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디제이는 누구일까. 물론, 이건 ‘세계에서 가장 싸움 잘하는 남자’라든지 ‘세계에서 가장 예쁜 여자’를 뽑는 것과 같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그러나 인간은 역사적으로 순위 매기기에 목숨 걸어 왔다. 그것만큼 흥미로운 소재도 없으니까. 자, 당신이 밤마다 술에 흠뻑 젖어 어둑한 조명 아래 춤 좀 춰본 파티 피플이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디제이 몇 명쯤은 열거할 수 있겠지. 아마도 많은 디제이의 이름이 언급될 것이다. EDM, 힙합, 하우스 등 각자의 영역 그 정점에서 플레이하는 디제이들은 분명, 디제이 꿈나무나 현역 디제이에게도 관찰과 분석의 대상이 될 것.
이번 테마의 주인공은 세계 최고의 디제이 세 명을 꼽으라고 했을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이름, DMC 월드 디제이 챔피언십 최연소 우승자이자, 당대 3대 메이저 컴피티션(DMC, ITF, Vestax) 우승, 총 5회 세계 대회 우승이라는 믿기 힘든 커리어를 일찌감치 거머쥐고 세계적인 뮤지션으로 급부상한 에이트랙(A-Trak)이다. 마치 8체급을 석권한 파퀴아오 마냥 뭔 놈의 우승을 그리도 많이 했는지, 그 시절에 이미 턴테이블 신을 쥐락펴락한 꼬맹이는 힙합과 전자음악을 넘나드는 흥미로운 여정 속에서 어느덧 한 레이블의 수장이 됐다.
다채로운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며 뿌리 깊은 역사와 장인들의 고집 같은 것들이 모두 흔들리는 것 같던 때, 디제이 사이에서도 진짜 디제이 논란(#RealDJing)이 한바탕 휩쓴 적 있다. 그때 에이트랙은 베테랑답게 디제이가 순수한 디제잉의 영역보다는 폭죽을 터트리거나 가면을 쓰는 행위에 치중하는 걸 경계하자는 의미로 전 세계 디제이들에게 성숙한 조언을 건넸다. 그가 당시 EDM 신(Scene) 안에서 얼마나 큰 열망을 가지고 있고,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2012년, 허핑턴포스트에 기고한 “Don’t Push My Buttons”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자, 말이 길었다. 턴테이블을 만지기 시작한 13살부터 지금 댄스 음악의 중심에 서기까지, 변화를 거듭한 DJ/프로듀서 에이트랙이 만들어낸 노력의 결과물을 직접 두 눈으로 감상해보자. 대한민국에서 판 돌리는 숱한 디제이들 또한 그의 믹싱 스킬을 무던히도 연구했을 텐데-심지어는 그가 손가락에 침을 묻히는 행위까지도- 당장 오는 토요일에 헨즈 클럽에 온다고 하니 이날, 최신판 업데이트 버전의 에이트랙을 놓치면 안 될 것이다. 그의 디제잉을 구경하는 동안만큼은 이성을 꼬실 생각조차 들지 않을 테니.
읽기 귀찮은 상남자들은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좆되는 디제이, 에이트랙이 토요일에 홍대 헨즈 클럽에서 음악을 틀 예정이니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이나 기존 팬 모두 한바탕 텐션을 끌어올리자는 의미로 지난 믹스를 감상하며 사뿐히 예습해보자. 준비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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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C World Champion (1997)
15살짜리 꼬맹이가 내로라하는 디제이들이 모두 모이는 이 대회를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세라토고 뭐고 오로지 턴테이블 두 대와 믹서 하나만 있던 시절, 그는 앳된 얼굴로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비트 저글링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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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C World Team Performance (2000)
둘째가라면 서러운 턴테이블리스트인 DJ Craze와 함께한 무대로, 1997년에 챔피언을 먹었을 때와는 조금 다르게 드럼 앤 베이스 계열의 트랙도 루틴에 집어넣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배틀 디제이들이 흔히 보여주는 ‘등 뒤로 믹싱하기-이걸 칭하는 용어가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다-’를 비롯한 크레이즈와의 호흡이 “역시는 역시”라는 감탄사 외에는 뭐라 설명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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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 School A-Trak From The Allies (2002)
지금과는 상반된 옷차림의 에이트랙이 어색한가? 그러나 앞서 소개했듯, 에이트랙의 뿌리를 생각해본다면 알록달록한 모자와 박스 티가 그의 아이덴티티였다. 에이트랙은 200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턴테이블리스트에 충실한 디제이로 활동한다. 클럽, 페스티벌보다는 왠지 배틀 챔피언십이 더 어울리던 그가 이후 소개할 영상부터는 상당히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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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ot Rock Routine (2009)
CDJ와 세라토가 등장하고 EDM이 세계를 휩쓸면서 디제이 영역이 새롭게 정의되던 때, 에이트랙 역시 약 2007년을 기점으로 전자음악에 심취하기 시작한다. 댄스 음악에 뛰어든 그는 풀스 골드(Fool’s Gold) 레이블을 설립하고, 아만드 반 헬든(Armand Van Helden)과 하우스 듀오, 덕 소스(Duck Sauce)로 활동하며 그야말로 제2의 전성기에 불을 지폈다. 당연히 각고의 노력이 수반되었을 것. 그의 외모도 앳된 힙합 보이에서 약간의 과도기를 거쳐 가죽 재킷, 중절모를 걸친 멋쟁이로 거듭났다.
