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 THE RECORD – #2 도시 음악

여행하며 음반을 많이 샀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만큼 음반 가게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요. 맛있는 음식을 생각하듯, 그곳에만 있는 음반을 기대했습니다. 출발 전 의식처럼 도시와 어울리는 음악을 미리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그렇게 할 수 없게 됐고요. 코로나 이후 온라인 레코드 판매량이 엄청나게 늘었다고 하죠. 일단 집에서 즐길 수 있는 일이라서겠지만, 모르는 언어와 악기, 혹은 모르는 시대와 사람들이 부른 음악에서 찾을 수 있는 즐거움 때문이기도 하겠죠. 열 개의 도시와 거기에 어울리는 레코드 수록곡을 골랐습니다. 이번부터 원고와 더불어 공개될 플레이리스트와 함께, 철저히 주관적인 경험과 의견으로 꾸린 열 곡의 도시 음악입니다.

Writer │유지성(Jesse You)


LOS ANGELES

LA는 훵크입니다. Dam-Funk의 Funkmosphere는 멋진 원맨쇼였고, Moon B의 라이브를 포함한 리틀 도쿄의 작은 파티도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LA는 힙합입니다. SOLAR 레코즈와 후기 모타운의 활약만큼, Death Row와 Ruthless 레코즈의 역사는 LA라서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LA는 록입니다. The Beach Boys와 Van Halen, 할리우드에 여전한 ‘선셋 스트립’ 전성기의 흔적, 스케이터와 서퍼들이 있습니다. 에코 파크 근처에 머무르며 선셋 블루바드를 쭉 따라 걸으면 하루가 금방 갔습니다. 다리가 아프고 두 손도 무거워질 즈음 낮과는 완전히 다른 LA의 밤이 열렸고요. LA 출신, 암스테르담의 전자음악가로 이미 알려진 Suzanne Kraft의 새 음반은 인디 팝, 슈게이징으로 분류할만한 록입니다. 노을 같은 ‘Blush’로 A면이 마무리되면, 노이즈가 폭발하는 B면이 시작됩니다.

Suzanne Kraft – Blush 

BERLIN

밤만 생각납니다. 중앙역에 도착했을 때도 상당히 늦은 시간이었는데, 예상보다 더 황량한 풍경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일어나면 해가 지고, 눈이 오다 비가 왔습니다. 11월의 베를린은 바닥이 항상 젖어있었습니다. 미끄럽고 축축했습니다. 싫진 않았고, 호텔 로비에서 팔던 코코넛 워터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됐습니다. 계속 밤이니 술 마시는 것 말고는 하고 싶은 일이 별로 없어 맨날 술집에 가면, 어디서든 음악이 나왔습니다. 꽁꽁 문을 닫고 빛도 들지 않아서인지 그 공간이 그대로 음악에 묻었습니다. 콘크리트를 울리는 테크노와 나무 방의 어쿠스틱 기타 같은 것들이었죠. Ashra의 ‘Shuttle Cock’은 1977년 베를린에서 녹음된 음반입니다. 서독의 베를린은 지리적으로 섬과 같은 곳이었고, 날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았겠죠. 오가는 셔틀콕을 반복되는 메트로놈이라 상상하며 듣곤 합니다. 

Ashra – Shuttle Cock 

KYOTO

교토를 도쿄보다 좋아합니다. 오래된 도시가 이럴 수 있을까 싶은 구획의 단정함, 심야의 의외로 흐트러진 사람들, 맛있는 가정식, 시청 근처의 상점들, 정복을 입은 택시 운전사까지 이유라면 무척 많습니다. 젯셋 레코즈에서 교토 대학교까지 자전거를 몰고 가며 Mariya Takeuchi가 부른 ‘On The University Street’의 경쾌함을 대입해보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 교토에서는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로컬 파티에 초대받아 음악을 틀었고, 가장 열렬한 관객들을 만났습니다. 누가 일본 파티 관객들이 소극적이라 했나요? 그날 벌어진 일은 그날만 기억하기로 하고, 다음날 그 맛있는 가정식을 먹으며, 함께 튼 디제이의 음반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의 디제이 셋처럼 훌륭한 음악이 들어 있었습니다.

