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ITMAN

본명 김영(Young Kim), 그러나 수트맨(Suitman)이라는 닉네임이 더욱 익숙한 그가 한국을 찾았다. 유년기 시절 서울을 떠나 남들보다 이른 시기 재미교포로서의 삶을 시작한 그는 오랜 시간 동양인과 서양인 사이, 본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방황했지만, 이내 이를 예술로 승화하며 수트맨이라는 제3의 페르소나를 얻었다.

검정 수트 한 벌과 넥타이, 노란 렌즈의 선글라스와 함께 전 세계를 누비며, 이를 수많은 초상으로 기록했고, 거리에서 직접 만든 이동식 사운드 시스템을 가지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튼다. 쉼 없이 움직여야 완성할 수 있는 그의 예술, 이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일까. 오랜 시간 궁금증을 가지고 지켜봤던 그의 아트 프로젝트, 그리고 수트맨 이전 김영의 삶에 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보았다.

현재 부산의 편집 스토어 발란사(Balansa)에서 수트맨 30주년을 기념한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3월 1일부터 5월 12일까지 이어지는 긴 이벤트이니 기간 내 부산에 방문할 일이 있다면, 시간을 내어 슬쩍 들러 봐도 좋겠다.


이번에 진행하는 전시에 관한 소개를 부탁한다.

2024년은 수트맨 프로젝트가 3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그래서 ‘Suitman is here’라는 제목으로 지난 30년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수트맨의 긴 여정을 담은 전시를 기획했다. 부산의 편집 스토어 발란사에서 열리며, 이곳 부산은 내 어머니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품과 함께 어머니에게 헌정하는 개인 소장품을 선보이고, 동시에 몇 가지 머천다이즈를 판매하는 팝업 스토어까지 운영한다.

한국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떠났다고 들었다. 70년대라면 미국 내 한국인 이민자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을 텐데, 이민 초기의 생활은 어땠나?

처음에는 마냥 신났지. 집과 학교, 친구, 언어 등 새롭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땐 나이가 어려 뭘 잘 몰랐기에 부모님이 겪어야 했던 고난은 미처 알 수 없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이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깨달았다.

당신의 예술 프로젝트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민족정체성과 함께 여러 국가와 인종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지닌다는 건 한 피부 아래 서로 다른 두 문화에 속하게 된다는 뜻이다. 나는 스스로를 미국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 눈에 비치는 나는 ‘동양인’일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한 건 내가 90년대 도쿄로 이주했을 때도 미국에서 겪은 소외감과 동등한 수준의 외로움을 느꼈다는 거다. 얼굴은 아시아인이지만, 그 속의 페르소나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수트맨으로 변신하면서 사회문화적 고립감에 맞서고 내 진정한 정체성을 탐구할 힘을 얻었다.

한국에는 언제 다시 방문했나? 떠나기 직전의 서울과 다시 돌아온 이후의 서울에서 어떤 차이를 느꼈는지도 궁금하다.

90년대 중반 도쿄에서 일하던 중 업무차 서울에 가게 됐다. 미국으로 이민 간 후 처음으로 서울 땅을 밟은 순간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옛날에 살던 집과 다니던 학교를 찾았다. 내가 작은 아이였을 때는 모든 게 커다랗게 보였는데, 성인이 되고 난 후에 보니 그것들이 작게 느껴지더라. 또 하나 눈에 띈 건 서울이라는 도시가 이전과는 달리 화려한 색채로 뒤덮여 있었다는 거다. 어린 시절 내 눈에 비친 서울은 흑백의 어두운 교복을 입은 학생, 그리고 무채색의 옷을 입은 사람이 많았다는 인상이었거든. 또한, 도시 교통도 이전보다 훨씬 복잡했다. 그때는 없던 지하철이 운행되고 있어 놀라기도 했다.

학창 시절, 당신의 문화적 자양분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어떤 걸 보고 들으며 자랐나?

