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로 말하는 영화: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 맨”

영화는 시각과 청각이라는 두 가지 감각을 통해 전달하는 매체다. 각각의 감각 요소는 영화의 표현 수단이며, 이를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따라 영화의 목소리는 달라진다. 그중에서도 색은 시각 요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하나의 언어이다. ‘영화 장르는 톤(Tone)으로 구분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색은 분위기를 형성하고,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2002년에 개봉한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은 이러한 색채의 역할을 분명히 인지하고 응용한 좋은 사례다. “스파이더맨”에서는 주로 빨강, 노랑, 초록, 파랑 네 가지 원색이 영화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각각의 색은 상징하는 바가 있어 인물의 성격을 설명하고 사건을 암시한다. 

1. 인물과 변신

만화는 인물에 상징색을 부여해서 성격을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 영화의 원작인 만화 “스파이더맨” 또한 예외는 아니다. 영화는 원작의 매체적 특징을 의식하듯 주요 인물이 반복적으로 특정한 색상의 의상을 입고 등장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중에서도 주인공 피터 파커와 악당 노먼 오스본은 신체 변신과 함께 색채적 변화를 보여준다.

먼저 주인공 피터 파커를 보자. 일상에서의 피터 파커는 주로 푸른색과 회색 의상을 입고 등장한다. 진실하고 선할 때는 푸른색을, 소극적이거나 정의롭지 못할 때는 회색 옷을 입는다. 눈 또한 각각의 상태에 따라 푸른색 혹은 회색으로 비춘다. 이 두가지 색은 피터의 내적 갈등을 전달하며 그의 불완전성, 혹은 인간성을 드러낸다. 

피터 파커의 중심색

푸른색은 평온한 일상을 묘사할 때, 피터가 선하고 진실할 때 두드러진다. 피터의 방을 보면 벽지 또한 푸른색으로, 의상과 같은 계열이다. 옷과 방의 색조가 같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그의 모습이 사적이고 내면적인 모습과 일치한다는 뜻이다. 푸른색은 이렇게 간단히 선한 본성과 진실성을 설명한다.

피터와 그의 방

한편 학우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때 피터는 회색 옷을 겉에 입는다. 도서관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벤 삼촌의 조언을 무시할 때는 회색 후드티의 지퍼를 끝까지 잠가버린다. 이때 회색은 불안정한 정서 상태를, 잠긴 지퍼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을 암시한다.  

울고 있는 메리 제인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혼잣말을 할 때
벤 삼촌의 조언을 무시할 때

졸업 후, 뉴욕에서 살아가는 피터 또한 회색을 자주 입는다. 이는 대도시에서의 녹록지 않은 삶, 스파이더맨임을 숨기고 살아가고 있는 그의 모습을 대변한다. 직장에서 해고를 당했을 때, 메리 제인과의 관계가 진전되지 않을 때, 정의로운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을 때 그는 회색 셔츠를 입고 있다.   

해고되었음을 이야기하는 피터
메리 제인과 사귀고 있다는 해리의 고백을 듣는 피터

그러나 비일상의 피터, 즉 스파이더맨으로서 피터는 다르다. 그의 색채적 변화는 견학을 하러 간 연구소에서 신종 거미에게 물리면서부터 나타난다. 그곳에서는 여러 거미의 유전적 형질을 결합하여 장점만을 극대화하는 실험을 하고 있었고, 그렇게 개발된 거미 한 마리가 탈출하여 피터를 물고 만다. 이때 연구소 모니터에는 유전자 조작 시뮬레이션이 나오고 있는데, 잘 살펴보면 힘・속력・점프와 같은 특수 능력을 좌우하는 유전 정보가 빨강・파랑・초록으로 표시되고 있다.  

신종 거미의 유전 정보

거미에 물린 뒤 집에 돌아온 피터는 어지럼증을 느끼며 쓰러진다. 이때 뒤집어쓴 담요는 빨강, 노랑, 초록의 격자무늬다. 이는 영화 전반을 이루는 네 가지 원색 중 피터의 중심 색인 파랑을 제외한 나머지다. 본래 흰색이던 거미의 유전 정보가 원색의 특정 형질로 교체되듯 회색과 푸른색의 피터는 자신에게 없던 색을 덮는다. 그 또한 특수한 유전 정보를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종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스파이더맨”의 4원색 중 파랑을 제외한 빨강, 노랑, 초록색 격자무늬 담요를 덮은 피터 파커

변화 후, 갑작스러운 힘에 피터는 방황한다. 레슬링 상금을 타기 위해 거미의 힘을 함부로 사용할 때, 홧김에 강도를 도울 때 그에게는 푸른색이 없다. 빨강은 검정과 함께 쓰이며 피터의 강한 힘과 폭력성, 불의를 드러낸다.

