얽매여있을 때 오히려 이루고자 하는 바와 멀어지는 것들이 있다. 최근 창작 직군에서 시도 때도 없이 요구되는 ‘크리에이티브’가 그렇다. 특히 이 분야의 일은 시간을 들이는 대로 결과물이 나오는 게 아닌 만큼 성과에 집착하다 보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고, 그저 헤쳐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피곤한 ‘업무’가 되어 버리고야 만다. 그렇게 타성에 젖은 루틴을 반복하다 보면 본인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일에서도 쉽게 권태감이 들기 마련이다.
사실 어떤 영역이든 막연한 기대감을 심어주는 일의 대부분은 실제로 경험할 때 예상과는 다른 혹독한 경우의 수를 드물지 않게 선사할 것이라 추측해본다. 이런 데서 오는 지겨움이 심해질 경우 ‘크리에이티브 어쩌고….’처럼 번지르한 말을 갖다 붙인 단어나 전문 용어들을 만나면 괜스레 화가 날지도 모른다 ㅡ 본인이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님을 밝혀둔다 ㅡ . 패션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필자는 비슷한 생각을 해봤을 법한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해당 기획에서 그 거추장스러운 것들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무심의 경지에 이른 사람의 이야기 또한 다룰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 왔다. 그리고 사무실 전방 1m도 안 되는 자리에서 매일 접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그 희망사항을 그대로 반영해줄 비장의 카드라 여겨왔다. 아래 VISLA 매거진의 편집장 권혁인의 인생/패션 이야기는 반복되는 경쟁 사회에 따분함을 느꼈을 독자들을 복잡한 인파의 도심, 잘 정돈된 보도블록보다는 진흙 냄새가 나는 단출한 산책로로 이끄는 듯하다. 직접 읽어보자.
권혁인(kwonthechief)
옷으로부터 개인적인 취향이나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는 ‘Wear are you from?’ 에세이를 통해 에디터가 나라는 사람에게서 끄집어낼 수 있는 특별한 캐릭터라면, 아무래도 나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이들은 잘 알고 있을 법한 평소 내 모습, 즉 패션이나 트렌드에 심드렁한 나머지 다분히 고루한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는 데서 업계의 여타 멋쟁이들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촌스러움일 것이다. 그 의도에 순순히 응해주고 싶으면서도 지금까지 기획에 참여했던 글쓴이들과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 같아 이렇게 팔자에도 없을 ‘옷에 관한 개인적인 글’을 시작하려 한다.
10대부터 20대 중반까지 여러 매체에서 접한 인상적인 인물의 외양이나 그들이 착용한 의류 같은 것을 열심히 찾아보며 나 역시 나에게 제법 잘 어울리는 스타일을 만들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물웅덩이를 첨벙첨벙 걸어가며 맥주병을 던지던 타일러 더든부터 고개를 기우뚱 숙이고 담배를 꼬나문 채 피아노를 연주하는 톰 웨이츠, 스케이트보딩이 지금 시대의 가장 멋진 라이프스타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게 만든 제이슨 딜까지 주로 남성성이 돌출되는 인물들의 스타일이야말로 왠지 모르게 정답처럼 느껴지곤 했다. 지금에 와 돌이켜 보면 학교 수업에서 괴리감을 느끼던 나는 당시 마치 삶의 오아시스라도 찾아 헤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차오르는 나이와 함께 홀로서기라는 거대한 미션의 압박을 받으며 점차 동경하던 인물과 그들의 패션에서 결국 멀어지고 말았다. 실수를 연발하고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깨지길 반복하는 사회 초짜의 인물상 같은 건 내가 바라보던 세계의 쿨(Cool)에는 해당하지 않았기에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어떻게 억눌러야 할지 잘 몰랐다.
몇 년 사이 삶의 목표는 어떻게든 버티기로 변해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속된 말로 이 바닥의 민낯을 맞닥뜨리곤 했는데, 그것은 허울뿐인 삶을 영위하는 이들이 보기보다 더 많다는 사실이었다. 특별한 롤모델이나 이상향 같은 건 없었지만 화려함 뒤에 가려진 이면 또한 보고 나니 ‘그들처럼 되지 않는 것’이 자연스레 이정표 아닌 이정표가 되었다.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이상 어느 분야나 예외는 없겠지만, 내가 속한 곳 역시 욕망과 허영 그리고 권력을 향한 의지가 빠른 변화의 물살을 타고 흐르는 곳이라 잠시라도 행로에서 이탈했다간 도태되기 십상이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돈은 취향을 살 수 있고 취향은 곧 계급이 되었기에 이곳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이들은 대부분 필연적으로 피라미드의 정상을 향해 내몰리는 구조 안에서 숨을 쉬고 있다. 항상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듯이, 목적을 위한 삶보다는 그 삶 그 자체의 예측불가한 마력에 끌린다는 듯이 산다고 믿어왔지만 짧지도 길지도 않은 지난 8년, 하루하루를 되돌아봤을 때 나의 선택은 가장 속물적이고 정치적인 형태로 스스로를 속박했던 건 아닐까 자문해 본다. 과연 꿈꿔왔던 창의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문화라는 거대한 급류에 일개 조각으로 휩쓸려온 나는 이전에 바라보던 쿨한 인물들과는 많이 다른 사람이 되었다. “만일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을까. 과연 내면에서부터 증언할 수 있을까”.
그렇게 타일러 더든과 톰 웨이츠와 제이슨 딜의 아우라는 신기루가 되었다. 오늘도 무수한 패션 브랜드와 인플루언서가 내 피드를 맴돌고 있지만, 이제 들뜨거나 조급하기보다는 그러려니 하고 만다. 멋진 사람들의 세계에 속하고 싶던 나는 우습게도 괴리감을 느꼈던 그 학생 때처럼 또다시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고 있다. 앞서 한 말과는 역설적이게도 요즘에는 닳은 신발을 버리고 새 걸 사기도 전에 또 그럭저럭 다른 하나를 브랜드에서 증정받고 그렇게 번갈아 신으며 나름 신발 걱정은 하지 않고 산다. 빈티지라는 말을 붙이기에도 민망한 쇼핑몰에서 간혹 70% 세일을 공지할 때면 미리 봐 두었던 헌 옷 떼기 같은 것도 사며 만족감을 느낀다. 근근이 레코드 판을 사 모으는 취미도 생겼다. 별 볼일 없어도 이것이 지금 내 패션의 사이클이니 혹시라도 어떤 옷을 소개할까 궁금증을 가진 독자가 있다면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애초에 힘주어 말할 만큼 쌓아 올린 취향이나 브랜드가 없다. 단지 싫은 것들만 존재할 뿐이며, 그것은 특정한 범주 안에 넣기에는 굉장히 즉흥적이라 다수의 흥미를 끌 만한 요소도 되지 못한다. 다만 앞서 구구절절 늘어놓은 지난 몇 년, 시간의 조수를 타고 흘러오며 획득한 개인적인 스타일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소비 위 더 나은 소비, 취향 위 더 좋은 취향이라는 미명으로 끊임없이 내 등을 떠밀었던 암묵적인 피라미드 행렬에 더는 ‘동참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