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부흥을 이끌 로컬 블랙/데스 메탈 밴드 4

2018년 일본에서 출판된 ‘한국 메탈 대전: 데스메탈 코리아’의 표지.

유튜브(YouTube)에 ‘붐은 온다’라는 키워드를 검색해 보면 ‘전자양 붐은 온다’, ‘해서웨이 붐은 온다’ 등 각종 언더그라운드 혹은 인디 밴드에 대한 수식 표현으로 사용되는 현황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밴드 붐은 온다’라고 비교적 덜 알려진 국내 록 밴드를 소개하는 채널도 존재하지만, 메탈 밴드와 관련된 콘텐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단면적인 사례긴 하지만,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국내 메탈 신(scene)과 밴드에게 주어지는 공개적인 관심은 거의 전무한 수준이다. 그나마 1980, 90년대에 시나위나 백두산 같은 헤비메탈 밴드가 활약하면서 입지가 살짝 생겼고 N.EX.T나 부활 모두 헤비 혹은 스래쉬 메탈 풍의 곡을 내놓긴 했지만, 전반적인 음악 스타일이 메탈에 해당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늘날 메탈의 하위 장르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성향을 지닌 익스트림 메탈의 국내 인지도는 처참한 수준이다. 밴드가 주기적으로 연주를 선보일 수 있는 메탈 공연장이 매우 적을뿐더러 1년 안에 발매되는 앨범이 총 100개를 넘을까 말까 한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았을 때, 환경적인 한계와 자생적 요인이 뒤엉켜 이러한 상황이 빚어진 듯하다. 이러한 척박함에도 불구하고 독창적인 음악을 만들어 내며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익스트림 메탈 밴드들이 있다. 단명하는 한국 메탈 신의 특징을 고려해 공개적으로 활동을 중단한 밴드를 제외,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는 블랙 및 데스메탈 밴드를 중심으로 작성해 봤다. 또, 다크 미러 오브 트래지디(Dark Mirror ov Tragedy)와 같이 해당 밴드에 관한 정보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밴드 역시 목록에서 제외했다.

세 사람이 모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든다는 말이 있지 않나. 언급된 밴드에 매료된 이가 한두 명이라도 생긴다면 ‘블랙/데스메탈의 붐도 곧 올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작은 희망을 전해본다.


매드맨즈 에스프리

2010년 서울에서 결성된 매드맨즈 에스프리(Madmans Esprit)는 사진이나 무대 영상만을 봤을 때 비주얼계 록 밴드라고 착각하기 쉽다. 화려한 메이크업과 현란한 바디 액세서리, 다채로운 헤어 스타일은 대중에게 그나마 잘 알려진 일본의 엑스 재팬(X Japan)나 디르 앙 그레이(DIR EN GREY)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매드맨즈 에스프리가 표방하는 음악은 일반적인 비주얼계보다 몹시 심오하고 잔혹하다.  

어린 시절부터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음악을 접했던 규호는 1인 밴드로 매드맨즈 에스프리를 시작했고, 2014년에 정규 1집 [NACHT]를 발표한 후 잠정적으로 밴드 활동을 중단하며 베를린으로 떠났다. 약 4년 동안 유럽 각지에서 현지 음악가들과 합주하고 투어를 다닌 규호는 한국으로 돌아와 2018년에 두 번째 정규 앨범 [무의식의 의식화]를 발표했다. 한국에서 ‘자살블랙’이라 불리기도 하는 DSBM(Depressive Suicidal Black Metal)의 장르적 특징인 고독함과 내면적 상처에 대한 느낌이 강한 첫 앨범과 달리, 두 번째 앨범은 존재론적인 고민과 창작자로서의 광기가 더 전면에 드러난 듯하다. 그로울링[1]과 스크리밍, 클린 보컬을 넘나드는 보컬은 매드맨즈 에스프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우울함과 처절함을 표현하기에 가장 탁월한 무기로도 보이며, 이러한 의식화는 최근의 작업물까지 이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지난 1월에 파격적인 뮤직비디오가 공개된 “Idon’tknowwhoIambutthesexgoeson”은 단순히 도발만을 위한 선정성이 아니라 상업 자본주의 시대에서 성적 주체이자 타자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진중한 고민이 담긴 곡이다. 매드맨즈 에스프리만의 뾰족한 기조를 더 알아보고 싶다면 2023년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메탈&하드코어 음반을 수상한 정규 3집 [나는 나를 통해 우리를 보는 너를 통해 나를 본다]의 첫 번째 곡 “죽었으면”을 추천한다. 전반적으로 아스트랄한 이미지로 구성된 뮤직비디오에는 그래픽한 자해 장면도 포함되어 있으니 이에 주의하면서 시청하길. 2월 15일에는 메탈 코어에 데스메탈을 접목한 데스코어의 영향이 분명한 새 싱글 “墜落(추락)”을 발표할 예정이라니 이 또한 기대해 봐도 좋겠다.

