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한 움직임으로 긴 시간 매번 새롭게 변모하는 컨버스(CONVERSE)가 “RENEW”라는 이름의 스니커 컬렉션을 출시했다. ‘다시 새롭게’라는 슬로건과 함께 등장한 리뉴 캔버스 컬렉션은 지속 가능한 패션을 향한 컨버스의 대안으로 척 70(Chuck 70)와 척 테일러(Chuck Taylor)의 실루엣을 고스란히 가져옴과 동시에 스니커를 이루는 어퍼와 부자재를 재활용 소재로 탈바꿈시켰다.
컨버스 리뉴와 함께하는 또 한 명의 크리에이터는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 양희재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정형화된 서체에 그치지 않고, 본인의 창의성을 통해 기존의 것을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그의 디자인은 컨버스 리뉴의 의도와 궤를 같이한다. 그가 선보이는 서체 디자인, 그리고 그 영감의 원천은 무엇일지. 아래 인터뷰를 통해 확인해보자.
간단한 소개 부탁한다.
서체, 그래픽 디자인을 겸하는 디자이너 양희재다. 장수영 서체 디자이너와 함께 양장점이라는 타이포그래피 스튜디오를 운영 중이다.
국내에 서체 디자인을 배울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 있는지.
아직 한국은 학부나 석사 과정으로 서체 디자인만을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학과는 없다. 시각 디자인학과 내부에 서체를 전문으로 교육하는 교수가 몇몇 있지만, 수업 과정 내 한 학기 정도로 타이포 수업을 진행한다고 알고 있다. 이러한 교육이 대학과정 커리큘럼에 속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흥미가 있는 이는 외부의 교육기관을 통해 수업을 받은 후 본인 글자를 출시하거나 타이포그래피 회사에 입사해 도제식으로 배우는 구조다. 나의 경우는 해외에서 라틴 알파벳을 공부한 거고.
타이포그래피를 배우기 위해 스위스행을 택한 건가.
본격적으로 서체 디자인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스위스에 간 건 아니다. 스위스 그래픽 디자인의 특징이 장식적이기 보다는 글자를 위주로 진행된 경향이 있다. 그런 부분을 좋아해서 스위스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싶었다. 스위스에 있는 대학교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마침 서체 디자인도 할 수 있고, 그래픽 디자인도 할 수 있는 커리큘럼의 석사 과정이 있어 스위스 로잔 예술대학교를 선택했다. 입학해보니 타이포와 그래픽 디자인 커리큘럼 중 하나를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서체를 공부하겠다고 하면 서체 디자인만 공부할 수 있는 상황이 주어졌다.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을 텐데, ‘글자’에 처음 관심을 가진 때는 언제인가.
스위스 대학원을 목표로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의 포트폴리오를 쭉 정리했다. 전략적으로 글자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던 작업이지만, 모아 놓고 보니 주로 글자를 가지고 표현한 결과물이 많았다. 그래서 스위스 로잔 예술대학교에 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입학 후 수업 과정 내에서 서체를 배우다보니 그 안에서 재미를 느꼈다. 타이포그래피로 승부를 보겠다는 특별한 계획보다는 글자를 그리는 행위가 즐거워서 자연스레 이 길을 선택했다.
서체 디자인 장르에 암묵적인 규격이나 정해진 양식이 있는지?
명확하게 수치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서체 디자이너라면 어떤 글자가 좋은 글자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있다.
그 기준을 설명해줄 수 있을까?
쉽게 말해 글자와 글자 사이의 관계다. 예를 들어 특정 글자를 디자인할 때 그 글자 구조가 복잡하면 그 두께가 조금 더 얇아지는 형식이다. 그 옆의 글자가 단순하다면, 또 그 두께를 또 신경 쓴다. 시각적으로 보정하기 위해서 조정하고 잘 조정한 글자가 완성도 있는 글자다.
‘한글타이포그래피학교’를 통해 글자를 다루는 방식을 소개했는데, 글자를 다루는 방식이란 무엇인가?
