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전 세계 패션에 거대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고샤 루브친스키(Gosha Rubchinskiy), 혹은 유수의 패션 편집 스토어로 인정받고 있는 폿(Fott)의 행보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드는가? 러시아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약 20년 전 그때만 하더라도 ‘소련’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린 것 같다. 그땐 정말 아무것도 몰랐지만, 친근한 이미지는 아니었다. 그러기엔 TV에서 보여주는 이미지가 너무 강력했으니까. 오랜 시간 북방의 공산국가 정도로만 생각해왔던 것 같다.
사실 지금 고샤 루브친스키의 행보는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 이 노서아(露西亞) 브랜드, 패션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 유쾌한 불곰국에서 탄생한 브랜드가 선보이는 컬렉션은 너무도 생경하고 신선하다. 스트리트 웨어와 부티크, 유스 컬처의 적절한 조화까지.
아, 그렇다고 모든 러시아인이 고샤 루브친스키를 입는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사실 러시아 형님들이 사랑해마지않는 브랜드는 따로 있으니까. 바로 지금 당장 당신의 옷장을 열었을 때 한 벌쯤은 있을 법한 그 옷, 아디다스(adidas)의 트랙슈트다. 한국도 한창 아디다스의 트랙탑, 흔히 ‘져지’라고 부르는 쫀쫀한 재킷이 굉장한 유행을 끌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아디다스 사랑은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당장 하단의 사진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뭐 대충 이 정도의 열정을 보여주는 브랜드 충성도엔 나름의 이유가 존재한다. 한때 독일과 러시아는 서로 상당히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러시아가 아직 소련이었을 때, 이 철저한 공산주의 국가의 시민은 서구 브랜드를 구경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심한 통제를 받았다. 이미 여러 나라가 쿨한 옷차림을 뽐낼 때, 심지어 대한민국의 청년이 나이키(Nike)와 아디다스 트레이닝 슈트를 입으며 멋의 경합을 벌일 때도 러시아에선 구닥다리 러시아산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1980년 7월 19일부터 러시아의 패션 역사는 새로 쓰인다. 러시아가 모스크바 올림픽을 개최한 날, 바로 이때가 러시아인의 아디다스 강박이 시작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당시로써는 굉장히 파격적인 변화였는데, 러시아가 올림픽에 출전하는 소련 선수의 운동복을 아디다스 제품으로 채택했기 때문이다. 소련 공산당 지도자들은 선수 유니폼에 자본주의 기업의 라벨이 붙어있는 것을 금지해왔다. 그때만 하더라도 “Тот, кто носит “Адидас”, завтра Родину продаст”-아디다스를 입는 것은 조국을 판매하는 것이다”라는 선전 문구가 모스크바 전역을 휩쓸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러시아 선수에 대한 아디다스의 스폰서쉽 효과는 실로 엄청났다.
유행은 급속도로 퍼졌고 곧 러시아는 삼선의 물결로 펄럭였다. 아래 사진은 당시 아디다스 트랙 슈트를 착용한 러시아 선수를 촬영한 것. 왜 삼 선이 아닌 이 선이냐 묻는다면 앞서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 기업의 라벨이 금지되었기에 불가피하게 선 하나를 제거한 나름의 커스텀을 거쳤다. 그 후에도 러시아는 여전히 자본주의 국가의 패션 브랜드를 수입하지 않았으므로 러시아인 대부분은 중국, 터키, 코카서스 등 주변국에서 생산한 짝퉁으로 그 욕망을 채웠다.
한편, 90년대 러시아 마피아는 은퇴한 레슬링, 역도 선수를 채용하기 시작했다. 다수의 운동선수는 이미 여러 번의 해외 출전과 여행으로 ‘서양의 의복 문화’에 익숙했다. 어떤 우월감과 과시를 위해서 그들은 거리낌 없이 자본주의 국가에서 만들어진 스포츠웨어를 착용했고, 이는 곧 힘과 권위의 상징이 되었다.
