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자신의 존엄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선택한 의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충실히 그 기능을 수행해왔다. 의자가 ‘계급’을 나누는 사물로 탄생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그렇게 인간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은 이 편리한 도구는 역사를 거치며 자신의 의미를 꾸준히 변화했다. 20세기 초 모더니즘이 태동할 무렵부터 건축가와 패션 디자이너에 의해 새롭게 탄생한 가구, 그 어느 공간에 두어도 빛을 발하는 의자는 본래의 의미를 한참 벗어나 예술에 가까운 모습으로 새 단장을 마쳤다.
의자, 이를 포괄하는 가구의 변화는 패션에까지 그 영향을 끼치는데, 브랜드 컬렉션에 종종 등장하는 가구의 모습은 종래 우리가 알던 패션 브랜드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역할을 겸하며 그 고고한 턱을 한껏 치켜들게 하고 있다. 패션 디렉터, 디자이너들은 가구를 ‘직접’ 만들지는 않았지만, 풍부한 경험에 의한 눈썰미로 적절한 걸 고른다. 수많은 하입비스트의 침샘과 ‘공간’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는 것이다. 과연 그들이 택한 가구는 도대체 뭐가 다르기에 협업을 주저하지 않을까. 더불어 이 신(Scene)에서 확실히 먹히는 단어인 ‘리미티드’ 그리고 감성 인테리어의 칭호를 얻은 존재감 쩌는 가구 브랜드 몇 개를 알아보자.
Supreme X Artek Aalto Bench 153A
Supreme X Artek Aalto Stool 60
sacai X Artek Domus Lounge Chair
Artek
일단, 이번 슈프림(Supreme) 17 S/S 컬렉션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아르텍(Artek), 핀란드의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 알바 알토(Alvar Aalto)가 설립한 브랜드가 가장 직관적인 설명일 텐데, 일단 알바 알토라는 아저씨는 핀란드의 자랑이라고 불릴만큼 유명한 인물이다. ‘느낌’에 환장하는 이들이 죽고 못 사는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아버지. 핀란드 지폐에 그 얼굴이 새겨졌을 정도니 그 명성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보자. 1935년 설립해 여전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우리 주변에 흔히 보이는 모던 디자인 가구의 초석을 다진 브랜드가 바로 아르텍이다. 이번 슈프림에서 등장한 벤치 153A 모델은 1945년 알바 알토가 직접 디자인한 제품으로 평균 리테일가는 595달러, 스툴 60은 220달러 정도다. 이런 가격에 체커보드판 말고는 볼 게 없는 저 나무 쪼가리를 도대체 왜 사냐고? 걱정 마라. 당신 말고도 살 사람은 지천으로 널려 있다. 자신의 집, 혹은 가게 분위기를 쩔게 만드는 비용치고는 저렴하지 않나? 참고로 일본의 패션 레이블 사카이(sacai)도 아르텍과 협업해 멋들어진 디자인의 의자를 만들어냈다. 이런 걸 보면 좆되는 브랜드끼리 통하는 느낌이라는 건 분명 존재한다.
Stussy Livin’ GENERAL STORE X Mordernica GS Fiberglass Arm Shell Chair
HUF X Modernica Green Fiberglass Shell Chair
Anti Social Social Club X Modernica Eiffel Side Shell Chair
A Bathing Ape X Modernica ‘Ape Head’ Coffee Table
Modernica
스투시(Stussy), 베이프(A Bathing Ape), 허프(HUF), 가장 최근의 안티 소셜 소셜 클럽(Anti Social Social Club)까지. 무수한 스트리트 브랜드와 협업을 진행한 브랜드 로스앤젤레스 가구 브랜드 모더니카(Modernica)는 이제 스물다섯 해를 넘긴 가구 기업이다. 고압 유리 섬유를 베이스로 유려하게 만들어낸 의자가 모더니카의 간판으로, 역시나 높은 가격대를 자랑한다. 단순한 디자인과 높은 기능성을 신조로 현대적인 가구를 제작하고 있으며, 그 이름만큼이나 현대적인 가구를 쉴 새 없이 선보인다. 여러 브랜드와 함께 꽤 다양한 가구를 제작 중인데, 베이프의 원숭이 얼굴을 고스란히 옮긴 테이블은 많은 하입비스트의 손을 덜덜 떨게 할 정도로 강한 임팩트를 남겼다. ‘힙’을 지향하는 카페, 음식점에서 많이 보이는 디자인 체어지만, ‘진짜 모더니카’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브랜드는 아니다. 이들이 어떻게 의자를 만드는지 본다면 더욱 이해가 쉬울 것.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그 거실에 베이프 로고가 조각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 이후부터는 그 새끼가 뭘 입고 있던 니고(Nigo)처럼 보일 것이다.