레슬링장에서 대결을 벌이는 피터

방황을 마치고 진정한 스파이더맨으로 활약하는 그의 의상은 파란색과 빨간색이다. 선하고 진실한 피터의 푸른색과 강인한 힘의 붉은색이 조화를 이루게 된 것이다. 마침내 피터는 스파이더맨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한다.

스파이더맨으로 활약할 때의 모습

대형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영화의 주인공은 대개 붉은색과 푸른색이 들어간 옷을 입는다. 이 두 가지 색은 통계적으로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색이기도 하지만 성조기를 이루는 색이기도 하다. “스파이더맨”의 마지막 장면은 영웅과 성조기를 한 화면에 담으며 그의 붉고 푸른 옷이 미국을 상징하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시사한다.

슈퍼히어로 영화의 주인공은 비범한 힘을 갖고 있으며 이를 선량한 시민을 구하는 데 사용한다. 그들은 역경을 겪고 희생을 감내하며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전장에서는 화려한 액션을, 일상에서는 인간미를 보이며 관객의 호감을 끌어낸다. 이분법적인 선악 대결 구도는 영웅을 선으로, 대결 상대를 악으로 여기도록 유도한다. 이로써 슈퍼히어로 영화는 폭력을 정당화하고 극소수의 영웅의 힘으로 사회를 지킬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이는 그 자체로 경계해야 할 위험성을 안고 있는데, 영웅이 미국과 동일시되며 문제는 더욱 불거진다. 도시를 지키기 위해 적과 대결하는 영웅의 모습은 평화를 명분으로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려는 미국의 욕망과 닮았다. 그러나 세계는 뉴욕이 아니고, 미국은 자본과 무력의 권력을 세계 평화에 대한 책임감(Great power comes with great responsibility)으로 포장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시각적 요소를 통해 녹아든 정치적 메시지는 명제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새도 없이 자연스럽고 은밀하게 관객에게 전달되고 만다.

성조기와 스파이더맨

한편 악당인 노먼 오스본 또한 변신과 함께 색채적 변화를 보이는 인물이다. 영화 초반, 일상의 노먼은 피터와 마찬가지로 푸른색으로 표현된다. 노먼이 처음으로 등장할 때의 의상을 살펴보면 감색 외투에 하늘색 셔츠를 입고 푸른 타이를 매고 있다. 눈 또한 푸르다. 이 옷을 입고 그는 다정한 아빠, 성공한 사업가, 지적인 과학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푸른 의상은 신뢰할 수 있는 성격과 지성을 강조한다.

노먼 오스본의 첫 등장

그러나 인체 실험을 기점으로 그의 색채는 바뀌기 시작한다. 노먼은 사업적 압박에 시달린 나머지 무리하게 자신을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다. 실험은 초록 벽의 오스본 사 연구실에서 초록색 약물과 기구로 진행된다. 성급한 실험은 실패로 돌아가고, 노먼은 정신 이상과 공격성 증가와 같은 부작용을 겪는다.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그의 눈은 녹색이다.

실험 이후 노먼에게는 붉은 계열과 색상과 노란 계열의 의상이 추가된다. 겉옷은 푸른빛이 돌지 않는 짙은 검은색이다. 커다랗고 검은 외투는 그가 변화한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감출 필요가 없어지면서 정서도, 색상도 달라진다.

변화 이후 평소의 노먼

혼자 있을 때 노먼은 자아의 혼란을 겪는다. 실험의 부작용으로 탄생한 악한 자아, 그린 고블린은 평소에는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이따금 노먼은 자신의 방에서 고블린 가면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는 목소리를 환청이라 치부하며 악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이때의 노먼은 빨강, 초록, 파랑의 복잡한 무늬가 그려진 가운을 입고 있다. 화려하게 얽힌 원색의 가운은 피터가 뒤집어쓴 격자무늬 담요와 대조되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갈등하는 그의 심리를 그린다.

혼자 있을 때의 노먼

내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노먼은 때때로 이성을 잃는다. 그는 그린 고블린이 되어 경쟁사를 파괴하고,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기업 간부들을 죽이고, 선량한 시민을 다치게 하며, 스파이더맨을 협박한다. 그린 고블린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자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초록색이다. 녹색은 전통적으로 독극물을 나타내는 색이다. 또한, 녹색은 자연의 색 즉 본능의 색으로 파랑으로 표상되는 이성의 반대에 서 있다.  녹색은 변화된 위험성, 본능에 눈을 뜬 공격성, 이성을 저버리고 타락한 도덕성을 드러낸다.

