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익은 양귀비 꽃봉오리에 상처를 내면 하얀 즙이 흐른다. 그 덕분에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1906년 어제, 청나라는 양귀비에서 추출된 ‘만병통치약’ 아편의 거래를 금지했다. 그래도 대륙에 남은 그 향정신성 마약의 영향은 깊어 몇 년 전에도 국수 반죽에 양귀비씨 가루를 섞어 파는 소극적인 마약상의 사례가 보고된 적 있다. 그뿐만 아니라 당나라 현종을 손아귀에 쥐고 흔든 여인의 이름도 양귀비가 아니었던가. 양귀비는 진정 강하다. 그리고 그 꽃의 불어 명칭을 빌린 프로듀서 포에버 파보(Forever Pavot) 또한 강자다.
과거의 잔상을 쫓으며 60, 70년대 라이브러리 음악 등을 그리는 자라면 프랑스인 포에버 파보를 확인해야 한다. 지나간 날의 색이 짙은 그의 음악은 20세기에서 온 사절단이자 동시대인이 보내는 초대장이다. 그의 작풍은 아날로그 층과 현대적 층이 덧대어진, 신시사이저와 하프시코드 등이 어울려 나온 모양새다. 그리고 2014년 [Rhapsode] 앨범을 계기로 그와 협업 중인 본 배드 레코즈(Born Bad Records)의 수장 장-밥티스트 기요(Jean-Baptiste Guillot)는 파보의 음악을 기병대로 묘사하며 취향 차이를 뛰어넘는 프로듀서라 자랑스레 언급한 바 있다.
지난 10일, 본 배드 레코즈는 포에버 파보의 신작 [La Pantoufle]을 발표했다. 앨범명의 의미는 ‘슬리퍼’로 13개 트랙으로 바이닐 위를 휘적휘적 활보하는 그에게 걸맞다. 프랑스 언더그라운드 음악 전문 웹진 하트진(Hartzine)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듯, 스튜디오 작업을 사랑하는 그의 [La Pantoufle]는 숨길 수 없는 집념의 결정인 것. 본 앨범은 본 배드 레코즈 홈페이지에서 구매할 수 있다. 바이닐과 CD 중 개인의 취향에 맞는 매체를 골라보라. 장만하기 손색없는 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