한글타이포그래피학교라는 프로그램은 계원예대 이용재 교수를 주축으로 진행되는 서체 교육 프로그램이다. 그 프로그램 내에서 난 영문 디자인을 중점으로 교육하는 사람이었다. 한글을 디자인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누구에게 배우면 된다는 게 있기는 있다. 주로 선배 디자이너들의 작업을 배우는 방식인데, 나처럼 라틴 알파벳만을 중점적으로 진행하는 디자이너는 없기 때문에 자신이 만드는 한글 디자인과 어울리는 라틴 알파벳 디자인을 가르치는 게 수업의 중심 주제였다. 한국은 디자인에 정답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정답인지 탐구한다고 해야 하나. 난 한글에 완전히 어울리는 라틴 알파벳을 만들기보다는 완성도 있는 영문 서체를 디자인하고 그 결과물이 한글과 어울릴 수 있는 지점을 찾는 방법을 이야기했다.
서체 디자인을 범접할 수 없는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는 디자이너가 더러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다른 디자인과 쉽게 구별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니까. 난 모든 디자인의 기초가 되는 요소는 통일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인 형태는 다르지만, 비슷한 무게로 보이게 하는 원리를 디자인에서 배운다. 그것들이 모두 서체에 적용되는 것이고, 그 근간은 모든 디자이너가 알고 있는 것이기에 별 두려움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게 서체 디자인이라고 이야기한다.
타이포그래피를 할 때 가장 중점을 두는 요소는 무엇인가.
누군가 정한 답을 찾기 보다는 본인의 기준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자주 이야기한다. 그래야지 본인의 이름을 단 글자를 만들 수 있는 거고 그런 마인드가 있어야 두려움을 없앨 수 있다. 글자라는 건 굉장히 보수적이다. 역사에 기반한 디자인 분야이기에 과거의 붓으로 썼던 글자를 디지털화하는 작업이 굉장히 많다. 그게 단순히 붓으로 써진 것을 외형만 디지털로 만드는 것을 ‘복각’이라고 한다.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본인만의 디자인을 첨가해야 새로운 창작물이 되기 때문에 스스로 그 기준을 세우는 게 서체 디자인의 중요한 요소다.
글자가 역사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라는 점이 흥미롭게 들린다.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틀이 있다. A를 특이하게 그리더라도 우리 머릿속에 있는 A라는 글자의 기본적인 형태가 있으니까 그 구조 안에서 뭔가를 새롭게 창조해야 하는 작업이 타이포그래피다.
각 나라의 문자가 지닌 디자인의 특징이 모두 다르지 않나, 특히나 한글은 자음과 모음, 받침 등 글자의 다양한 변화로 그 과정이 더욱 복잡할 것 같은데.
난 외국인으로 영문을 디자인하는 입장이니까 특히나 그 차이를 많이 느낀다. 한글 디자인을 아예 모르는 상태에서 해외로 나갔고, 그곳에서 라틴 알파벳 타이포그래피 디자인 수업을 받고 들어왔으니 처음에는 한글 디자인도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막상 주변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한글 디자이너와 일을 시작하면서 이게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는 걸 알았다.
일단 접근하는 방식이 아예 다르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언어가 지닌 특징은 글자 디자인에 그대로 적용된다. 예를 들어 한글은 ‘양’이라는 글자가 완성된 하나의 기호로 나타난다. 이게 아래 ㅇ 받침이 빠져 ‘야’가 됐을 때 ‘양’을 이루던 모든 글자의 크기가 바뀌어야 하니까. 한 자 한 자의 형태적인 완성도를 되게 중요시해야 한다. 영문 같은 경우에는 ‘yang’를 썼을 때 ‘y’의 앞뒤로 어떤 글자가 오느냐에 따라 완성도가 달라진다. 한글은 총 2,700자 정도를 디자인한다. 라틴 알파벳은 대소문자를 합해도 100자가 안되지만, 디자인할 때마다 주변 글자를 바꿔가면서 그 관계를 생각해야 한다. 이게 한글과 영문 디자인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한글이나 영문 외 다른 나라의 글자를 디자인해본 적 있는지.
그런 적은 없다. 다만, 영문에서 파생된 불어나 독일어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기본 라틴 알파벳에 첨자가 붙어 그 모든 서체가 한 서체자의 방법론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니까.