Madmans Esprit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


그슨대

한국의 전통 요괴 그슨대는 ‘그늘짐’과 ‘큰 것’이 합쳐진 이름으로,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거대한 물체라는 뜻으로 풀어볼 수 있다. 민속적인 향취가 느껴지는 이름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그슨대는 2000년대 초반 국내 블랙메탈 밴드 다크 앰비션(Dark Ambition)가 시도했던 토속 블랙 메탈의 계보를 어느 정도 이어받거나 최소 그러한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공식 밴드캠프에서 베이스 크레딧은 ‘도깨비(Tokkabi)’, 기타 크레딧은 ‘헛깨비(Hutkkabi)’로 확인되는 데다 표지는 도깨비를 연상시키고 첫 번째 트랙의 제목부터 ‘喪輿歌(상여가)’라는 점 또한 그슨대의 콘셉트-력을 강조하는 데 기여한다. 판소리의 한 대목이기도 한 ‘이별가’를 뜻하는 세 번째 트랙은 제목에서부터 아예 전통 음악을 차용하는데, 곡의 후반부에서 모든 악기를 걷어내고 조악한 노이즈 위에 올라간 보컬과 목탁을 두드리는 듯한 흐름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음산하고 훌륭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슨대가 블랙 메탈에 국악을 자신 있게 접목하고 전체적인 앨범을 그 관념에 맞게 일관적으로 제작한 것만큼 전체적인 결과가 조화롭지는 않다는 것. 현재로서는 전통 음악이 샘플된 부분과 블랙 메탈 사운드가 적절하게 혼합된 양상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으나, 주제 의식이 신선한 만큼 미래 행보가 기대되는 바이다. 민속 음악을 차용한 블랙 메탈이야말로 정말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영역이 아닐까. 애당초 북유럽에서 발달한 블랙 메탈은 사타니즘이나 전승 신화와 같은 것을 주제로 삼는다는 면에서 한국 전통 음악이 내포하는 민중성이나 무속과 대립적인 구도에 있을 수밖에 없고, 이러한 면에서 한국적인 블랙 메탈은 그 모순성을 기반으로 누구나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그슨대도 향후 음악을 통해 그들만의 으스스하고 기괴한 세계를 만들어 가기를 바란다. 


피컨데이션

밴드명 ‘fecundation’은 남성과 여성의 생식 세포가 결합되어 접합체가 형성되는 과정, 즉 수정을 뜻하는 단어이다. 피컨데이션의 음악 또한 엄청난 테크닉과 블래스트 비트[2]의 결합으로 수정되고 한국에 불시착한 외계 접합체라는 생각이 든다. 피컨데이션은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정종하를 중심으로 2013년에 결성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일본과 러시아 등 해외에서 정력적인 활동을 선보이고 다수 레코드 레이블과도 계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5년에 내놓은 데뷔 앨범 [Cadaveric Rigdity + From Grave To Cradle]은 자체로 제작된 앨범으로, 두 개의 앨범을 합친 것처럼 보이는 앨범 이름은 사실 작업을 맡은 스튜디오 엔지니어의 실수로 후녹음된 몇 개 곡이 다른 곡과는 아예 다른 소리로 포착되어서 조정된 탓이라고. 피컨데이션은 이처럼 우연스러운 실수마저 그들만의 특징으로 품을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냈는데, 스스로 일관성 없는 리프의 물량 공세라고 밝혔을 만큼 엄청나게 포괄적이고 기타 리프들이 ‘이 중에 네 취향 하나쯤은 있겠지’라고 묻는 마냥 쏟아져 나온다. 시종일관 고어하게 토해내는 듯한 그로울링 보컬과 그 배경에서 폭발하는 블래스트 비트는 듣는 이에게 엄청난 충격과 쾌감을 주기 마련이다.

2016년에 듀오로 재편한 피컨데이션은 일본인 베이시스트를 영입하며 한일 트리오로 거듭나 2018년에는 러시아의 코요테 레코드(Coyote Records)에서 [Decomposition of Existence]를 발매했다. 구멍을 침투하는 듯한 압력적인 사운드로 공간을 꽉 채우는 첫 곡이 포문을 연 이후 이어지는 다음 트랙들은 어김없이 난사하는 블래스트 비트로 이어진다. 간혹 일관적으로 리드믹한 드럼 위에서 강력한 기타가 멱살을 잡고 이끌어가는 것 같기도 하지만, 결국 묵직하게 꽉 채워주는 것은 바로 살벌한 드럼 사운드가 되겠다. 마치 두 차가 서로를 향해 달리는 치킨 게임처럼 드럼과 기타가 양 끝에서 강렬하게 폭주하는 느낌이 나지만, 치킨 게임과 차이점이 있다면 서로를 빠르게 밀고 당기는 둘을 탄탄하게 받쳐주고 조율해 주는 베이스가 있다는 것. “Putrid Dead Flesh”에서 특히나 중독적인 슬래밍 리프가 이어지는데, 아래 영상을 통해 직접 정종하의 환상적인 테크닉을 감상해 보자. 오는 3월 31일 일본 그라인드코어 밴드 BUTCHER ABC의 내한 공연에 참여할 예정이라고 하니, 관심이 생긴다면 이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참고로 정종하는 BUTCHER ABC의 기타 세션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비세랄 익스플로전

