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셔츠를 고르는 행위가 지니는 의미는 다른 옷과는 조금 다르다. 티셔츠에 얹은 그래픽, 로고 혹은 텍스트에 따라 전달하는 바가 극명하게 달라지는 티셔츠는 취향과 생각 그리고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거울 같다고 해야 할까. 2019년 여름 현재, 캔버스 대신 티셔츠 위에 가장 흥미로운 그래픽을 담아내는 그래픽 아티스트 김도영(@waaaavyyy)을 만났다. 스트리트 컬처와 팬 기어(Fan Gear) 그리고 온라인 밈(Meme) 열풍을 맛깔나게 버무려낸 듯한 그의 부틀렉(Bootleg) 티셔츠 중 가장 아끼는 5장은 무엇일까? 아래가 김도영의 대답이다.
빈지노(Beenzino)
빈지노는 정말 오래전부터 티셔츠로 만들고 싶었던 아티스트다. 내가 성인이 된 이후로 가장 오랜 시간 좋아한 뮤지션인데, 너무 유명한 인물이다 보니 섣불리 만들기가 어려웠다. 이미 그와 관련된 컨텐츠가 너무 많기에, 내가 재미없게 만들면 빈지노가 들어간 티셔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되니까. 따라서 그의 스토리를 담을 수 있도록 일부러 전역 날짜를 기다렸다. 작업을 다 해놓은 뒤 전역 이틀 전에 사진을 찍어두었고, 당일 점심에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했지. 올해로 티셔츠 작업을 시작한지 2~3년 됐는데, 빈지노의 입대 소식을 들었을 때 ‘그가 전역할 즈음에는 내가 그를 만날 수 있는 정도의 위치에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막연히 상상하던 기억이 난다. 이제 빈지노가 티셔츠를 받아주면 어느 정도 이뤄지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티셔츠를 그에게 어떻게 전달할 예정인가? 연락이 닿았나?
이 티셔츠를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면서 피드와 스토리에 그의 계정을 태그했다. 확인할 줄만 알았는데, 다음날 자고 일어나서 보니 내 계정을 팔로우했다. 정말 기분 좋았다. 며칠 뒤에 DM을 보내 티셔츠를 보낼 주소를 가르쳐 달라고 하니까 내 작업실이 준비되면 놀러와서 직접 가지고 가겠다고 하더라. 그 이후로 연락이 없어서 한번 더 연락했더니 이번 주가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현재 날짜를 조율하는 중이다 ─ 5월 2일 기준. 전달 완료 ─ .
인터뷰가 공개될 즈음에는 전달이 되었길 바란다. 티셔츠에 관해 더 설명해줄 수 있나?
티셔츠는 두 종류로 나왔다. 빈지노를 부활한 예수로 표현한 티셔츠와 군복을 입은 ‘진짜 사나이’ 티셔츠가 있는데, 예수 티셔츠가 먼저 나왔고 직관적인 디자인이 하나 더 필요할 것 같아서 한글을 넣은 ‘진짜 사나이’ 티셔츠를 추가 제작했다.
작업의 모델을 선정하는 기준이 궁금하다.
내가 만드는 부틀렉 티셔츠의 목적은 확실하다. 그래픽의 중심이 되는 모델의 팬으로서 단순한 팬심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 또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티셔츠로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을 외모가 훌륭하다거나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만들진 않는다. 오히려 염따나 언에듀케이티드 키드(Uneducated Kid)처럼 음악적으로 B급 정서가 있으면서도 자기 색이 뚜렷한 사람들이 좋다. 지금은 활동하지 않지만 과거에 아이코닉했던 한국 뮤지션도 좋다. 물론 박근혜 전 대통령이나 김무성 의원 같은 경우는 예외지. 그들처럼 정치, 문화, 사회에서 이슈가 되는 사람은 그 이야기가 흥미로울 경우 밈(Meme)의 느낌으로 티셔츠를 만들기도 한다.
본인의 작업이 부틀렉 티셔츠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부틀렉, 펜앤픽셀(Pen & Pixel, INC) 스타일의 앨범 커버 그리고 랩 티셔츠(Rap T Shirts)에서 주로 영감을 받는다. 이러한 스타일에 내가 자라면서 봐온 문화와 한국어가 섞이며 고유한 느낌이 나오는 것 같다.
본인이 생각하는 펜앤픽셀과 랩 티셔츠의 멋이라고 한다면?
