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본지에 꽤나 자주 얼굴을 비췄던 인물 곽경륜. 스케이트 비디오와 브랜드로 소개되던 그가 어느새인가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더니, 그게 벌써 햇수로 4년이 넘었다. 그사이 이름만 대면 알 법한 브랜드와의 협업을 수 차례 진행했고, 먼 타국에서 전시까지 진행했으니 명실공한 한 명의 아티스트가 됐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그런 그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명 ‘Depth’, 지난 시간 그림에 몰두한 곽경륜에게 퍽 어울리는 제목이다. 벽에 건 작품 또한, 기존의 작업을 한 꺼풀 벗겨낸 듯하다. 첫 개인전, 어떤 그림을 걸어두었을지 궁금해 서둘러 전시장을 찾았다. 평소 거추장스러운 걸 부담스러워하는 그의 성미에 질문지도 챙기지 않았다. 그저 커피 한 잔 시켜두고 이번 전시, 그리고 그간의 거취에 관해 물었을 뿐. 녹음기에 담긴 90분가량의 대화를 쭉 풀어 놓았으니 평소 곽경륜이라는 인물에 호기심을 지녔던 이라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겠다.
이번 전시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어?
작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슈프림(Supreme) 서울 스토어 윈도우 페인팅을 했거든. 그 작업을 마치고, 슈프림 서울 디렉터 규희 누나가 전시 같은 거 하고 싶으면 연락 달라고 했어. 서포트해 주고 싶다고. 그 뒤로 다른 일 하면서 바쁘게 지내다가, 규희 누나의 제안이 생각났고 바로 연락해서 전시 계획을 잡았지.
남이 아닌 네 의지로 전시를 열었는데, 특별히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어?
올해는 계속 일만 했어. 브랜드 작업 하나를 끝내면, 운이 좋게도 바로 그 뒤를 이어 협업이나 외주가 있었고. 그런데 브랜드 일이라는 게 100% 내가 원하는 작업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여태까지 브랜드와 일할 때 캐릭터 위주의 작업을 많이 해왔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
브랜드와의 협업에서는 주로 캐릭터를 많이 선보였잖아, 그건 순전히 클라이언트 쪽의 요청이었어?
브랜드 일은 주로 그런 방식으로 진행되지. 클라이언트의 요청을 최대한 이해한 뒤, 내 스타일을 그들의 브랜드 색깔과 조화롭게 섞어 좋은 결과물을 만드는 일. 이게 기본이야.
그런 협업의 물꼬가 터진 게 인터내셔널(The Internatiiional) 아냐?
맞아, 인터내셔널이 열심히 다져온 네트워크가 큰 도움이 됐어.
그 이후로 네가 체감할 정도로 반응이 좋았던 협업이 있었어?
브랜드 협업보다는 내 개인 작업 중에 반스(Vans) 하프 캡(Half Cab) 커스텀 했을 때, 사람들이 그걸 좀 많이 좋아했었어.
그건 개인 주문 요청도 많았을 것 같은데.
DM으로 커미션 요청이 많이 왔었어. 하지만, 커미션을 받거나 판매는 따로 하지 않았어. 허프(Huf) 팀 스케이터 딕 리조(Dick Rizzo)에게서도 DM이 왔었지. 내가 보드를 탈 때 좋아하던 스케이터였는데, 마침 사이즈 맞는 그린 하프 캡이 한 켤레 있어서 선물로 보내줬어. 그 친구 신발 스폰서가 반스여서 가능한 일이었지. 그리고 LA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 알렉시스 그로스(Alexis Gross)에게 연락이 와 그녀의 작업물을 내 신발과 트레이드했어.
다시 전시 얘기로 돌아가서, 이번 전시 제목을 ‘Depth’라고 지었잖아.
