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SLA 매거진의 라디오 프로그램, ‘동향사람끼리’. 월 1회 진행하는 본 방송은 서울 커뮤니티 라디오(Seoul Community Radio)의 스튜디오를 찾은 VISLA의 에디터 두 명과 특별한 손님이 특정한 주제와 걸맞은 음악을 소개하는 두 시간의 여정이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시간마다 찾아오는 ‘동향사람끼리’는 서울의 디제이 팁토(7ip7o3)를 스튜디오로 초대해 귀가를 주제로 음악을 나눴다. 서울의 밤을 책임지고 동이 틀 무렵 귀가하는 팁토와 VISLA는 어떤 음악과 함께 귀가하는지, 지난 방송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아래 본문은 홍석민과 황선웅의 귀가를 생각하며 준비한 셀렉션이다.
Аркадий Хоралов “Гавань моей любви”
홍석민: 어디론가 이동할 땐 동행이 없는 편을 선호하는데 이는 지하철이나 버스에서의 시간이 혼자 음악을 듣는, 하루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요즘 구소련의 이쁘장한 노래를 틈틈히 찾는 중이다. 집에 가기까지 걸리는 40분 남짓한 시간, 나는 노래를 조심히 고른다. 알렉산더 바리킨(Александр Барыкин)의 85년 EP [Но Все-таки Лето!]은 여름풍 노래가 3곡 담긴 7인치 음반이다. 음반사는 당연히 멜로디야(Мелодия). 그 중 “Гавань Моей Любви”을 콕 집었다. USSR의 여름은 이랬을까.
봄 여름 가을 겨울 “Bravo My Life”
황선웅: 하루를 힘겹게 버티고 내일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 아버지들의 이야기. 까마득한 저들의 이야기를 내가 공감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흘려만 들었던 음악인데 취업이란 걸 경험하니 어느새 내 음악이 되어있더라. 지금도 늦은 시간 귀가할 때면 가끔 찾아 듣곤 한다. 나를 격려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를 포함한 늦은 시간 귀가하는 모든 이들의 내일을 위한 음악이랄까.
Владимир Осинский “Под Парусом”
홍석민: 요트 위에서 듣기 좋은 곡을 묶어 요트 록(Yacht Rock, 혹은 AOR)이라 하던데, 요즘 한국에서도 인기가 그럭저럭 좋기에 음반 매장에서 쉬이 찾을 수 있더라. 미국에서 꽃핀 해당 장르에 대한 소비에트의 대답은 이 곡이 아닐까 싶다. 블라디미르 오신스키(Владимир Осинский)의 87년 신스팝 앨범 [Аэротон]에 수록된 “Под Парусом”. 직역하면 ‘항해 중’이란 뜻이다. 이보다 더 적나라할 순 없다. 지금도 영화음악 감독으로 활동 중인 오신스키. 그의 유명한 첫 앨범이 리듬 체조를 위한 곡 모음집(Ритмическая гимнастика, 84’)이라는 점이 참 소비에트답다. 이를 발매한 음반사는 역시 멜로디야(Мелодия).
Gerry Mulligan Sextet “Night Lights”
황선웅: 해변이 보이는 곳에서 자란 건 감사한 일이다. 덕분에 귀갓길 또한 바다와 함께했으니. 크게 바쁜 일이 없을 때는 버스에서 일찍 내려 해변을 따라 집까지 천천히 걸었다. 그때마다 한 번씩 찾아 듣던 음악 중엔 게리 멀리건(Gerry Mulligan)의 “Night Lights” 또한 있었다. 낭만이 있는 혹은 쓸쓸한 도시의 밤을 그려낸 음악. 어딘가 보케와 잘 어울린다 생각되어서일까. 혼자 해변을 거닐다가도 벤치에 앉아선 밤바다를 초점 없이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바다 건너엔 그저 흰 연기를 뿜어내는 공장의 불빛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이는 현재 아등바등 살아가는 서울의 밤, 한강과 비슷한 풍경이겠다.
Сябры “Свидание с давней весной”
홍석민: 플레이어(Player)의 “Baby Come Back”을 계속 반복하던 때가 있었다. MP3 파일이 닳을 때(?)까지 들은 탓인가 머리에 멜로디가 새겨진 듯하다. 따라서 스쿼브(Сябры)의 86년 앨범 [Далекий Свет] 수록곡 “Свидание с давней весной”를 처음 들었을 때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유라시아 특유의 폴카(Polka) 뽕이 가미된 이 곡을 “Baby Come Back”의 번안곡이라고 내 멋대로 정의한다. 물론 근거는 없으니 듣고 각자 믿고 싶은 대로 생각하면 된다. 음반사는 당연히 멜로디야(Мелодия).
Nathan Micay “11.11.90 (Best Version)”
황선웅: 구구절절 사연이 담긴 음악도 있지만, 역시 귀가할 땐 그날 가장 꽂힌 음악이 최고다. 그리하여 선곡한 네이슨 미케이(Nathan Micay)의 “11.11.90 (Best Version)”은 7월 말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음악이다. 사실 지난 5월 콘트라(Contra)를 방문할 때까지만 해도 앨범 [Blue Spring]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늦바람이 든 나머지 주노를 통해 바이닐까지 주문하고 말았다. 트랙 초반의 사운드 스케이프는 콩깍지가 벗겨진 지금에야 조금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는 걸 느낀다. 허나 중반부터 브레이크 비트와 맞물려 등장하는 보컬 파트는 이 앨범 전체 중 가장 밝게 발광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Владимир Пресняков-мл. “Острова(Спит придорожная трава)”
홍석민: 오데사 필름 스튜디오(Odessa Film Studio)가 러시아 영화사에 남긴 족적은 크다. 그의 여러 명작 중, 86년 개봉한 어린이 뮤지컬 영화 ‘Выше Радуги’을 최고 중 하나로 뽑는 이가 많으리라. 영화에 음악 감독으로 참가한 유리 체르나브스키(Юрия Чернавского)와 가사를 쓴 시인 레오니드 데르베네프(Леонида Дербенёва) 덕분이다. 운동에 소질이 없어 고민하던 소년에게 마녀가 모든 걸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을 선사함으로써 펼쳐지는 이야기. 주인공 소년을 연기한 블라디미르 프레스니야프 주니어가 노래하는 영화 앤딩 노래를 귀가 중 들어보길. 말해 무엇하리. 멜로디야(Мелодия)가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