양희재가 디자인한 서체의 공통적 디자인 특징이 있나?
군더더기가 없는 디자인을 지향한다. 표현의 강도도 너무 세기 보다는 톤이 다른 느낌을 원한다. 형태적으로 설명하자면, 깨끗하고 순수한 느낌이랄까.
타이포그래피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어떤 타이포를 쓰느냐에 따라 글의 분위기가 달라 보인다는 것이다.
맞다. 글자에 따라 그 내용이 가진 소리가 달라진다. 최근에는 컴퓨터나 각종 소셜미디어를 통해 소통하지 않나. 하나의 글자는 한 명의 성우라고 생각한다. ‘이 글자나 단어를 쓸 때 내 타이포그래피는 이런 톤으로 말해줄 거야’같은 것? 그런데 이게 내가 기대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많이 쓰인다. 나는 이런 이미지를 상상하고 글자를 그렸는데, 되게 새로운 장르에서 내 글자를 쓸 때, ‘이렇게도 쓰일 수 있구나’라는 생각으로 놀라게 된다.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점이 글자의 가장 큰 매력이다.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서체라면?
물론 좋아하는 글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어떤 내용이냐에 따라 글자가 바뀌어야 하는 거니까. 단 하나를 고르긴 어렵고, 좋아하는 디자이너는 있다. 스위스에서 공부했으니 스위스에서 활동하는 서체 디자이너의 작업을 좋아한다. 하하.
외국인이 평하는 양희재의 영문 서체 디자인은?
언젠가 외국 친구가 내 서체 디자인을 보더니 한국 느낌이 난다고 이야기하더라. 나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디자인했는데. 하지만, 분명 그런 지점이 있을 거다. 외국인이 봤을 때 내가 디자인한 서체가 그들 것과 조금은 다르겠지. 어쨌든, 난 외국어를 디자인하는 거니까. 처음에는 불안했다. 사실, 외국 디자이너가 한글을 디자인한 레퍼런스가 있긴 있지만, 그게 그리 좋지는 않거든. 나 역시 영문 서체를 디자인하며, 똑같은 문제로 걱정했다. 하지만, 그런 피드백이 부정적이라고 느끼지 않았었고, 지금도 해외 작업을 조금씩 하고 있으니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라고 느낀다. 다르다는 것이 약점일 수도 있지만, 난 이걸 장점이라고 말하고 싶다.
평소 뭘하며 시간을 보내나.
라이프스타일과 내 작업의 방향은 조금 다르다. 요즘 가장 큰 이슈는 양양에서 서핑하는 거다. 최근에는 주말 내내 양양에만 있었다. 양양에 집까지 얻어 놨을 정도니까. 지금 내 일상은 서울에서의 삶이 2/3, 양양에서의 삶이 1/3이다. 서울에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일한다. 원하지는 않지만, 클라이언트 일을 굉장히 많이 하는 상황이어서 이런 부분을 조정하고 싶긴 하다. 한국에 와서 내 것을 하고 싶다고 하지만, 들어오는 일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2년 정도 일만 하다 번아웃이 왔다.
타이포그래피를 진행할 때 어디서 많은 영감을 얻는지.
서체 디자인 분야가 다소 지루하고, 폐쇄되어 있다. 자기들끼리만 고민하는 등 세계가 되게 좁다. 그 안에서도 장사하는 글자와 학자의 글자가 나뉜다. 난 그 경계에 있는 상황이다. 그런 지루한 분위기의 디자이너가 되지 않으려고 한다.
예술가가 영감을 얻는 과정은 대략적으로나마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타이포그래피는 영감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희미하다.
여러 가지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어떤 디자이너는 궁중 글씨부터 분석해 디지털화하기도 한다. 비즈니스와 연결된 이들은 기업에서 원하는 추상적인 분위기를 어떻게 타이포로 구현할지 생각한 뒤 얻기도 한다.