팬앤픽셀의 멋은 직관적으로 스웩(Swag)을 표현하는 데에 있다. 진짜 엄청 단순하고 뻔한데, 글씨를 다이아몬드처럼 꾸미고, 불, 대리석, 자동차 등 부와 멋을 상징하는 것들을 고민 없이 곳곳에 때려 박는 식이다. 뻔하지만, 돌려서 표현하는 것보단 한눈에 메시지가 분명하게 보이도록 전달하는 것이 더 멋있다고 생각한다.
랩 티셔츠의 경우, 그래픽이 단순한 만큼 구매하는 이들의 동기도 단순하다.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아티스트와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나. 아이돌 팬이 아이돌 굿즈를 사듯이, 내 티셔츠 또한 구매하고 착용함으로써 팬심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인 것이다. 일차적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티셔츠에 있는 그 자체로 좋고, 이차적으로는 자신의 관심을 외부에 드러내고 싶어서 착용하게 된다. 결국 내 티셔츠가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모든 과정에서 팬심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한국에는 마땅히 참고할 레퍼런스(Reference)가 없을 것 같은데.
그렇다. 무엇보다 한글을 넣는 작업이 항상 어렵다. 그냥 한글 텍스트를 넣고 나서 보기에 괜찮을 때까지 계속 바꿔본다. 이거 넣어보고, 저거 넣어보고, 자고 일어나서 다시 보고. 한국 사람임에도 한글 그래픽을 볼 때 어색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지 않나. 마음 같아서는 그래픽에 한글만 사용하고 싶은데 말이지.
언에듀케이티드키드(Uneducated Kid)
언에듀케이티드 키드의 단독 콘서트 포스터 마감 하루 전에 만들게 됐다. 연락을 받고 나서 곧장 그의 집을 찾아가 다음 날 아침까지 함께 작업한 기억이 있다. 우리 둘 다 그 포스터의 그래픽을 티셔츠로 만들어서 공연할 때 판매할 계획을 세웠지. 총 100장을 찍어서 전부 소진시켰다. 지금까지 내가 작업한 티셔츠 중 가장 많은 수량을 만들었고 동시에 가장 많은 사람이 입은 티셔츠다. 콘서트 당일 판매 현장을 가보니까 팬들이 두 장씩 구매하더라. 디자인의 매력도 있겠지만 팬심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애착이 가는 이유는?
언에듀케이티드 키드의 공연이 정확히 내가 원하던 그림이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티셔츠를 입고 공연을 관람하는 모습 그 자체로 굉장히 기뻤는데, 그날 공연하는 다른 아티스트도 이 티셔츠를 입고 나오더라고. 오히려 내가 정말 큰 선물을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이 티셔츠는 또 다른 이유로 애착이 간다.
역시 자신이 제작한 티셔츠를 실제로 착용한 사람들을 봤을 때 가장 감흥이 클 것 같다.
과거와 현재의 반응이 매우 다르다. 이전에는 이런 그래픽 티셔츠를 보여주면 그래픽은 좋은데 티셔츠로 입을 용기는 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최근에는 실제로 내 작업물을 착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언에듀케이티드 키드와 염따 티셔츠의 경우 중, 고등학생이 많이 구매했는데, 그들이 자라서 성인이 되면 문화가 더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영상도 인상적이다. 본인뿐만 아니라 지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티셔츠를 착용하고 티셔츠 속 모델을 재미있게 흉내 내고 있더라.
내 친구 혹은 대학 후배들이다. 다들 흔쾌히 참여해줬다. 특히 언에듀케이티드 키드를 흉내낸 친구는 언에듀케이티드 키드를 진짜 좋아하는 친구다. 정말 좋아해서 전화로 ‘언에듀’까지만 말했는데도 웃음을 터트리며 참여하겠다고 했다. 서울대학교에서 대걸레를 뒤집어쓰고 언에듀케이티드 키드의 헤어스타일을 흉내냈는데, 대걸레에서 나온 먼지를 너무 많이 먹었는지 실제로 촬영 며칠 후에 간염으로 입원했다. 하하.
덤파운데드(Dumbfoundead)
한동안 덤파운데드가 인스타그램에 한글 단어나 표현을 가르쳐주는 컨텐츠를 업로드한 적이 있다. 그게 너무 재밌어서 티셔츠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구상한 그림이 잘 구현돼서 애착이 간다. 물론 티셔츠를 덤파운데드에게 전달했을 때 그도 내 샤웃아웃(Shout out)을 많이 해줬다. 그 이후로 무슨 대단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냥 이런 일들이 일상 속에서 소소한 재미가 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그의 큰 팬이라 더 많은 사람이 덤파운데드의 음악을 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내 작업물을 통해 그를 알게 된다는 사실이 기쁘고, 그를 통해 내 작업물도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어서 만족한다. 무엇보다 재밌는 결과물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 기분 좋은 거지.