A Bating Ape X Fabrick X Karimoku CAMO Furniture Collection
Karimoku
앞서 핀란드와 미국의 가구 브랜드를 소개했다면, 이번에는 가까운 장인의 나라 일본의 가구 브랜드를 알아보도록 하자. 나무에 대한 깊은 이해도로 가구에 접근하는 브랜드 카리모쿠(Karimoku)는 일본에서 최선두를 달리고 있는 가구 브랜드로 ‘품질’ 하나로 까다로운 일본인을 만족하게 했다. 베이프는 모더니카에 이어 카리모쿠와도 협업을 진행했는데, 이건 앞서 설명한 모더니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쩐다. 장난감으로 유명한 메디콤 토이(Medicom Toy)가 총괄하는 섬유 브랜드 패브릭(Fabrick)과 삼자로 진행한 협업은 뭐 누구나 상상할 수 있을 정도로 평이한 디자인이지만, 고급스럽고 우아한 카리모쿠의 원목과 키치의 끝을 달리는 베이프 카모가 만나며 이 게임을 끝내버린다. 당신이 진정한 베이프의 골수 팬을 자처한다면 샤크 후디, 카모 파카를 사는 것보다 이 400만 원짜리 삼 인용 소파를 먼저 사는 것을 추천한다. 옷장에 걸려 잘 보이지도 않는 수많은 베이프 컬렉션보다 당신의 집을 베이프 쇼룸처럼 보이게 할 테니까.
visvim X Herman Miller Eames Plywood Dining Chair DCW
Herman Miller
일본의 리빙 디자인 잡지, 카사 브루투스(Casa Brutus)는 작년 세 곳의 일본 브랜드 가구 브랜드를 매치해 색다른 가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일본 유수의 디자이너 라벨 엔.헐리우드(N.HOOLYWOOD)와 앞서 언급한 사카이(sacai), 그리고 브랜드의 연예인 같은 느낌으로 이 변화무쌍한 신(Scene)을 올 타임 휘어잡고 있는 비즈빔(visvim)까지 대거 등장한 이 프로젝트는 팔방미인과도 같은 세 가지 의류 브랜드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줬다. 비즈빔이 택한 브랜드는 곡선의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디자인 체어의 대명사 임스 체어(Eames Chair)를 생산하는 모던 클래식 가구의 끝판왕 허먼 밀러(Herman Miller)로, 나카무라 히로키(Hiroki Nakamura)의 눈높이를 그대로 반영한 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그 알맹이는 놀라울 정도로 별것 없다. 그저 비즈빔이 고수하는 ‘천연’을 모티브로 다이닝 체어 우드(Dining Chair Wood), 일명 DCW 체어에 천연 염색한 천을 입혔을 뿐. 하지만, 그렇게 고고한 비즈빔의 의류를 깔고 천 쪼가리가 마르고 닳도록 앉아 있기 위해선 이 의자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 그리고 그 의자가 바로 임스 체어의 아버지 찰스 임스(Charles Eames)가 고안한 것. 두 라벨만으로 상당한 프리미엄을 형성할 것만 같은 이 의자는 판매용이 아닌 전시용으로 빔즈(BEAMS)에 일정 기간 전시되었다. ‘왜 허먼 밀러였을까?’ 라는 의문은 별로 필요 없을 것 같다. 최고의 브랜드가 최고의 브랜드와 협업하는 그림이 어색할 이유는 전혀 없다.
mastermind JAPAN X Building Chill Out Sofa
LOOPWHEELER X Building 5th Anniversary Eames Chair
Building
일본 가구 브랜드 빌딩(Building)은 앞서 언급한 네 가구 브랜드보다는 네임밸류와 히스토리가 약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세련된 젊은이라면 빌딩이 만드는 가구야말로 가장 멋들어지게 보일 것이다. 빌딩의 모든 가구는 짜치는 건 절대 용납하지 않는 잔인한 도시 ‘도쿄’에서 ‘젊은 장인’이 온 정성을 다해 만들고 있다. 계속 머물고 싶게 하는, 기분이 좋아지는 가구의 본질을 꿰뚫어 제작하는 가구를 마다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생각해보자. 동시에 커스텀 메이드 시스템을 실시하며, 다양한 조건에 어울리는 가구를 생산한다. 이런 점이 마스터마인드 재팬(mastermind Japan)이나 루프휠러(LOOPWHEELER)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원동력이었을 것. 지구 상에서 가장 큰 마스터마인드 로고를 갖고 싶다면, 빌딩과 협업한 소파를 사면된다. 루프휠 머신으로 짜임새 있고 도톰하게 짜인 루프휠러의 감촉을 매일 느끼길 원한다면, 당장 루프휠러 오피스 체어를 구입하자. 바로 앞에 언급한 허먼 밀러와 루프휠러의 연결고리에 새파랗게 어린 가구 브랜드 빌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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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총 다섯 가지 하입비스트의 마음을 아리게 하는 가구 브랜드 다섯 개를 알아보았다. 세븐일레븐, 맥도날드에서 일하며 정신없이 스니커를 사 모으던 소년은 어느덧 직장을 갖고 자신의 공간을 갖게 되었다. 나이키 스우시, 삼선 로고가 박힌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던 아침 대신 여간해 적응할 수 없는 딱딱한 구두를 신었을 때, 그래픽이 잔뜩 들어간 티셔츠 대신 흰 러닝셔츠를 입으며 이제는 브랜드, 패션이 뭔지 도통 헷갈릴 때도 있을 것이다. 그저 쉬이 몸을 뉘일 수 있는 소파와 의자가 자신의 활동반경이라고 느꼈을 때. 그럼에도 도무지 멋을 포기할 수 없을 때 가구로 점차 눈을 돌린다. 그리고 그렇게 어른의 소비를 시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