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베를린의 오스트크로이츠(Ostkreuz)부터 트렙토워 파크(Treptower Park) 사이 ‘마크그라펜담(Markgrafendamm)’에는 어바웃 블랭크(://about blank), 레나테(Renate)와 엘제(Else), 오스트(Club OST), M01 등의 여러 클럽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콜렉티브가 자리한다.
지난 9월 2일, 이 지역에서 약 20,000명의 시위자들이 모여 거리를 점거하며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었는데, 베를린 클럽을 지원하는 비영리 단체 ‘클럽 커미션(Club Commission)’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A100 Wegbassen!’였다. 이는 독일의 아우토반 100(Autobahn 100) 고속도로 확장 공사에 반대하기 위한 시위로, 현재 16번째 단계의 공사가 진행 중이며, 8억 유로가 더 들게 될 17번째 단계에 마크그라펜담이 포함된다.
지역 거주민, 베를린 클럽 문화를 사랑하는 레이버, 기후 활동가 등이 자발적으로 모인 이 시위는 독일 주요 언론에도 소개될 정도로 큰 반향을 낳았다. 음악과 춤, 술이 함께 하는 레이브 데모는 사회 운동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 베를린의 ‘A100 Wegbassen!’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는가. 베를린에서 13년째 거주 중인 활동가이자 아티스트 ‘lovenpiss’와 나눈 이야기를 아래에서 확인해 보자.
간단한 소개 부탁한다.
2011년에 베를린으로 이주해 현재 한식을 요리하고 가르치면서 필명 ‘lovenpiss’로 활동하고 있다. 베를린 시가 지원하는 아트 레지던시와 파트너십을 맺어 문화예술 이벤트를 기획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경험을 바탕으로 베를린의 문화, 예술, 정치, 철학이 담긴 기사를 기고한다. 한국 정부나 업계 관계자를 상대로 통번역과 가이드를 하기도 하고.
이번에 시위가 열린 마크그라펜담에 거주 중이다. 이곳은 문화적으로 어떤 가치를 지닌 동네인가?
마크그라펜담은 베를린 동쪽에 위치한 문화예술의 중심지, 즉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 노이쾰른(Neukölln), 프리드리히샤인(Friedrichshain)의 가운데에 있는 지역으로, 클럽과 콜렉티브 등 여러 문화 공간이 속해 있는 지역이다. 이곳은 문화예술의 다양성을 품고 있으며,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띠어 보수정당이 한 번도 승리한 적이 없다. 10년 전에는 지역운동을 통해 몇 안 되는 네오나치들을 베를린 외곽으로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최근 몇 년간 재개발을 시작한 곳이 있지만 오히려 지역 거주민들과 클럽, 문화공간이 자발적으로 지역 운동조직을 만들어 격렬히 항의한다. 예를 들어 마크그라펜담 바로 옆에 IT 캠퍼스가 주민설명회 없이 들어와 건축을 시작하자 250여 명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저항 네트워크를 조직했다.
클럽 인근 거주민으로서 느낀 주변의 소음은 어떠한가? 또한 주변 이웃들은 클럽에서 발생하는 소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어바웃 블랭크(://about blank)와 레나테(Renate) 사이에 위치한 집에서 느끼는 주말 소음은 생활에 불편을 끼칠 정도는 아니다. 클럽들은 대개 주말에만 열고, 파티가 열리는 날에도 한밤중이 되면 주민들을 위해 야외에서 실내로 옮기면서 소음을 조절하고 있다.
인근에 클럽 베억하인(Berghain)이 위치하고 있어 타 지역 거주민이나 투어리스트 등 외부인이 많이 방문하는 지역이다. 베를린 역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10년 동안 이를 몸소 느끼고 있는가?
1998년 겨울부터 2011년 가을까지 홍대 앞 공연장을 다니면서 젠트리피케이션을 몸소 느낀 적 있다. 2011년의 베를린에서도 그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번화가에 반지하 레스토랑[1], 바, 옷가게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도, 들어선 상점이 반년도 채 되지 않아 바뀌는 홍대만큼은 아니었다.
그런데 2015년부터는 상황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1년 중 대부분이 공실인 휴가용 별장, 관광객을 주 타깃으로 하는 상점들, 숙박업 등록 없이 탈세로 돈을 버는 에어비앤비 숙소는 가파르게 월세를 올렸다. 2011년 서베를린의 모아빗(Moabit)에서 36m3 크기의 원룸(주방 및 화장실 별도)이 350유로 정도였다면, 오늘날 월 1천 유로는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에 부동산 회사의 자산을 몰수하라는 급진적인 구호와 함께 대규모의 반-젠트리피케이션 시위가 생길 정도였다.
A100 고속도로 확장은 클럽 생태계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가?