어머니는 내가 어린 시절 서울에 살 때부터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키워주셨다. 한 달에 한 번씩 박물관이나 극장, 콘서트, 갤러리, 예술가 친구의 작업실에 나를 데리고 가서 다양한 예술과 문화를 접하도록 해주었지. 가끔은 골판지 상자로 버스를 만들어 그 위에 페인트를 칠하거나, 나무를 조각해 장난감을 만드는 등 작은 미술 프로젝트를 함께하기도 했다. 미국으로 이주하고 나서는 부모님 모두 맞교대 근무와 부업을 병행해 시간 대부분을 나 홀로 보내야만 했다. 엄격한 통금 시간이나 규칙이 없었기에 하고 싶은 건 뭐든 할 수 있었지. 그때 음악과 예술, 영화, 역사 등 다양한 문화를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성인이 된 후에는 유명 광고회사 ‘와이든 앤 캐네디(Wieden+Kennedy)’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했다. 당시의 생활은 어땠는지.

처음에는 그곳이 어떤 회사인지도 몰랐다. 내가 와이든 앤 케네디의 일원이 된 게 어떤 기회인지 깨닫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 회사가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사는 건 그야말로 문화 충격이었다. 첫 2년은 적응하기까지 너무 힘들었다. 당시 에이전시는 총원 40~50명 정도의 작은 규모여서 서로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었다. 처음 3개월 동안은 다섯 명의 신입사원과 사무실을 공유했다. 24시간 내내 사무실에서 일하고, 자고, 파티를 열었다. 격주에 한 번씩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기도 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많은 걸 배운 시기였다. 와이든 앤 케네디에서 일하며 내가 얻은 건 에이전시를 통해 만난 동료다. 그중 몇 명과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고 있으며, 회사를 떠난 후에도 함께 멋진 일을 하고 있다.

광고회사를 그만두고 아티스트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오래전부터 계획하던 일인가, 아니면 특별한 사건이 있었나?

1995년, 나는 나이키(Nike)의 글로벌 올림픽 TV 캠페인에 참여하게 됐다. 영국의 유명 영화감독인 토니 케이(Tony Kaye)와 함께 일할 기회를 얻었지. 우리는 3개월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나이키 선수들을 촬영했고, 이후 3개월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영상을 편집했다. 이 기간 토니와 친해졌고, 많은 공통 관심사를 공유하며 샌프란시스코에서 퍼포먼스 아트에 대한 협업을 진행했다. 그는 내가 창의적인 작업을 하도록 독려하고 영화를 제작하는 법을 알려줬다. 토니는 나를 자신의 후견인으로 삼아 영화감독으로 키워주겠다고 제안했고, 난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회사를 그만두고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해 TV CF 감독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회사 다닐 때처럼 매일 일하지 않아서 독자적인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해 볼 수도 있었다.

회사원에서 아티스트로 직업을 전환할 때 적지 않은 고충이 있었을 것 같은데.

난 건축공학 학사와 미술학 학사까지, 두 개의 학위를 가지고 있다. 대학을 막 졸업하고 나서는 건축사무실에서 일했다. 매주 일요일 밤, 다음 날 출근해 일주일 내내 일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말 두려웠다. 이건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에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급박한 마감일부터 새로운 프레젠테이션 피칭, 클라이언트 승인, 평가까지, 많은 압박이 있는 환경이었다. 아티스트로서 느끼는 압박감은 또 다르다. ‘다음 작품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내 작품을 좋아할까?’, ‘내 작품으로 어떻게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을까?’ 등 항상 색다른 도전이 계속된다. 하지만 예술가로서 가장 만족스러운 건 오브제와 설치물, 퍼포먼스를 선보였을 때 사람들이 반응하고, 즐기고, 감정을 불러일으켜 자기 삶과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거다. 이게 내가 끊임없이 창작하는 이유다.

아티스트로 전향한 후 당신의 첫 프로젝트는 무엇이었나.