그 시기와 맞물려 이를 표방하는 무리인 고프닉(Gopnik)이 탄생한다. 지금부터가 진짜 ‘러시아♡아디다스’의 공식이 성립하는 시기다. 고프닉을 쉽게 설명하자면 그냥 ‘Street Guys’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민족주의를 입히고, 더 과격한 성향을 띄면 스킨헤드라고 보면 된다. 아무튼, 이들은 동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양아치인데, 놀라울 정도로 아무 일을 하지 않는다. 또한,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보다는 지방 소도시에서 더 많이 목격된다. 이들은 9GAG 등 각종 유머 사이트에서 상당수의 밈(Meme)을 만들어내며 많은 이에게 웃음을 주고 있다. 심지어 러시아 내에서도 고프닉을 주제로 한 시트콤을 방영, 이들의 행동거지를 그대로 보여주기도 한다.
‘아디다스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러시아인’이라는 지금의 이미지는 고프닉이 만들어낸 게 맞다. 아디다스의 트랙슈트와 헌팅캡, 앞코가 네모난 스퀘어 토 드레스 슈즈가 그들의 주된 옷차림이다. 이전 영국의 차브(Chav)와 비슷한 성격의 무리로, 하릴없이 앉아 맥주에 해바라기 씨를 먹는 일이 생활 전부다. 이들의 공통점은 아디다스 제품을 무지하게 좋아한다는 것. 아디다스만으로 고프닉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의 아디다스 사랑은 대단하다. 이참에 고프닉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슬라브 스쿼트(Slav Squat)’라고 불리는 포즈가 있다. 별건 아니고 그저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은 모습을 뜻하는 것.
하지만, 이 포즈는 그들에게 단순한 ‘포즈’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고프닉을 설명할 때 항상 등장하는 슬라브 스쿼트는 사실 동유럽에서 처음 파생되어 퍼져나간 자세다. 소련, 그 주변의 동유럽 국가에 공산주의가 만연하던 때를 떠올려보자. 자본주의에 대한 불신으로 똘똘 뭉친 가난한 나라, 당시 어린아이와 청년들은 가정용 게임기, 컴퓨터를 즐기기엔 너무 일찍 태어났다. 그 시절의 야외활동은 필연적이기도 했다. 불행히도 그들은 편히 앉아 쉴 수 있는 벤치 또한 쉽게 보장받지 못했고, 몇 벌 되지 않는 옷과 신발을 지키기 위해 땅바닥에 쪼그려 앉을 수밖에 없었다. 뭔가 어처구니없지만, 슬라브 스쿼트는 이런 안타까운 과거에서 비롯된 자세다.
최근의 동향을 반영했을 때, 트레이닝 팬츠에 구두를 신는 것은 상당한 힙지수를 뽐내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고프닉은 훨씬 이전부터 이런 패션을 지향해왔다. 코끝이 뾰족하거나 긴 구두를 신는 것 또한 고프닉의 주요한 패션 코드 중 하나였으니까. 오늘날에는 아디다스 스니커를 신는 경우도 꽤 많아졌지만, 구두 역시 오랜 역사를 지키며 고프닉 패션의 한 축을 지키고 있다.
고프닉 패션은 낯설고 생소한 러시아라는 나라를 바로 보여주는 그들만의 카운터 컬쳐다. 실제 고프닉 문화가 세계적인 유행을 이끌기는 힘들어 보이나 그 고집스러운 멋을 꾸준히 추구하는 모습은 역시 존중받기 충분하다. 이 투박한 러시아 양아치를 두고 어떠한 평을 해야 할까. 최근 뜨거운 이슈를 만들어내고 있는 고샤 루브친스키, 유행에 민감한 힙스터 덕분에 재조명받는 삼선 트레이닝 팬츠의 유행은 확실히 흥미롭다. 당신이 이 글을 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트레이닝 팬츠에 구두를 매치한 고프닉 힙스터가 서울을 누비고 있을는지 모르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