자신이 그려진 티셔츠를 봤을 때 가장 독특한 반응을 보인 사람은 누구였나?
전 국가대표 축구팀 골키퍼였던 김병지 씨가 정말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티셔츠를 완성하고 곧바로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는데 응답이 없어서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댓글을 달았더니 그제야 확인하더라. 다만 전혀 피드백이 없어서 내가 김병지FC 풋살파크에 직접 찾아갔다. 개회식이 끝나고 잠깐 틈이 날 때 티셔츠를 전달했더니 정말 무덤덤하게 받아서 돌아갔다. 하하.
유승준
유승준은 내 첫 아이돌이라고 할까. 지금도 그의 활동 시절 사진에서 느껴지는 소년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순수하게 팬의 마인드로 작업했다. 아쉽게도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DM을 보내봤지만, 대답은 없었다. 티셔츠에 들어간 문구는 그의 노래 “연가”의 가사 일부다.
꼭 티셔츠로 작업해보고 싶은 인물은 누구인가?
래퍼 제네 더 질라(Zene The Zilla)와 작업해보고 싶다. 2017년 즈음에 제네더 질라의 [돈색하늘] 믹스테잎이 나왔을 때부터 팬이었다. 그의 음악적인 색깔과 비주얼적인 매력을 티셔츠에 담는다면 200% 재미있는 결과물이 나올 것 같다.
염따
가장 반응이 뜨거웠던 티셔츠 중 하나다. 염따 형님이 머리를 민 직후에 신곡 “시러”를 듣고 완전히 매혹되어서 바로 작업에 돌입했다. 원래 그래픽만 인스타그램에 올렸는데, 바로 그 게시물에 직접 ‘티셔츠 ㄱㄱ’라고 댓글을 달아주셨다. 곧바로 전화가 왔는데, 목소리만 들어도 형님인 줄 알겠더라. 처음에는 개인적인 선물로 드렸고, 이후 판매로 이어져서 총 50장을 두차례에 걸쳐 제작했는데 모두 완판됐다. 지금에야 하는 이야기지만, 100장을 넘게 찍었어도 다 팔렸을 것 같다. 많이들 알아보듯이 이 티셔츠는 드레이크(Drake)를 패러디했다. 염따 형님을 ‘코리안 드레이크’ 혹은 ‘따레이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옛날에 만들었던 드레이크 그래픽을 염따로 바꾼거지. 아래에 ‘스타일난다(Style Nanda)’라고 쓴 이유는 진짜 별 뜻 없고, 그냥 스타일 나니까. 여담이지만 트랙 “yaya freestyle”에 언급되는 티셔츠가 바로 이 티셔츠다. 하하.
티셔츠 이외에 다른 종류의 프로덕트로 제작할 의향이 있는지?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닌데, 역시 티셔츠만의 가벼운 느낌이 있는 것 같다. 가격대도 부담 없고, 어디든지 편하게 입을 수 있으니까. 후디(Hoodie)까지는 해봤는데, 사실 썩 마음에 들지 않더라. 역시 티셔츠가 제일 좋다.
향후 계획을 말해달라.
이전에는 아티스트에게 제작 티셔츠를 전달하는 것이 전부였는데, 5월 중으로 브랜드를 만들어서 웹사이트를 통해 티셔츠를 판매할 계획이다. 대신 이제부터는 아티스트와 제작 전 협의한 뒤, 보다 공식적으로 전개할 예정이다. 아티스트와 내가 윈윈할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 외국에서 하는 창고 세일(Garage Sale)이나 레모네이드 스탠드처럼 작게 시작해 서서히 규모를 만들고 싶다.
그렇다면 브랜드의 이름은?
파도타기(Padotagi).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재키초(Jaeki Cho) 형이 “네가 하는건 이제부터 파도타기야”라며 마치 호를 하사하는 느낌으로 지어주신 이름이다. 엄마나 누나는 좀 더 멋있는 이름 없냐고 물어보는데, 나는 이 이름을 그대로 가져갈 예정이다.
진행 / 글 │ 김용식
사진 │ 배추
*해당 기사는 지난 VISLA Paper 8호에 실린 인터뷰입니다. VISLA Paper는 지정 배포처에서 무료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