내 첫 번째 수트맨 프로젝트는 요지 야마모토(Yamamoto Yohji)를 위한 작업이었다. 1997년 파리 남성 컬렉션 런웨이 쇼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쇼가 끝난 후 도쿄로 돌아온 그는 나에게 A.A.R.(Against All Risks, 일본에서만 판매된 요지 야마모토의 패션 레이블)의 새로운 TVC 캠페인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고, 난 수트맨을 A.A.R. 광고의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다행히 요지가 이 방식을 좋아해 우리는 A.A.R.의 단편 영화 다섯 편을 촬영한 뒤 이를 TV 광고로 제작했다.

수트맨 포트레이트는 어떻게 시작된 프로젝트인가?

19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트맨 포트레이트를 진행 중이다. 이 프로젝트는 ‘그들은 모두 똑같아 보인다’라는 명제로 진행된다. 미국에서 자랄 때 항상 들어왔던 동양인 외모에 대한 고정관념에 관한 거다. 포트레이트 사진은 친숙함을 전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수트와 흰 와이셔츠, 검은 넥타이, 노란 틴트 렌즈 안경이 피사체의 비주얼을 통일한 뒤 표면적인 신분을 벗겨내면, 결국 우리는 똑같다는 이야기다. 수트맨 프로젝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트맨 프로젝트에는 정말 많은 이들이 등장한다. 섭외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여행 중 길거리에 카메라와 배경을 설치하고, 행인에게 무작위로 프로젝트에 참여해 달라고 부탁했다. 덕분에 세계 각국에서 각계각층의 인물을 촬영할 수 있었고, 그 수가 벌서 수천 장에 이른다.

검은색 수트와 노란색 렌즈의 선글라스는 어떻게 당신의 정체성이 되었나.

어릴 때는 정장을 입는 게 싫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정장이 불편한 건 매한가지였다. 그러다 어느 날 나에게 물었다. ‘난 왜 정장이 싫을까?’, 검은색 정장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싶었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정장을 사서 편안해질 때까지 매일 입었다. 출근부터 캠핑, 자전거 타기, 암벽 등반, 하이킹, 오토바이 수리 등 정장을 입고 별의별 짓을 다 했다. 이 무렵 나는 와이든 앤 케네디에 취직해 포틀랜드로 이사했는데, 이삿짐을 실은 트럭을 몰고 전국을 횡단하기로 결심했다. 8~9일 정도 걸렸던 것 같은데, 이때부터 검은색 정장을 입고 셀프 카메라를 찍으며, 수트맨의 여행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노란색 틴트 렌즈를 고집하는 이유는?

언젠가 올림픽 장거리 사격 선수로부터 노란색 렌즈가 시각적으로 선명하고 깊이 인식이 뛰어나 눈부심을 줄여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랗게 착색한 렌즈는 야간 시력도 향상시킬 수 있어서 심야의 도로를 달려야 하는 대륙 횡단 운전에도 제격이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특정 브랜드의 수트가 있나?

내 첫 수트는 요지 야마모토의 검정 수트였다. 요지 야마모토와 함께 일하고 나서는 나에게 A.A.R. 수트를 후원해주기도 했다. 이후 아네스베(agnès b.)와 협업한 수트를 입기도 했지. 그러나 평상시에는 내 맞춤 수트를 입는다.

비즈빔(VISVIM), 디타(Dita) 등 다양한 패션 브랜드와의 협업 또한 떠오른다. 이들과의 협업은 어떻게 진행하게 되었나?

비즈빔, 디타의 디렉터와는 친구 사이로, 홍콩과 상하이에서 열린 나의 50번째 생일 이벤트를 위해 협업 제품을 출시했다.

이번 전시와 함께 발란사와의 협업 컬렉션을 선보였는데.