Sintaro Fujita – Suu Jin 

AMSTERDAM

회사에서 한 달 휴가를 얻어, 2주를 지냈습니다. 암스테르담의 5월 날씨가 이런 건 기적이라는 룸 호스트의 말만큼 여러모로 운이 좋았습니다. Red Light Records와 도보 5분 거리에 숙소를 잡고, 도장깨기 하듯 레코드 가게를 다녔습니다. Roy Ayers의 공연을 보고, 그날 같이 줄 선 디제이가 Jamie 3:26이라는 건 그다음 날 알았습니다. Orpheu The Wizard와 Tako가 레코드 가게에 수시로 드나들고, 커피를 마시다 Marcel Vogel을 마주쳤습니다. Lente Kabinet 페스티벌에서 Hunee와 Interstellar Funk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De School로 향하는 자전거 행렬에 동참했습니다. 뜬구름 같던 암스테르담의 음악 신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거대하기보다 친밀하고, 폭발하기보다 지속가능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긍정적 기운이 고스란히 담긴 듯한 네덜란드 부기, The Limit의 ‘Say Yeah’ 7인치를 사서 돌아왔습니다. 

The Limit – Say Yeah  

BANGKOK

다섯 번은 넘게 간 것 같은데,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습니다. 처음 방문에서는 좀 헤맸습니다. 방콕은 골목의 도시고 골목, 그러니까 ‘Soi’에 대한 이해 없이는 제대로 볼 수 없으니까요. 두 번째부터 신나게 돌아다녔습니다. 동네마다 가고 싶은 이유가 생겼죠. 에카마이의 레게 바와 카페, 클롱 터이의 거대한 시장과 오리 국수, 파툼완의 언제나 파란 룸피니 공원과 교복 입은 학생들이 있는 쭐랄롱꼰 대학교 등등. 지도만 봐도 또 가고 싶네요. Porn Tawan의 ‘Tid Kiew Tiew Krung’은 다소 어렵던 첫 방콕 여행에서 산 7인치 수록곡입니다. 태국 음악인 몰람과 룩퉁 재발견의 물결 속에, Zudrangma 레코즈와 Studio Lam을 꼭 가려고 숙소를 아예 그 길 건너에 잡은 여행이었고요. 서울만큼이나 빠르게 변하는 방콕이지만, 두 가게만큼은 쭉 남아있었으면 합니다. 

Porn Tawan – Tid Kiew Tiew Krung

NEW YORK

뉴욕은 거대한 음악 박물관이나 다름없겠죠. Patti Smith와 Leonard Cohen의 첼시 호텔을 기웃거리고, 힙합의 발상지인 브롱스 1520 Sedwick Ave를 방문하는 식의 계획이 저만의 즐거움은 아닐 것입니다. 일단 JFK 공항에 내리자마자 클럽에서 수도 없이 들은 ‘Funkin’ For Jamaica’의 자메이카가 코앞이란 사실부터 흥분되는 일이니까요. 뉴욕의 건축물은 상호나 용도가 바뀌어도 건물 자체는 그대로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클럽 파라다이스 개러지 건물은 몇 년 전까지 통신사 버라이즌의 차고로 쓰였습니다. 공연장 CBGB의 흔적은 존 바바토스 매장에서 찾을 수 있고요. 그 둘 사이 어디쯤에서 큰 인기를 얻은 Tom Tom Club의 1988년 CBGB 공연 셋리스트가 웹상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Genius of Love’는 두 번째 곡으로 불렀네요. 그다음 해에 녹음한 라이브 버전으로 그 에너지를 짐작해봅니다. 

