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 대한민국의 거리는 은빛으로 물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금 과한 비유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한때 대한민국 대다수 차량을 대표했던 은색 차, 실버카(Silver Car) 때문이라면 납득이 갈 것. 도료업체 듀폰(Dupont)이 2008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한국 시장에서의 은색 차 선호도는 50%에 달했으며, 이는 흰색, 검은색, 회색을 합친 것보다 많았을 정도라 하니, 가히 그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대충 짐작이 가지 않나.
하지만 이 은색 차 열풍이 예전 같지 않다, 아니 오히려 이제는 ‘올드’의 대명사로 자연히 선택지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차가운 금속성, 쉽게 티 나지 않는 흠집, 그렇기에 되팔기도 쉬웠던 은색 차의 매력은 개성 강한 현 세대에 밀려 뒷전으로 밀려났다. 어딜 가나 중간은 했던 실버카의 종말이 왔다는 말이다. 허나, 찬밥 신세 실버카에 지고지순한 애정을 쏟으며 이를 방대한 양의 아카이브 사진집으로 펴낸 작품이 있으니 바로 지난 4월, 플라스틱처럼 가벼운 제품을 선보이는 브랜드, 플라스틱 프로덕트(Plastic Product)가 발간한 매거진 ‘Plastic Product Zine: 01 Silver Car’다.
얇은 플라스틱 곽에 동봉된 ‘Plastic Product Zine: 01 Silver Car’는 같은 구도의 은색 차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포토북과 플라스틱 프로덕트의 정체성을 담은 텍스트 북, 총 두 권으로 구성됐다. 두 권의 무게만 해도 무려 2.8kg. 승용차, 세단, 택시 등 언제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한국 곳곳의 은색 차를 조명한 포토북은 좌우 반전 효과를 쓰면서까지 차 방향을 지독하게 통일한 점과 페이지마다 차가 위치했던 GPS 주소를 의미하는 듯한 알 수 없는 숫자를 써 놓은 점이 흥미롭다(다만, 트럭이 보이지 않는 점은 조금 의아하다. 생각해 보면 은색 트럭은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기도).
고성능 카메라가 아닌, 아이폰 속 이미지로 사진집을 꾸민 점 또한 2000년 대의 영광과 이제는 찬밥 신세가 된 실버카의 이미지와 일맥상통을 이룬다. 이처럼 하나의 이미지처럼 등장하는 포토북 속 실버카는 아무리 노란색, 빨간색 페라리를 보기 쉬워진 시대라 할지라도 역시 대한민국 자동차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건 실버카라고 목소리를 내고 있는 듯하다. 자신이 ‘근본’이라고 말이다.
사실 그 말도 영 틀린 말은 아니다. 애초에 은색은 형형색색 뽐내는 여느 차에 비해 금속에 가장 가까운 색 아니던가. 자동차의 본질과 가장 가까우나 화려함에서는 조금 떨어진 존재. ‘Plastic Product Zine: 01 Silver Car’의 텍스트 북은 그런 존재들의 이야기를 실었다. 플라스틱 프로덕트의 서민철 디렉터를 포함해 소설가 정지돈, 조각가 권오상 등 자신의 업에 진중히 임하며 기본에 충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통해 ‘플라스틱 프로덕트’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전하는 것이 텍스트 북의 목적이다. 텍스트를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그간 아리송했던 플라스틱 프로덕트의 정체성에도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을 것.
최근 캐노피와 매거진을 선보이며 패션 브랜드를 넘어 ‘플라스틱스러운’ 경험과 감정을 공유하는 브랜드 플라스틱 프로덕트. 평소 이들의 아리송한 행보가 궁금했던 이들이라면, 실버카가 전하는 왠지 모를 편안함과 함께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