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다리를 바닥에 디딘 채 몸 전체를 담가야 비로소 강물의 깊이를 알 수 있다. 당신은 사랑에 온전히 몸을 내맡긴 적이 있는지? 각자가 느낀 사랑의 온도와 무게는 다 다를 것이다. 이번 테마 플레이리스트는 VISLA도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주제인 사랑이다. 부끄럼 없이 자기 이야기를 꺼낸 7명이 과연 어떤 음악을 선곡했는지 귀 기울여보자.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 Jeremih – Fuck You All The Time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받은 느낌은 “섹스 송(Sex Song) 역시 퓨처 감성에 접어들었구나”였다. 당연히 신선할 수밖에. 그때는 ‘뉴스쿨’이라고 칭하던 트랩 기반 퓨처 트랙에 한창 관심이 많을 때였다. 기존에 들어온 음악보다도 샘플 차핑(Choping)이나 사운드 디자인이 곡에 더욱 집중하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프로듀서 ‘FKi’의 이름을 각인시켜준 노래이기도 하다. 제레미(Jeremih)의 목소리와 여자 보컬까지 더해지니 이보다 완벽한 섹스 송이 있을까. 여자 보컬과 일렉트릭 피아노가 만나는 약 2초 때부터 바로 본격적인 전희가 시작된다. 아 참을 수 없다…
2. 파라솔 – 너의 자세(Your Posture)
사랑 노래를 만드는 건 정말 어렵다. 상상만으로 상황을 그리던, 나 자신, 혹은 지인들의 경험에 기반을 두던 간에 막상 쓰기 시작하면 쉽게 과하거나 진부해진다. 작년에 파라솔의 음악을 많이 들었는데, 정규 1집 [언젠가 그날이 오면] 앨범에 수록된 곡, “너의 자세”를 소개하고 싶다. 퉁명스럽기도 하고 장난스럽기도 한데, 연인들의 에피소드를 담백하게 전개하는 노랫말은 이와 똑 닮은 자연스러운 사운드, 멜로디와 조화롭게 어울린다. 함께 공개된 뮤직비디오는 교회에서 촬영되었다. 저예산이지만, 참신한 기획과 디테일한 연출이 완성도를 높였다. 당연히 종교적인 색채가 담긴 작품은 아니지만, 한국 교회라는 소재가 주는 그림들은 수위가 높은 몇몇 한국 영화의 냉소적인 태도를 떠오르게 했다. “너의 자세”는 정말 잘 만든 사랑 노래다. 과하거나 진부하지 않은 데다가 귀엽기까지 하니.
3. Hubert Laws Quintet – Land of Passion
‘사랑’이라는 주제를 듣자마자 떠오른 곡이다. 이 곡은 가사가 없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특별한 무드라고 생각한다. 그 무드에 가장 알맞은 곡이고, 이 노래를 알게 된 계기 또한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였다. 이 곡을 샘플링해서 “nodancerinhere”이라는 곡까지 만들었으니 나에게 “Land of Passion”은 봄, 그리고 사랑이라는 낱말에 가장 적합한 노래라고 할 수 있다.
4. James Blake – I Need a Forest Fire
언제부터였을까. 성숙한 사랑을 꿈꿨지만, 시간이 늘어질수록 나는 유년기 같은 행동만 반복할 뿐이었다. 운명 같은 인연, 내가 만들어낸 어떤 주술적 관계를 지키기 위해 나는 나대로, 상대방은 상대방대로 정해진 선을 따라 그리기만을 바랐다. 그 선에서 벗어난 사랑은 그리 멋진 게 아니었으니까. 정작 텅 빈 그림에 갇힌 건 나였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가벼운 말들로 재미도 봤지만, 얕은 밑천은 금방 탄로 나기 마련. 그럴 때쯤 가시 돋친 언어로 관계를 그르치고, 연애란 건 어설픈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것밖에는 다른 유산을 남기지 못했다.