2000년대 후반, 유튜브에서 에이트랙을 검색하면 상당히 많이 보이던 게 바로 다프트 펑크(Daft Punk)의 킬링 트랙, “Robot Rock”을 지지고 볶는 루틴이다. 구석구석 애무하다가 감질나서 이제 본 게임으로 들어가고 싶을 그때 터져주는 카타르시스를 만끽할 수 있다. 힙합에 심취한 천재 턴테이블리스트가 자신의 스킬을 전자음악에 옮겨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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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Over (2009)
VISLA에서도 인터뷰한 적 있는 필르머, 글렌잼(Glenjamn)이 담아낸 2009년 두 오버(The Do-Over) 파티 라이브로, 에이트랙이 본격적으로 댄스 음악 신에 정열을 쏟아내기 시작할 즈음 선보인 믹스다. 이후 풀스 골드의 이름을 달고 나온 믹스셋은 강렬한 전자음악 위주의 트랙이라 아무래도 힙합 팬들에게는 큰 감흥을 주기 힘든데, 두 오버 믹스에 수록된 곡들은 그 균형이 아주 적절해서 관객으로서는 황홀할 정도. 트랙리스트 자체가 에이트랙 커리어의 변천사를 드러낸다.
단순히 곡을 잘 섞은 것 이상으로 적재적소에 터지는 라이브 믹싱 스킬 + 글렌잼의 마구잡이 앵글은 햇살 넘치는 LA에서 이들과 함께 어울리고 있는 듯한 묘한 현장감을 선사한다. 파티 초반에 들리는 “AAAA TRAK~” 사운드는 “FOOOOOOOOLS GOLD”와 함께 어느 순간부터 그가 플레이할 때 빠질 수 없는 시그니처 사운드가 됐다. 이제부터 플로어를 달구겠다는 선언이랄까. 이 영상은 여러 개의 파트로 나뉘어 있으니 본 편이 끝나도 이어서 감상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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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rbara Streisand (2010)
https://www.youtube.com/watch?v=uu_zwdmz0hE
이번에는 아만드 반 헬든 형님과 에이트랙이 함께 덕 소스라는 귀여운 이름의 듀오로 2010년에 발표한 트랙 하나 소개한다. 실제 미국 여가수의 이름을 빌린 트랙인 “Barbara Streisand”는 그 작명부터 디스코 기반의 트랙 분위기와 굉장히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중독적인 후렴구와 뮤직비디오가 모두 사랑스러운 덕 소스 대표곡. 전설적인 디스코 그룹, 보니 엠(Boney M)의 “Gotta Go Home”을 샘플링했다. 이 트랙은 물론, 2009년 싱글 “aNYway”나 “Barbara Streisand” 이후 발표된 “Big Bad Wolf”도 전 세계 디제이들에 의해 꽤 많이 플레이된 단골 메뉴. 덕 소스의 매력이 물씬 묻어나는 뮤직비디오에는 곡 제목의 주인인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를 비롯한 수많은 카메오가 등장해 유쾌함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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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ey Makin’ Routine (2012)
에이트랙의 필살 저글링을 특화시킨 시리즈, ‘Short Cuts’의 첫 번째 클립으로, 자신의 트랙 “Money Makin’” 프로모션 같기도 한 영상. 재밌는 점은 예전 턴테이블을 죽어라 비비던 시절에는 찾아볼 수 없던 화려한 외모가 장착된 것. 다양한 패션과 아이템을 사용해 퍼포먼스를 감상하는 재미를 더한다. 아마도 이 무렵, 존재감 하나만으로도 멋진 형, 아만드 반 헬든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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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y Ban x Boiler Room 016 Turntablist Set
아마 현재 유튜브에서 감상할 수 있는 에이트랙의 라이브 믹스 중 가장 최신판이 아닐까 생각한다. 레이밴(Ray-Ban)과 보일러 룸(Boiler Room)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시리즈에 16번째 주인공으로 발탁되어 턴테이블 세 대와 랩톱 두 대, 그리고 불빛이 화려한 MPC 계열 장비로 완전체 디제이의 면모를 보인다.
스킬풀한 턴테이블리스트가 플로어를 쥐락펴락하는 믹스를 선보이는 경우는 의외로 드문데, 에이트랙은 절대 분위기를 놓치지 않는다. 저글링에 심취한 나머지 믹스의 전체적인 흐름을 깨는 일도 없거니와 언제나 필요할 만큼만 크로스 페이더를 조진다. 완급 조절은 완벽하고, 항상 신선한 방식으로 다음 곡을 올려놓으니 관객으로선 흥분할 수밖에.
최근 발표된 저스티스(Justice)의 “Safe and Sound”를 비롯해 엠에프 둠(MF Doom), 이제는 잊힌 줄 알았던 DMX까지 터트리는 에이트랙을 보면 디제잉 한번 해볼까 하는 안일한 생각조차 사라진다. 천부적인 감각도 감각이지만, 방대한 라이브러리와 오랜 시뮬레이션 뒤에 나오는 숭고한 결과물이 아닐까.
커버 이미지 ㅣ Rarebir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