양장점이 완성한 타이포그래피 중 하나인 ‘펜바탕’은 펜으로 쓴 손 글씨를 콘셉트로 했다. 우리나라는 붓으로 쓴 글자를 명조라고 하고, 무늬가 없는 글씨를 고딕이라 칭하고 있다. 우리는 현대적인 필기구를 중심으로 디자인하는 차원에서 펜으로 쓴 글자의 특징을 유심히 관찰하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예를 들어 건축물을 보고 그 건물의 비율이라든가, 기본 형태의 리듬을 보기도 한다. 단순 구상 작업에서는 글자를 넓고 좁고, 혹은 높고 낮음 등 이런 추상적인 느낌을 통해 디자인하기도 한다. 되게 다양하다.
구체적인 사물보다는 추상적인 것에서 영감을 많이 받는 것 같다.
그렇다. 전략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내가 과거의 완성된 작업을 갖고 오는 사람으로는 적합한 캐릭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그쪽 언어를 더 잘 아는 사람이 했을 때 메리트가 있다. 난 서체라는 문화 바깥에서 영감을 가지고 와야 더 좋은 디자인을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진행한 결과물 중 특별히 애착이 가는 타이포그래피가 있다면.
내가 다닌 스위스 학교에는 학생의 타이포그래피 중 하나를 골라 판매하는 플랫폼이 있다. 3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판매되고, 다양한 포맷을 통해 계속해서 결과물로 나오는 글자가 있다. 하하. ‘Fifty’라는 이름의 폰트인데, 내 명함에서도 볼 수 있다. 이게 스스로 라틴 알파벳 디자인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양장점 스튜디오만의 특징은 무엇인가.
양장점 스튜디오는 한글 디자이너와 라틴 알파벳 디자이너로 구성된 스튜디오인 것을 가장 큰 특징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글의 콘셉트에서 출발한 라틴 알파벳도 있을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출발의 다양성이 우리가 가진 장점이다. 어쨌든 우리나라가 한글을 쓰지만, 굉장히 많은 양의 라틴 알파벳을 기반으로 하는 문화가 있으니까. 그것을 전부 아우를 수 있는 콘셉트를 지닌 스튜디오가 양장점이다. 작업의 방식도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어떤 주제를 정해서 서로 작업한 뒤 각자 완성이 되었을 때 모여서 서로 작업을 맞춰본다. 같이 앉아서 토론하고 회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길을 걸을 때 무엇을 가장 많이 보는지?
강아지를 많이 보는 것 같다. 하하.
양희재가 생각하는 타이포그래피, 그리고 ‘RENEW’란?
완성된 글자를 다시 만드는 것보다는 내 주변의 영감을 글자라는 플랫폼 안에서 구현하는 것? 내가 아까 보여준 글자도 르코르뷔지에 건축물로부터 시작했다. 글자 디자인의 기원은 굳이 말하지 않으면 모르지 않나. 건축물에서부터 출발했지만, 결과물은 글자로 탄생한 거니까. 주변을 보더라도 글자 어딘가에 놓인 재미를 찾으려 한다. 각 사물이 가진 매력을 글자로 표현해보는 상상을 자주 하는 편이다.
지금까지 진행한 전시나 프로젝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이 있었다면.
나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이 내가 디자인한 글자를 쓰는 경우가 있다. 방금 보여준 ‘Fifty’의 경우도 그렇고. 이번에는 건축 잡지 표지에 내 타이포가 올라왔다. ‘다큐멘텀(DOCUMENTUM)’이라는 잡지의 표지를 작업했는데, 그걸 디자인한 선생님도 나에게는 되게 고마운 분이다.
향후 계획은?
그래픽 디자이너와 함께 협업 글자를 만들어 보는 게 내년까지 계획이다. 그 글자를 만들어서 해외를 기반으로 비즈니스하고 싶다. 한국에서만 소비되는 글자를 만드는 게 아니라 외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라틴 알파벳의 특징을 완성해서 플랫폼을 만드는 것. 내가 하는 일의 특징상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디자인이 특징이니까.
제작 │ VISLA, CONVERSE Korea
디렉터 │ 고지원
에디터 │ 권혁인, 오욱석, 김홍식
사진 │ 김선익
스타일리스트 │ 이잎새
헤어 & 메이크업 │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