허물어진 관계. 헤집어 놓아서 더는 못 쓸 감정들. 차라리 다 타버리는 편이 나았다. 설령, 폐허로 남을지라도 다시 물이 흐르고, 넓은 이파리가 피던 그 시절의 숲을 꿈꾸기 위해 나는 이곳을 완전히 태워야 했다. 스스로 제어하기 힘든 잔여 감정을 마저 연소시키려고 비비적대던 때, “I Need a Forest Fire”는 피부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곡이다. 결국, 다 태웠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다. 썩 나쁘지 않은 지금 기분을 그저 즐길 뿐. 한동안 미뤄왔던 나 자신을 돌보는 일도, 이기심을 드러내는 일도 아직 어색하지만, 적어도 거짓은 아니니까. 허름한 민낯이 드러날까 노심초사하던 과거의 연애, 어떻게든 덮어두려고 지어낸 거짓말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나도 누군가의 아픔을 어루만질 수 있을까.
5. OVR U- Elliot Harris
나와 사랑은 거리가 멀다고 본다. 물론, 내 가족과 친구들을 사랑하지만, 연인과의 관계에서 나는 한 번이라도 상대방을 사랑해본 적이 있었나? 물론 짝사랑도 해보고, 누군가를 만나며 설레기도 했지만, 항상 시기가 좋지 않았다. “이 사람이다”라고 느낀 상대, 그를 향한 마음조차 접어야 했을 때, ‘역시는 역시’라며 내 마음을 달래준 곡이 바로 엘리엇 해리스(Elliot Harris)의 “OVR U”다.
6. 카더가든 – 너의 그늘
구 메이슨 더 소울(Mayson the Soul)에서 현 카더가든(Car, the Garden)으로 얼마 전부터 새롭게 활동을 시작한 나의 술친구 차정원의 첫 번째 싱글 앨범 수록곡이다. 사운드 구성이나 멜로디 라인이 무척 훌륭하고,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는 게이 같은 보컬이 새벽 시간과 잘 어울린다. 나는 사랑하던 여자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남녀관계에서는 서로의 색깔을 받아들이고, 감정의 온도를 맞추는 일이 무척이나 어렵다는 걸 느꼈다.
누구나 완벽한 사랑을 꿈꾸지만, 각자가 지닌 온도는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진심을 담아낸 따뜻한 음악들로 서로에게 부족한 온도를 조금은 채울 수 있지 않을까. 그늘은 기분 좋은 바람으로 더위를 식혀주는 쉼터가 되고, 사랑하는 그늘이 항상 곁에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항상 그늘이 되어주는 상대 곁에 편안히 안도하고 있다면 기꺼이 쉼터가 되어줄 만큼 따뜻한 곡이다. 물론, 앨범 커버는 내가 디자인했다.
7. Lou Reed – Perfect Day
직업 특성상 거의 온종일 음악을 듣지만, 매번 찾는 뮤지션이나 특정한 장르를 고집할 정도의 플레이리스트가 있는 건 아니다. 그 정도로 음악적 소양이 풍부한 편도 아니고. 그러나 “다음에 어떤 노래를 듣지?”라는 생각을 하다가 딱히 좋은 해답이 나오지 않을 때는 항상 루 리드(Lou Reed)를 튼다. 좋아하는 뮤지션이기도 하고, 언제나 내 귀에 듣기 편한 노래를 불러주시니까. 그중에서도 이 곡, “Perfect Day”는 루 리드를 대표하는 곡이자 개인적으로도 각별한 노래다.
나는 작년, 9년 연애 끝에 결혼했는데, 청첩장에 이 곡의 가사를 그대로 적어 넣어서 지인들을 초대했다. 결혼식 내내 이 노래를 틀어놓기도 했다. 그 날은 그야말로 ‘퍼펙트 데이’였으니까. 노래는 아주 평범한 일상을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공원에서 상그리아를 마신다든지, 동물원에서 동물에게 먹이를 준다든지.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평범한 사랑을 나누는 날, 또는 그런 기억이 가장 완벽한 하루가 아닐까 한다. 물론 좋을 때고 있고, 나쁠 때도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