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마레 지구의 중심부에는 작은 공원 ‘Le Jardin des Rosiers–Joseph-Migneret’이 있다. 공원은 165명의 유대인 학생이 집단 학살당했던 1942년, 나치 저항에 헌신하고 가능한 한 많은 젊은이를 가스실에서 구하기 위해 분투한 지역 초등학교 교장의 이름을 붙인 장소다. 공원에는 여전히 “잊지 마세요(N’oubliez pas)”라는 문구의 표지판이 남아있다.
그리고 사건은 이 공원에서 멀지 않은 펍에서 일어났다. 2011년 어느 날 밤, 거나하게 취한 남성이 옆 테이블의 커플에게 “난 히틀러를 좋아해”, “너희 같은 사람들은 다 죽었을 거야. 너희 어머니, 너희 조상들은 다 가스실에서 죽었을 것”이라 폭언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폭언을 영상으로 남겼고, 이 남자가 디올(Dior)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란 사실이 온 세상에 알려졌다.
수석 디자이너를 역임하며 인정과 찬사를 받아온 세계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인 갈리아노. 본인 작품에서 인생의 찬란한 다양성을 그토록 긍정했던 이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비참한 상태에 빠져 증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까? 다큐멘터리 영화 “하이 앤 로우: 존 갈리아노(High & Low: John Gallinao)”는 이 궁금증에서 시작됐다. 소셜 미디어 속 법정에선 누구나 판사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단편적인 논쟁은 결국 흑백으로 갈라설 뿐이다. 감독 케빈 맥도널드(Kevin Macdonald)는 인터넷 시대에 ‘용서’란 어떤 모습이며, 나락 이후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다큐멘터리를 통해 추적했다.
영화는 매 장면, 아벨 강스(Abel Gance)의 “나폴레옹(Napoleon)”, 맥도널드의 할아버지 에머릭 프레스버거(Emeric Pressburger)와 마이클 파월(Michael Powell)의 “분홍신(The Red Shoes)”이 교차 편집된 화면을 보여준다. 파리를 정복한 이방인이라는 점, 기술에 대한 헌신을 통해 한계까지 자신을 밀어붙였다는 점에서 갈리아노의 삶과 겹쳐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넘어, 갈리아노의 감각과 환상을 불어넣기에도 적합한 연출이었다. 맥도널드가 갈리아노를 처음 만났을 때, 갈리아노는 실제로 영화 나폴레옹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언급했고, 감독은 갈리아노에게 나폴레옹처럼 바위 위에 올라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장면을 연기해 달라고 부탁해 완성된 장면도 있다.
옷을 좋아하던 어머니와 배관공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이미 어릴 적부터 뛰어난 실력으로 어머니의 드레스를 만들었다. 이미 세인트 센트럴 마틴 졸업 시절의 작품부터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그는 아틀리에와 손잡는 대신 자신의 이름을 딴 레이블을 설립하는 과감한 행보를 보였다. 그리곤 브랜드의 재정이 어떻게 되던 자신만의 판타지 왕국을 만드는 데에만 열중했다. 거의 파산이 임박했을 때는 패션 저널리스트 안나 윈투어(Anna Wintour)와 안드레 레온 탈리(André Leon Talley)의 개입으로 겨우 고비를 넘겼다.
갈리아노는 이후 대형 하이엔드 아틀리에와 손을 잡고 기세를 타고 나아간다. 패션의 수도 파리에서 여러 컬렉션을 마친 갈리아노는 LVMH의 CEO인 베르나르 아르노에게 스카우트되어 지방시(Givenchy)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합류하게 된다. 지방시에서의 시간은 짧았지만, 분명히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996년 프랑스에서 선보인 꾸뛰르 컬렉션은 18세기 창녀의 스타일과 1920년대 카바레 가수의 스타일을 뒤섞은 숨 막히는 감각의 끝이었다. 이는 적잖은 시각적 충격을 안겨주었고 이후엔 디올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물론, 프랑스 업계의 베테랑들은 경험 없는 디자이너가 가장 유명한 패션 하우스의 수장이 된 것이 달갑진 않았지만, 갈리아노의 대담한 접근 방식과 기술력이 회사의 매출을 세 배로 늘리면서 패션 하우스에 꼭 필요한 인물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갈리아노에게 디올이 가하는 압박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컬렉션을 제작하는 것은 브랜드의 레거시를 해치지 않는 방향에서 본인만의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어려운 과제였다. 1년에 2회씩 프레타 포르테 남성복, 여성복, 오트 쿠튀르, 액세서리 컬렉션, 그리고 1년에 한 번 선보여야 했던 시계 컬렉션까지.