그린 고블린

그린 고블린의 갑옷을 조금 더 살펴보면 전반적으로 녹색을 띠는 가운데 보랏빛으로 그림자가 지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스파이더맨”에서 빨강과 파랑은 균형잡힌 힘과 정의, 선 등을 뜻한다. 이러한 빨강과 파랑의 혼합색인 보라색은 그린 고블린이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혼란스러운 존재임을 내비치고 있다. 녹색의 갑옷에 반사되는 노란 빛과 노란 유리 눈은 위험성을 암시한다. 그린 고블린은 말 그대로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며 이 색안경은 노란색으로, 위험한 시각을 나타낸다.  

한편 노먼의 방을 보면 벽과 기둥이 모두 짙은 녹색이며 녹색 가구와 소품도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이는 그의 내면에 잠재한 초록, 곧 악을 나타낸다. 흥미로운 것은 이 방을 방문하는 아들 해리가 자주 어두운 녹색 의상을 입고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해리도 그와 마찬가지로 잠재된 악이 있다는 암시로, 이어지는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위한 복선이 된다. 

노먼 오스본의 방과 해리 오스본

2. 사건과 암시

공간은 사건을 통해 장소가 된다. 영화 내 공간은 가공된 것이며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스파이더맨”의 장소는 색을 통해 사건을 말한다.

노랑은 위험이 등장하기 전 나타난다. 미끄러져 넘어지는 것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위험 앞에서 장소는 노란색을 품고 있다. 노랑은 눈에 띄기 때문에 실생활에서도 무언가를 경고할 때 자주 쓰이는 색이다. “스파이더맨”에서 노랑은 관객이 위험을 눈치챌 수 있도록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피터가 거미에 물릴 것을 암시하는 연구소 실내
메리 제인이 밟고 미끄러지는 노란 주스
벤 삼촌에게 생길 위험을 암시하는 자동차의 색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도시, 뉴욕

초록은 불길한 일과 함께 발견된다. 그린 고블린의 탄생지인 오스본 회사는 온통 회색과 초록색이다. 회사 전반에 퍼진 회색은 산업적인 분위기를 배가시키고 초록은 앞으로의 불길한 앞날을 예고한다.

노먼 오스본의 회사 OSCORP
회사 내부에서 벌어지는 실험

그린 고블린이 경쟁사를 습격할 때는 연구원의 얼굴에 녹색 빛이 드리운다. 녹색을 마지막으로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피터와 해리, 메리 제인의 졸업식도 녹색으로 꾸며져 있다. 졸업 후,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세 명의 인물은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고난을 겪게 된다. 피터는 본격적으로 영웅 행세를 하며 각종 역경을 맞이한다. 메리 제인은 브로드웨이에서 연기하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종업원 생활을 하며, 노먼에게 무시를 당한다. 해리는 메리 제인과의 원활하지 못한 관계, 피터에 대한 질투,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 등으로 불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낸다. 졸업식의 초록은 세 인물의 불길한 앞날을 한발 앞서 예고하고 있다.

죽음 직전 연구원의 얼굴을 비추는 녹색 빛
초록으로 가득한 졸업식

노랑과 초록이 함께 등장할 때는 폭력이 존재한다. 학교에서 플래시가 피터에게 주먹을 휘두를 때 그가 입은 옷은 노랑 바탕에 초록색 줄무늬다. 싸움의 원인이 되는 옥수수 샐러드는 노란색으로, 이와 같은 위험을 미리 경고하고 있다. 피터가 돈을 벌기 위해 참가한 레슬링 대결장도 노랑과 초록으로 꾸며져 있다.

노랑 바탕에 초록  줄무늬가 있는 옷을 입은 플래시. 등에 묻은 음식은 노란색이다.
폭력이 유희로 존재하는 레슬링장

피터가 벤 삼촌과의 페인트칠 약속을 어긴 날을 보자. 벽이 녹색으로 칠해져 있는 가운데 덩그러니 벽에 붙은 노란 전화기가 눈에 띈다. 이후 벤 삼촌은 피터가 부재한 동안 강도 살해를 당한다. 피터가 없을 때 칠해진 초록 벽은 불행을 암시하고 함께하는 노랑은 그 불행이 위험하며 폭력적일 것임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 불행은 약속을 어겼던 날처럼 피터가 그의 곁에 없을 때 일어난다.  

이처럼 색은 인물을 설명하고 사건을 암시하여 영화를 보다 풍부하게 만든다. 그러나 색은 영화가 사용하는 수많은 언어 중 하나일 뿐이다. 영화는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종합 예술로, 장면 장면 수많은 암호를 숨겨둔다. 감춰진 영화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보자.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듯, 영화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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