작년 발란사에서 진행한 라스타 타이거(Rasta Tiger) 팝업 이벤트를 위해 부산에 방문했다. 그때 발란사와 2024년 계획을 논의했다. 2024년은 발란사의 창립 15주년이자 수트맨이 3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고, 이를 기념해 발란사의 새로운 공간에서 수트맨의 전시회를 열고, 발란사 x 수트맨 컬렉션을 런칭하기로 했다. 수트맨의 30년 아카이브를 한 공간에서 전시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아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그간 많은 국가와 도시를 방문했는데, 특히 인상 깊었던 도시가 있었다면.

지난 30년 동안 정말 많은 곳을 여행했고, 좋은 추억도 그만큼 많다. 수트맨의 여행을 대표할 만한 곳을 꼽을 수는 없겠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온종일 아이슬란드 도로에서 차를 몰았는데, 그 긴 시간 동안 단 한 명의 사람도 마주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눈보라 한가운데 자동차가 도랑에 빠져 한참을 고생했다.

낙타를 타고 이집트의 황량한 서부 사막을 지나다 한 무리의 독일인 관광객과 마주쳤다. 그때 난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들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어땠을지 상상이 가는가? 수트를 입고 낙타를 타고 있는 동양인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웃기 시작했지.

쿠바에서는 오토 나이프와 황동 너클을 든 세 명의 남자와 함께 차를 탔다. 1950년형 쉐보레 벨에어 뒷자석, 그 자리까지 기억이 생생하다.

티베트 수도원에서 머물 때는 늦은 저녁까지 토론하는 50~60명의 승려가 서로 소리를 지르고 고함치는 걸 목격하기도 했다.

모바일 사운드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 음악 프로젝트 라스타 타이거를 진행 중이기도 한데, 이에 관해서도 설명해 줄 수 있나.

2007년 홍콩으로 이주할 일이 있었다. 새로 살게 될 집을 둘러보는 겸 여러 동네를 돌아다녔는데, 문득, 내 음반 컬렉션을 거리에서 틀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휴대용 레코드플레이어를 들고 나가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었지. 이게 라스타 타이거의 시작이었다. 코로나바이러스(COVID-19)로 인한 팬데믹 봉쇄 기간 사운드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하고, 이를 좀 더 정교하게 구축하기로 마음먹었다. 사태가 완화된 이후에 홍콩의 오프라인 이벤트에서 이를 다시 선보였다. 이 사운드 시스템은 현재 부산의 발란사에서 만나볼 수 있고, 날씨가 풀리면 다시 운영할 계획이다. 더욱 자세한 정보는 이곳을 통해 보길 바란다.

라스타 타이거의 음악을 통해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지 궁금하다.

별건 없다. 그저 내 음악을 듣고 싶은 이들과 공유하고 싶을 뿐이다.

당신이 직접 사운드 시스템을 제작했다고 들었다, 음향기기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있었나?

홍콩에서 카 오디오 부품 가게를 운영하는 ‘미스터 리’에게 도움을 받았다. 라스타 타이거 사운드 시스템의 모든 장비는 중고다. 몇 번이나 시행착오를 겪으며 하나하나 배웠다.

다양한 음악 장르 중 라스타를 선택한 건 단순히 당신이 좋아하는 장르이기 때문인가?

물론이다. 레게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 장르다.

작년에는 서울과 부산에서 라스타 타이거 팝업을 진행했다.

한국의 친구, 동료들과 함께 멋진 공연을 펼쳤다. 한국 레게 신(Scene)의 인기를 실감한 순간이었다. 한국에서 더 많은 레게 애호가를 만나고 싶다.

사진부터 그림, 음악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프로젝트는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장르가 또 있나.

새로운 걸 배우기에 아직 늦지 않은 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예술과 디자인에 대한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고 있다. 또한 건축 경험도 있지. 스스로 꽤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항상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연마하는 걸 좋아한다. 최근에는 도자기 작업을 하고 있다. 이게 또 꽤 재밌어서 곧 도자기로 된 수트맨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예술을 보고 즐기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제 작업을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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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 오욱석
Photographer | 강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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