허나 갈리아노는 몸이 두 개라도 된 듯 본인의 컬렉션도 쉬지 않았다. 그는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술과 마약에 의존했고, 이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앞서 언급했듯 2010년 술집에서 술에 잔뜩 취해 내뱉은 반유대주의적 폭언이 삽시간에 퍼지며 그의 명성은 한순간에 지옥으로 추락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프랑스에서 체포되고 벌금형을 받았으며, 디올에서의 직위를 잃고 심지어는 일부 LVMH의 소유였던 본인의 브랜드에서 해고당했다. 이러한 비난과 유죄 판결은 업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프랑스에서 사랑받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이 혐오 발언을 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당혹스러워했다. 경력, 명성, 지위, 모든 것을 잃은 그는 2011년 케이트 모스(Kate Moss)의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한 것을 제외하고는 3년 동안 모습을 감춘 채 지냈다.
안나 윈투어는 다시 한번 갈리아노의 복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오스카 드 라 렌타 (Óscar de la Renta)는 뉴욕 패션 위크에서 선보인 2013년 가을 기성복 컬렉션을 준비하기 위해 갈리아노를 뉴욕 스튜디오에 초대했다. 갈리아노는 무대 뒤에서 조용히 지냈지만, 드레이프 네크라인과 플레어 힙으로 디올 시절을 연상시키는 컬렉션을 다시금 완성했다. 일부에선 부정하지만, 오스카 드 라 렌타는 갈리아노가 패션 업계로 복귀하는 데 분명히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갈리아노는 조심스럽게 쇼에 복귀하는 동시에 2010년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이는 업계와 동료들로부터 용서를 얻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수많은 유감 표명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건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와 공개적인 설명을 피해 갈 순 없었다. 재기 후 패션 월간지 베니티 페어(Vanity Fair)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지만 “당시 떠오르는 가장 불쾌한 단어를 사용했다”고 언급하며 자신이 그런 불쾌한 발언을 하게 된 상황을 설명했다. 그의 노골적인 발언에 대해 업계와 명예훼손 방지 연맹과 같은 단체는 갈리아노의 사과 의지에 환영의 뜻과 이해를 표했다.
마틴 마르지엘라가 은퇴한 뒤 갈리아노는 메종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2014년에 복귀했다. 스트레스가 가득해 보였던 디올에서의 모습과 달리 마르지엘라에서 그는 좀 더 평온해 보였으며, 예술적 욕망을 100% 드러내며 흥분하기보다는 실용주의적인 접근법을 택했다. 존 갈리아노의 마르지엘라는 역사와 혁신의 조화를 유지하면서 디자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해체했고 이는 자연스레 하우스의 매출 증가로 이어졌다.
그리고 운명처럼 올해 1월, 파리의 다리 아래 열린 아티저널 컬렉션 2024로 패션쇼를 예술의 명작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역사에 획을 그은 직후인 이 시점, 절묘한 때에 그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했다. 두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코르셋, 관객에게 망설임 없이 다가가 맞추는 아이 컨택, 헤드피스와 글래스 메이크업까지. 모두 역사책에 기억되고, 박물관에 소장되고, 디자인 분야의 학생들이 훑어볼 유의미한 명작으로 세상을 뒤흔들게 된 것이다. 영화는 갈리아노 일생의 디자인을 추억함으로써 이번 컬렉션이 한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갈리아노가 오랫동안 쌓아온 철학의 결정체임을 말하고 있다.
영화는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회색빛 진흙탕 속에서 펼쳐낸다. 결단이나 판단에 도달할 필요 없이 광범위한 아카이브 영상, 갈리아노와의 인터뷰, 그리고 이 사건에 관련된 다른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경험과 미학, 커리어, 인간관계, 태도 그리고 그 안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 John Galli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