고속도로가 들어서면 지반이 약해져 주변 건물을 모두 철거해야 한다. 먼저, 어바웃 블랭크, 레나테, 엘제, 오스트, M01 등의 클럽이 사라진다. 이 클럽들은 베를린 전체에서도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바와 야외극장, 콘서트홀 등을 갖춘 독립영화관 ‘Zukunft’, 로컬 바 ‘Zuckerzauber’, 칵테일 바 ‘Krass Böser Wolf’, 스케이트파크 ‘E-Lok’, 트레일러 거주자 문화공동체 ‘Fips E.v.’와 정원 ‘Laskerwiese’까지, 문화예술공간 총 11곳이 사라진다. 이는 ‘Ostkruez’ 지역의 문화기반의 절반이 통째로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시위의 주요 참여자는 어떤 사람들이며, 정치권 및 베를린 시의 반응은 어떠한가?
지역 거주민, 레이버, 기후 활동가 등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서로 다른 우리들’이라는 구호 아래에 힘을 합쳤다. 클럽과 문화 공간 관계자들이 사운드 시스템과 차량을 제공했고 베를린의 로컬 디제이들이 플레잉했다.
이 지역은 녹색당(Grünepartei)과 좌파당(Linkepartei)과 같은 진보정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한다. 그러나 이번 시위는 정당이 주도하기보다는 지역 거주민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졌다. 집권여당이자 좌파정당인 독일사회민주당(SPD)은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는데, 이에 재개발 회사에게 로비를 받았다는 이야기까지 돌고 있다. 보수정당은 자신들이 절대 지지받을 수 없는 이 지역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그러나 베를린 시는 A100 고속도로 확장을 끝내 밀어붙일 생각인 듯하다. 주택가 사이에 고속도로를 내야 할 정도로 마크그라펜담의 교통량이 많은 것도 아니다. 말도 안 되는 계획이다.
시위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무엇인가?
레이브 데모의 분위기가 놀라울 정도로 비폭력적이었다. 베를린에서는 아직까지 노동절이 되면 화염병을 던지고 투석전을 하는 등, 과격한 시위를 하기도 한다. 2008년 등록금 인상 반대 시위에서는 학생들이 철도를 점거했다. 2017년 함부르크에서는 10만 명이 모여 “(G20에서 경제위기를 불러온 주범인) 기업과 정치 카르텔을 처벌하라”며 평화시위를 했지만 한편으로는 경찰차와 럭셔리 차량을 불태우기도 했고, 주민들은 시위대에 물과 옷, 의료품을 제공했다.
이번 시위에서는 대부분이 동네 거주민이기 때문에 동네를 사랑하는 마음이 돋보였다. 다 마신 맥주병은 마치 주술 의식을 치르는 제단처럼 가지런히 세워놓고, 어린이들도 방음 헤드셋을 착용하고서 남녀노소 모두가 화합하며 테크노와 하우스 음악에 춤을 추었다. 클럽에서 지원한 강력한 사운드 시스템은 온 사방에 깨끗한 음질의 음악을 우렁차게 뿜어냈다. 마치 음원을 듣고 있는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주최 측은 시위 참여자의 안전을 위해 섬세하게 여러 가지를 준비했다. 주변에 공용 화장실이 극히 드물어 주최 측에서 간이 화장실을 넉넉히 설치했으며 위생을 위한 손 소독 부스도 있었다. 또한 콘돔을 비치하고 안전요원들도 배치했다. 경찰은 마약 단속을 하지 않았고, 시위대를 함부로 통제하려 들지도 않았다. 슈퍼마켓이나 길거리에서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이웃들과 함께 춤추고 연대하며, 우리가 훗날 다음 세대에게 전해질 역사적인 순간에 있음을 직감했다.
기억에 남는 피켓 문구가 있다면?
- CARpitalismus, abwracken! (자동차-자본주의 해체하라!)
- HALLO, SPD! Keine A100 durch Xhain! (안녕, 사민당! 크로이츠베르크-프리드리히샤인을 통과하는 A100 고속도로 따윈 없어!)
- A100! DU HEUTE NICHT (A100 고속도로야! 너는 오늘 못 들어가): 베를린 클럽 베억하인(Berghain)의 바운서 스벤(Sven Marquardt)의 대사를 패러디한 것.
- Nie, nie, nie wieder Autobahn! (절대, 절대, 절대 다시 고속도로는 안돼): 네오나치 반대 시위에서 외치는 구호를 변형한 것.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2000년대 중반 펑크 친구들과 시위를 자주 다녔을 때, 시위 현장에서 비장하게 울려 퍼지던 “(죽음으로) 맞서서 투쟁하자”는 민중가요처럼 시위의 분위기는 대체로 경직된 편이었다. 물론 나도 그 민중가요를 좋아해 곧잘 따라 부르곤 했지만, 한편으론 각오만 강요받아 사라지는 젊은 활동가들과 참여를 망설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문화로 바꿀 수 없을까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기후 활동가, 클럽, 레이버, 지역 거주민 등, 모두 다른 이름의 우리들은 각자의 입장이 다르다. 모두가 비폭력을 지향하면 좋겠지만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하는 것 또한 보장되어야 한다. 우리에겐 화염병보다 강력한 문화예술이란 무기가 있지 않나. 철학, 정치와 함께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매우 강력한 무기가. 예술가와 뮤지션이 참여하는 시위는 다양성의 가치를 포용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뜻을 모으게 한다. 이처럼 고도로 발달한 시위는 레이브와 구분할 수 없다.
이미지 출처 | lovenpi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