‘리얼리티’가 없는 점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스튜디오에 이르러서는 “작업의 출발점은 어디인가?”라는 물음을, 이후에는 함께 당구를 치며 어린 시절 집에 옷더미가 쌓인 게 싫었다는 요지의 회상이 관객을 맞는다. 이외에도 주변 사람들에 대한 요지의 영감을 비롯해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 여성에 대한 관점, 도시화, 역사 등의 이야기가 영화를 채운다. 두 사람의 대화가 쌓여갈수록 관객 역시 이들과 한 걸음 가까워진다.
특히, 도쿄의 숍을 재단장하면서 간판에 직접 자신의 브랜드, 그러니까 본인의 이름을 몇 번이고 지워가며 흰 분필로 손수 적는 요지의 모습은 그의 집요함을 엿볼 수 있는 장면으로 많은 이들이 “도시와 옷에 놓인 공책”의 명장면으로 꼽고 있다.
빔 벤더스의 진솔하고 진지한 물음은 두 사람을 끈끈하게 엮는 동아줄이 되기에 충분했다. 요지는 한 인터뷰를 통해 “독일과 일본 모두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했다. 어쩌면 우리 둘 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미국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서로 통했을지도 모르겠다. 빔은 내가 우러러볼 만큼 키가 컸으며, 정신적으로도 성숙한 사람이어서 나보다 어리지만 그에게서 ‘큰형’ 같은 따뜻함이 느껴졌다”고 전했다. 촬영을 마친 빔은 요지를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의 베를린으로 초대한다. 두 사람은 자유를 앞둔 도시에서 무슨 상념에 잠겼을까. 도시, 옷, 이미지에 대한 물음으로 가득한 다큐멘터리 필름 “도시와 옷에 놓인 공책” 각 물음에 대한 해답은 직접 확인해 보길 권한다. 영상은 비메오(Vimeo)에서 감상할 수 있다.
*TMI: 빔 벤더스는 “도시와 옷에 놓인 공책” 촬영 전 이미 요지 야마모토를 마음속에 두고 있었다. 그의 대표작 “베를린 천사의 시(Wings of Desire)”의 클라이막스 장면에서 여주인공 솔베이그 도마르틴(Solveig Dommartin)의 의상이 매우 중요했는데, 이때 등장하는 빨간 드레스를 바로 요지가 제작한 것. 빔은 해당 장면 통해 의상에 대한 중요성을 깨우쳤다고 전했으며, 이후 “이 세상 끝까지(Until the End of The World)”에서 요지의 의상을 다시금 등장시킨다.
이미지 출처 | IMDb, MUB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