Tom Tom Club – Genius Of Love (Live)

RIO DE JANEIRO 

출발 전 ‘Bicicleta’의 뮤직비디오를 아주 열심히 봤습니다. Marcos Valle가 해안도로를 따라 자전거를 신나게 타는 그 노래 말이죠. 리우 올림픽을 앞둔 해였고, 도시의 일부는 상당히 들뜬 듯 보였습니다. 코파카바나 해변 근처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고요. 보사노바의 발상지, 코파카바나 동네 사람들은 무척 친절했습니다. 물어 찾아간 레코드 가게에서 보사노바, 삼바, MPB 음반을 샀습니다. 원래 사려던 음반은 썩 찾지 못했지만, 귀국 후 이 Tamba Trio의 음반은 닳도록 자주 들었고요. 이 서정적인 노래에 ‘거머리’란 제목은 무슨 의도일까 지금까지도 궁금합니다. 곧장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베를린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는데, 우습게도 리우가 아닌 거기서 만난 친구와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와 ‘흑인 오르페’ 얘기를 하며 술을 마셨습니다. 리우는 여러모로 여행이 덜 끝난 기분이라, 꼭 다시 가보고 싶은 도시입니다. 

Tamba Trio – Sanguessuga

CEBU

세부 시내와 막탄 섬 중 막탄 섬에서 머무르며 다이빙을 배웠습니다. 한숨 자고 밤이면 시내로 나왔고, 그럴 때마다 택시를 탔습니다. 라디오에선 대부분 타갈로그어 대신 영어로 말했고, 영어 노래가 나왔습니다. 더위가 어느 정도 누그러지는 시간이라, 시끌벅적한 음악보다는 차분한 곡이 반가웠고요. ‘어덜트 컨템포러리’나 AOR의 도시가 아무래도 LA와 도쿄라면, 필리핀 택시에서 나오는 음악은 좀 더 넓은 범위의 ‘컨템포러리’에 가까웠습니다. 따라 부르기 좋고, 멜로디 확실하고, 편안한 리듬의 노래를 들으며 매일 왕복으로 긴 시간을 택시에서 보냈습니다. 예를 들면 Glenn Medeiros, Boyz II Men, Al Green을 하나의 그룹으로 묶는 독창적 계열화가 이뤄진 느낌이랄까요. 어떤 필리핀 가요의 멜로디가 너무 환상적이라 제목을 물어 적어두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올드팝이라 부르기엔 그 애정과 지향점이 선명합니다. 나이가 무색한 10대 소년 Tevin Campbell의 절창처럼 말이죠.

Quincy Jones Feat. Tevin Campbell – Tomorrow (A Better You, Better Me)

HONG KONG

뉴욕이 음악 박물관이라면, 홍콩은 특히나 영화 애호가의 도시이기도 할 것입니다. 음반 가게에서도 배우들의 이름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매염방의 ‘Plastic Love’는 이미 유명해졌고, 장국영의 음반들도 음반 가게에서 아예 독립적인 코너를 갖고 있을 정도죠. 잘 알려진 것처럼 매염방과 장국영 모두 가수가 먼저입니다. [HOT SUMMER]는 시원한 음반입니다. 마돈나의 ‘Everybody’ 커버곡을 비롯해, 이탈로 디스코 계열의 댄스 트랙이 주력으로 포진한 음반이죠. 하지만 장국영은 그가 제일 잘하는 일도 잊지 않았습니다. ‘再戀’는 Eagles의 창립멤버 Glenn Frey의 솔로 데뷔작 ‘The One You Love’를 다시 부른 곡입니다. 장국영의 목소리는 역시나 느린 곡에 더 잘 어울리고, 이글스의 선율엔 당연히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장국영 – 再戀

SEOUL

서울에서 여행한다는 감각을 갖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나와 다른 세계를 발견할 때의 기쁨이 그것과 비슷한 인상이 들게 합니다. 실로 서울에 살며 서울을 긍정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모임 별의 ‘태평양’ 뮤직비디오를 처음 봤을 때, 크게 떠들진 못했지만 부럽고 신기하고 충격적인 기분이었습니다. 저 사람들은 누구인데 나와 같은 도시에 살며 이렇게 재미있는 일을 벌일까. 한 무리의 친구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서울에 살고, 서울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종종 그 영상을 봅니다. 다행히도 모임 별은 여전히 서울에 있고, 현재진행형입니다. 모임 별이 음악을 담당한 영화 <십개월의 미래>가 가을에 개봉합니다.

모임 별 – 태평양 


*해당 에세이는 지난 VISLA 매거진 17호에 실렸습니다. VISLA 매거진은 VISLA 스토어에서 구매하거나 지정 배포처에서 무료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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