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하반기 패션 흐름을 가늠해볼 수 있는 F/W 파리 패션 위크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일주일 내내 각종 매체가 관련 기사를 쏟아내는 가운데, 오로지 내 관심사는 ‘또 어떤 미친 신발이 내 지갑을 열게 할 것인가’였다. 무의식과 의식의 공존 사이에 숨 가쁘게 넘어가는 인스타그램 피드. 손가락은 어느새 사카이(Sacai)에 멈춰 있었다. 그래 이거야. 지금부터 두 시즌에 걸친 사카이와 나이키(Nike)의 협업 컬렉션을 살펴보고, 그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Sacai Man 2019 S/S
시간을 거슬러 작년 하반기에 발표한 2019년 봄·여름 컬렉션부터 살펴보자. 사카이는 런웨이에서 미국 포틀랜드 기반의 헤리티지 브랜드 펜들턴(Pendleton)과 타투이스트 닥터 우(Dr. Woo)와의 삼자 협업물을 선보였다. 사카이라고 하면 분해와 조합이 아니던가. 미 원주민의 의복 양식에 기반해 펜들턴 특유의 다채로운 패턴과 소재를 재조합하고, 그 시대 드넓은 자연을 연상케 하는 닥터 우의 일러스트를 얹어 매우 화려한 컬렉션을 완성했다.
이때 모델들이 신은 스니커가 바로 사카이 x 나이키 협업 컬렉션이다. 두 브랜드의 작업 역시 전체 S/S 컬렉션이 내세우는 바를 따라간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이라면? 과거 몇 번의 합에서 봐왔던 것처럼 ‘깔맞춤’에 충실한 모습이 아닐까. 특히 LDV 와플 데이브레이크(LDV Waffle Daybreak)는 빈티지 제품들과 톤을 연결 지을 수 있다에서 미루어 볼 때, 컬렉션 구상(펜들턴을 보며)부터 이미 제품 선정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닌지 짐작해본다.
해당 컬렉션과 관련지을 수 있는 녀석들을 골라봤다. LDV의 삼촌뻘 되는 오레곤 와플(Oregon Waffle)의 색을 사용한 LDV 옐로우/그린(좌), 데이브레이크의 오리지널 컬러웨이(우).
제이 크루(J. Crew)의 와플 레이서(Waffle Racer, 좌)나 로드러너(Roadrunner, 우)를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비슷한 색상을 찾을 수 있다. 덩크의 경우, 4년 전 협업에서도 사용한 남/노 컬러와 2006년산 덩크 SB 센드 헬프(Dunk High Pro SB ‘Send Help’)와 유사한 색조합을 이용했다.
사카이 x 나이키 SS19 협업 컬렉션은 다음과 같이 2종의 LDV 와플 데이브레이크, 그리고 블레이저 덩크(Blazer Dunk) 2종, 총 4종의 제품으로 구성됐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두 가지 신발이 하나로 합쳐진 형상이며, 에어 맥스 95, 에어 맥스 플러스 ‘그리디(Greedy)’와 같은 반반 무 많이 식 구성이 아닌 제품에 제품을 덧댄 형태를 취한다. 두 개 끈, 두 개의 혀, 두 개의 스우시, 두 개의 힐컵. 굉장히 독특하지 않은가. 어릴 적 전대물에서 본 합체 장면이 떠오르는 것은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매우 기발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S/S는 잊으라는 듯 더욱더 화려해진 사카이의 F/W19
갑피는 물론이요, 중창도 유심히 봐두면 좋다. LDV 와플 데이브레이크의 그것은 발 앞쪽부터 시작해 뒤까지 이어진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의 오브제가 있다. 제품을 수평선상에서 관찰하게 되면, 이 오브제가 시선의 흐름을 방해해 마치 중창에 갑피를 ‘얹은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이미 뒤툭튀로 유명한 푸마 RS 컴퓨터(Puma RS Computer) 나 작년 어-콜-월(A-Cold-Wall) 같이 뒤에 뭐가 하나 더 달린 스니커들과는 분명 다른 모양새다.
원색이 난무하는 S/S에 비해 F/W는 채도가 싹 빠지며 한결 차분해졌다. 대신 모델별로 모피와 지퍼가 달린 가죽을 덧붙여 더 높은 완성도를 꾀했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있다. 블레이저 덩크가 그것. LDV와 데이브레이크는 오레곤 와플에서 시작해 LD-1000, LDV, 와플 레이서 등 초기 나이키 러닝의 형제지간이다. LDV 와플 데이브레이크의 갑피를 구성하는 파츠나 마감이 비슷하게 떨어지는 것도 이 때문. 공통분모가 명확한 상태에서 자칫 심심해질 수도 있는 외형에 특이한 중창을 추가해 재미를 준 것이 밸런스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반면 블레이저 덩크는 꽤 다른 두 제품이 만나 갑피 쉐입은 보다 화려해졌으나, 제품 전체의 균형을 놓고 봤을 때 상대적으로 블레이저가 지분을 더 차지한 모습이다. 블레이저의 중창을 몇 겹씩 덧댄 아이디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저 부분을 드러내면 덩크의 중창을 볼 수 있다던가 블레이저에는 없는 숨구멍이 달린 덩크 토박스를 가져와 섬세함을 가미했다면 더 좋을 법했다.
재작년 더 텐(The Ten) 컬렉션이 스니커 시장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면, 올해는 사카이가 선봉장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물론 지금의 나이키 x 오프 화이트의 인기에는 버질 아블로(Virgil Abloh)가 가진 네임 밸류도 한몫했으니, 파급력과는 조금 거리가 먼 이야기다. 하지만 사카이가 보여준 ‘차세대 분해와 조합’은 동시대 디자이너와 앞으로 등장할 스니커에 굉장한 영감을 줄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