깊이라는 게 물리적 깊이일 수도 있고, 감정이나 생각의 깊이, 혹은 질적 수준을 나타낼 수도 있는, 해석의 폭이 굉장히 넓은 단어야. 조금 고리타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요즘은 어떤 주제든 깊이에 관해 이야기하려 하면 ‘꼰대’라는 말을 듣는 세상이 된 것 같아.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본질에 굉장히 가까워. 자신이 하는 일에 더 몰입하고 고민했을 때, 그 순간은 외롭고 고될지 몰라도 그런 자세에 익숙해지면 어떠한 고집이 생기거든. 그때 자신의 스타일도 잡히고, 작업을 더 즐길 수 있게 되는 것 같아.
그림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소재를 어디서 찾아왔는지도 궁금하네.
아, 흑표범은 그냥 내가 좋아하는 동물이야. 특히, 먹잇감을 노릴 때 고요하게 집중하는 그 특유의 시선이 있어. 그 눈빛이 마음에 들어. 그 분위기를 그림에 담고 싶었어. 그래서 흑표범과 악어를 소재로 세 작품을 그렸고, 작품 제목도 전부 ‘Gaze’야.
동물 그림이 진짜 쉽지 않다고 하던데.
진짜 그리기 어려워. 사람은 어떻게 왜곡해도 얼굴에 눈, 코, 입 있고, 손가락, 발가락 달려 있으면 대충 사람인 줄 알잖아. 근데, 동물은 그 특징을 딱 짚어서 그려야 그 동물인 줄 아니까. 특히, 흑표범은 사자나 기린처럼 흔한 동물은 또 아니라 다큐멘터리 계속 보고, 인터넷에서 뼈대, 근육 나와 있는 해부학 그림까지 찾아서 보고 그렸지.
세로형 캔버스에 그린 촉수 연작, 이건 어떻게 나온 그림이야?
나는 스케치 없이 그리는 프리핸드를 즐기는데, 그런 그림을 그리다 보면 몇 번을 다시 그려도 흉내 낼 수 없는 획이나 선이 분명히 있어. 아마도 그건, 절대로 다시는 느끼지 못할 그때의 내 기분이나 감정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어. 그래서 그런 순간이 굉장히 희귀하고 특별하다고 느껴. 스프레이로 큰 영역을 나누고, 최대한 그 획과 선을 살리면서 에어브러시로 디테일을 더해본 그림이야.
지금까지 한 협업 중 특히 마음에 들었던 작업은?
예전에 인터내셔널이랑 레이브 레이서즈(Rave Racers)까지 셋이 협업한 티셔츠 그래픽. 그건 꽤 좋았어.
한때 스케이트보드를 열심히 탔던 입장에서 DGK와의 협업도 의미 있었을 것 같은데.
그치. DGK의 OG 스케이터인 조쉬 칼리스(Josh Kalis)와 스티비 윌리엄스(Stevie Williams),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러브파크(Love Park)가 그려진 데크 디자인을 했어. 내가 좋아하던 스케이터들의 데크 그래픽이라 정말 재밌게 작업했었어.
DGK도 네가 보드 탔다는 걸 알고 있었어?
전혀 몰랐을걸? DGK에서 연락했을 당시에는 내 인스타그램 계정에 보드 관련된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이전 인터뷰에서도 물어봤던 건데, 이제 보드에는 진짜 아무런 미련도 없어?
미련은 없어. 이제는 한 걸음 물러서서, 즐기고 있을 뿐이야. 10년 전 보드 탈 때도 그랬지만, 난 아직도 길거리 위에서 스케이터들이 제일 멋있다고 생각해.
스케이트보드에서 멀어진 가장 큰 이유는 뭐야?