어쩌다 보니 계속 밴드 이름을 언급하면서 소개를 시작하게 되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장르가 장르인지라 가사는 물론(그야 곡에서 가사가 들리는 편이라면 말이다) 앨범 표지나 활동 이름까지 표현하고 싶은 정서에 일관적으로 부합하도록 구상되기 때문에 언급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비세랄 익스플로전(Visceral Explosion)은 비교적 최근인 2020년 대구에서 결성한 밴드로 데스메탈 중에서도 슬래밍 브루털 데스메탈[3]을 표방한다. ‘내장 폭발’이라는 밴드명에서부터 첫 번째 싱글 “All Day Diarrhea”의 제목까지 내핵까지 건들 정도로 폭발적인 사운드를 기대하게 만드는데, 비세랄 익스플로전의 빡빡하게 압박하는 듯한 블래스트 비트와 그 위에 끈적하게 얹힌 그로울링은 정말 인체 안의 무엇이 폭발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토록 강렬한 곡의 제목이 단순히 멤버 중 한 명이 합주 전 늘 화장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는 일화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작년에 발표된 세 번째 EP [Malevolent Dismemberment Of Entire Putrefacted Gastrointestine]은 전작에 비해서 훨씬 정교해진 기타 리프와 세밀하게 박자를 쪼개는 드럼 연주로 구성되어 있다. 무마취 시상하부 절제술을 뜻하는 “Unanesthetized Hypothalamotomy”는 마치 피 튀기는 듯한 정박의 드럼 연주로 시작한다. 그로울링은 어딘가 비인간적인 비명으로 변하면서 브루털한 느낌을 자아내는데, 가장 인상 깊은 구간은 중음과 고음을 넘나드는 듯한 그로울링이 째지는 소리와 같은 효과음으로 들리는 후반부에 해당한다. 마지막 곡까지 드럼의 우직한 완급 조절 속에서 극적인 기타 리프를 통해 한숨 돌릴 틈이나 지루할 틈을 절대 내어주지 않으며 데스메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쾌감을 가장 명확하게 전달한다. 타악기만이 선사해 줄 수 있는 쾌감을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는 드럼의 존재감이 강하게 느껴지는 이번 EP는 비세랄 익스플로전의 가파른 성장이 어디까지 도달할지 기대하게 만드는 음악이다. 비세랄 익스플로전 또한 위에 언급한 BUTCHER ABC의 내한 공연에서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니 이들의 라이브 연주에 관심이 생긴다면 3월 31일에 상수동으로 향할 것.

이 밖에도 주목할만한 작업물을 내놓는 밴드는 다수 있지만, 어느 정도 정보를 발굴할 수 있는 그룹에 한하여 글을 작성했기 때문에 분명히 짚고 넘어가지 못한 그룹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노트로필 뮤테이션(Xenotropic Mutation)이나 디휴머나이징 엔시팔렉토미(Dehumanizing Encephalectomy)와 같은 밴드 말이다. 블랙메탈과 데스메탈이 분명히 모두를 위한 음악은 아니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취향의 저변을 넓혀보는 동시에 우리네 문화 보존에도 모종의 기여를 해 보는 것이 어떨까. 마지막으로 미국의 이안 헨더슨과 마이클 오드와이어가 한국의 헤비메탈 밴드를 다룬 다큐멘터리 “Bleeding Kimchi: K-Pop Killers”에서도 로컬 메탈 밴드 신을 탐구할 수 있으니 참고해도 좋을 것.


이미지 출처 | Bandcamp, The Metal Archives, Unite Asia, X

[1] 그로울링(Growling): 주로 흉부와 명치 쪽에 공명을 두고 저음의 울림을 극대화해서 내는 창법으로, 포효하는 듯한 마초적인 소리가 특징이다.
[2] 블래스트 비트(Blast Beat): 매우 빠른 박자로 연주되어 폭발음처럼 들리는 드럼 비트를 일컫는다. 익스트림 메탈 중 데스메탈과 그라인드코어에서 자주 사용되곤 한다.
[3] 브루털 데스메탈(Brutal Death Metal): 데스메탈의 과격성을 부각한 하위 장르로, 그로울링이나 블래스트 비트가 더 강조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RECOMMENDED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