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무언가를 좋아하게 된 계기를 물어왔을 때 단박에 대답할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청산유수겠지만 우리 기호 중 몇 가지는 때때로 환경과 우연에 의해 형성되기에 정확한 이유를 찾기 힘들 때도 많다. 가끔은 왜 좋냐는 질문에 그냥이라고 돌아오는 답변이 가장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번에는 어느 날 눈길을 끈 옷 하나가 인생의 방향성에까지 영향을 끼친 이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냥 끌리는 곳으로 향하다 보니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 음악과 티셔츠의 공통분모, 디자인에서 생산공정까지 어쩌면 티셔츠와 가장 밀접한 곳에서 근무하게 된 ‘Bem’의 문바(@munba13)는 과연 어떤 길을 거쳐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그 대답은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혜성 (@munba13)
2000년도 중반, 나는 강원도 강릉에서 인터넷으로 국힙 시디를 주문하던 고등학생이었다. 여느 때처럼 힙합 플레이야와 디씨 트라이브를 눈팅하던 중 우연히 다코너(DAKORNER)라는 온라인 숍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BURUMARBUL’이라고 적혀있는 티셔츠가 너무 멋져서 뭔지도 모르고 구매했던 기억이 난다. 알고 보니 360 사운즈를 운영하시는 분들의 브랜드였다! 촌동네에 살던 나는 아티스트들이 자신들만의 브랜드와 티셔츠를 제작해서 판매하는 광경을 처음 본 것이었다. 요즘이야 티셔츠 굿즈가 대형 레이블부터 개인 아티스트 할 것 없이 많은 곳에서 만들어지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것들이 많이 없었던 때라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를 계기로 나도 언젠가 티셔츠를 인쇄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AAA 1301 블랭크 티셔츠를 처음 접하게 된 것 역시 ‘BURUMARBUL’ 티셔츠를 통해서였다. 핏도 처음 보는 USA 핏에 원단도 빳빳하고 예쁜 색도 많고. 물론 퀄리티가 아주 대단한 수준은 아니지만 DIY 티셔츠 인쇄를 준비하던 나에게는 정말 좋은 베이스 모델이 되어주었다. 동대문 무지 티셔츠 구입할 돈에 약간 더 보태서 글로벌 스탠다드로서 해외 뮤지션들이 만드는 티셔츠와 동일한 족보 있는 모델을 사용한다는 뿌듯함을 얻을 수 있으니! 그냥 무지로 입기에도 훌륭해서 큰 사이즈로 주문해 인쇄를 하지 않고 디키즈 874와 함께 입으면 마치 캄튼의 더 게임(The Game)이 된 듯한 기분도 느낄 수 있었다.
대학교를 서울로 오게 되어 밴드도 하고 티셔츠 인쇄업자의 꿈도 계속 키워갔다. 지하 2층의 비어있던 밴드 합주실을 점거해서 실크스크린 연습을 하던 때였는데, 평소 존경하던 밴드 스컴레이드(SCUMRAID)의 이주영님이 기획한 ‘2014 THE MORE I SEE’ 공연의 티셔츠 의뢰가 들어왔다. 전부 다른 색의 AAA 무지 티셔츠 50여 장을 당시 한남동 어딘가의 언덕에 위치했던 샵에스더블유에서 구입해 박스째로 들고(그땐 퀵 부르는 방법을 몰랐다) 작업실에 가져와 양면으로 인쇄했던 기억이 난다. 공연 날 클럽 바다비에 있던 펑크들과 관객들이 내가 인쇄한 티셔츠를 입고 있는 것을 보고 너무 기뻤다. 나도 이 신(Scene)에서 무언가 역할을 할 수 있구나 하는 뿌듯함이었던 것 같다.
아티스트의 티셔츠를 입는 것은 즐겁다. 요즘엔 메탈 티 유행으로 사람들이 아이언 메이든이나 메탈리카를 입고 돌아다니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고, 조이 디비전의 유명한 그 티셔츠는 이젠 밈으로 소비되고 있다. 보세 옷가게에서 베놈이랑 다크 쓰론의 티셔츠를 파는 걸 봤다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은데… 티셔츠에 새겨진 아티스트의 음악을 진짜 좋아해서 입는 것도 좋지만, 모르고 입는 것도 뭐 어떤가? 그래픽이 좋았다면 그것만으로도 좋고, 이 티셔츠의 근본은 무엇일까 궁금해서 유튜브에 검색해서 노래를 찾아 듣고 ‘어 좋네?’ 하고 그들의 팬이 될 수도 있고, 더 과몰입하면 자신도 음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밴드를 결성할지도 모르고, 나처럼 더 과몰입해서 티셔츠를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티셔츠를 구입한 사람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어쨌든 끼치게 되는 것 같다.
티셔츠 인쇄를 시작한 지도 어느덧 7년 차가 되었다. 밴드 할 시간은 없어 그만 둔지 오래고, 몇 년간 외주 인쇄만 하다 보니 나의 것을 한 지 오래되어 이래저래 시들하던 참에 요즘엔 실크스크린 판 작업을 하다 남는 공간에 아무 말, 아무 그림, 트위터에서 본 웃긴 것들을 떠서 MOLAR에서 판매하기 시작했다. 안 팔릴 것 같은 건 나 혼자 입기도 하고… 역시 딴짓이 제일 재미있는 듯… 아무튼 블랭크 티셔츠는 인쇄되는 그림에 따라 완전히 다른 스타일로, 완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소비되는 것이 재미있다. 프린팅 티셔츠가 싫은 사람에겐 저렴한 무지 내의로 활용될 수 있겠다… 요즘엔 결국 ‘GILDAN ULTRA COTTON’이 최고의 블랭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