뭔가 좀 질린 것도 있고. 어쨌든 보드를 즐기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잖아. 멋진 비디오를 보는 게 있을 테고, 스케이트보드에 관한 걸 디깅하는 것, 아래 세대를 서포트하는 것 등등 다양할 텐데. 나한테는 보드 타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어. 나름 10년을 넘게 탔는데, 욕심만큼 실력이 안 늘었지. 그렇게 점점 흥미를 잃었던 것 같아. 나이 들면서 힘에 부치는 것도 있었지. 그리고 보드 탈 때 항상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어. 데드맨콜링(Dead Man Calling)이라는 브랜드 운영하면서, 그걸로 비디오도 찍어보고 싶었지만, 스케이트보드라는 게 그걸 혼자 할 수가 없거든. 나만 잘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내 주변으로 사람을 모아야 하는데, 내가 그럴 깜냥이 안 되는 것 같았어. 지금 그림 그리면서 제일 좋은 게 그거야. 그림은 나만 잘하면 되니까. 그림에만 신경 쓰고 좋은 작품 만들면 되는 거라서 편해.
10년 동안 보드 탔을 때보다 오히려 지금 그림으로 더 주목받고 있는데, 기분이 어때?
인스타그램 팔로우 늘고, 이런 거 말고는 전혀 체감이 안 돼. 애초에 내가 그림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둬야겠다. 이런 마음으로 시작한 게 아니니까. 보드 그만 타게 되면서, 시간 때우려고 시작한 게 지금 이렇게까지 된 거지. 아직도, 내가 작가로 소개되고, 그렇게 불리는 게 어색해. 보드만 탈 때보다는 조금 윤택해지기는 했지. 근데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거 같아.
오랜 시간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가 다시 펜을 잡았는데, 스타일을 빨리 찾은 것 같아.
그렇지. 대학교 이후로 처음 그림을 그린 거니까. 나도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브랜드 운영하면서 맨날 비주얼 자료 디깅하고, 그림 많이 본 게 알게 모르게 큰 도움이 된 거 같아. 남이 그린 그림 보면서 나였으면 이걸 빼고, 이런 걸 더했겠다. 이런 상상 진짜 많이 했거든. 쉐도우 복싱하는 것처럼. 그때 외장 하드디스크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에 내가 인상 깊게 본 자료를 계속 모았어. 근데, 그 외장 하드에 들어가는 기준이 진짜 까다로웠거든. 그림체는 물론, 선 굵기까지 따져가면서 폴더에 넣었으니까.
하루에 몇 시간 정도 그림 그려? 작업량이 장난 아닌 것 같은데.
에어브러시로 그리는 건 진짜 10시간도 넘게 그리지. 한번 그리면 완성해야 직성이 풀려. 일단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돼. 에어브러시로 그리든, 펜으로 그리든, 웬만하면 항상 책상 앞에 앉아 있으려고 하는 편이야.
오래전 일이지만, 그래도 페니스콜라다(Peniscolada), 데드맨콜링까지, 몇 가지 브랜드를 운영해 봤잖아. 이제는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새 브랜드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어?
아예 없지는 않지. 그런데 그걸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어. 몇 년간 외주로 먹고살고는 있지만, 이런 좋은 시절이 계속될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어. 그렇다고 해서 성급해질 필요는 없는 것 같아. 급하게 한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니까. 지금은 적절한 때를 기다리며, 차근차근 준비하는 데 집중하고 있어.
이번에 처음으로 한국에서 전시했잖아. 소감이 어때.
정말 좋았어. 기회가 된다면 또 하고 싶어. 빡세게 준비한 만큼 뚜껑을 열었을 때 거기서 오는 아드레날린이 있더라고. 방문해 준 친구들과 마이크로 서비스(Mirco Service)의 현일이 형, 승민이 누나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
이번 전시 준비하면서 깨달은 것도 있어?
하루빨리 작업실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 지금까지는 내 방에서 작업해 왔는데, 이번에 캔버스 그림을 그리면서 스프레이를 쓰다 보니 불편함이 많았던 것 같아. 공간적인 제약도 물론 있었고, 넓은 공간이 있다면 더 수월하게 작업하고 새로운 시도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Editor │ 오욱석
Photographer │ 강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