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진스의 자연스러움에 대해

며칠 전, 뉴진스의 “어텐션”을 듣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고 나서, 뉴진스의 EP를 계속 들었다. “어텐션”은 케이팝이 점유할 또다른 영역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어텐션”은 뮤직비디오에서부터 케이팝의 전형을 파괴하면서 시작한다. 뮤직비디오는 초반 1분을 다른 밴드의 공연 장면으로 때운다. 이 부분은 드라마 타이즈도 아니고,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도 않는다. 그저 공연을 보는 ‘뉴진스’ 멤버들을 포함한 청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다음에 흘러나오는 음악은, 케이팝의 기본적인 공식을 하나씩 파괴한다. 원더걸스나 빅뱅으로 시작된 케이팝의 과밀화(이른바 ‘후크송’류)는 NCT 127의 “스티커”로 정점에 이르렀다. “스티커”는 아르카(Arca)를 포함한 몇몇 바로크적 전자음악가과 동일한 지평에서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밀도 있는 사운드를 자랑했다. “스티커”는 소리의 단위를 최대주의적으로 조정하는 SM식 전자음악을 실험적으로 밀고 나간다는 점에서, 케이팝 사운드가 얼마간 매너리즘에 이르렀다는 점을 알리는 징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이 음악에서 매혹과 피로함을 동시에 느꼈다. 냉소주의를 보태자면 케이팝 역사의 끝이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두절미하면 많은 이들이 그렇듯, 나 역시 뉴진스의 음악에서 일본 시기의 S.E.S나 당시의 J-팝을 떠올렸다. 그럼에도 노래를 J-팝처럼 느낀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이 노래의 많은 요소는 케이팝 그 자체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디서 이런 착각이 유래하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어텐션”의 사운드 믹싱은 소리의 단위가 최대한 자기 자신을 주장하는 여타 케이팝 음악과는 달리 훨씬 더 부드럽다. 이 노래에는 숨 쉴 틈이 있다. 이 공간의 유무는 케이팝과 다른 장르를 비교하는 가장 큰 차이였다. 우리가 흔히 장르라고 표명하는 음악의 집합에는 이 공간, 틈을 통해 ‘개성화’를 수립한다. 청중은 보사노바나 힙합, 스탠더드 팝 등 개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음악적 풍경에 이끌린다.

“어텐션”은 케이팝에 부재한 이러한 무드를 준다. 곡을 만든 250의 근작 [뽕]에서 한국적인 무드를 뽕이라는 개념으로 재해석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텐션”은 케이팝의 발전 양상에서 간과되어온 자연스러움, 무드, 자율적 개성의 측면을 건드린다. 그것은 초창기 케이팝이 가져왔으나, 2세대 아이돌의 전진과 함께 방기한 것이다. 곡에 흐르는 일관된 정서라는 지점에서 “어텐션”은 다른 곳을 쳐다본다. 그것은 이 곡이 케이팝 사운드를 포기하지 않고도 케이팝과 차별점을 가지는 지점이다. 이는 “뉴진스”를 여타 아이돌 그룹이 아니라, 공중도둑이나 파란 노을 같은 장르의 외부(인종적으로나, 스타일상으로나)에 있는 ‘타자’로서 장르에 참여하는(공중도둑과 파란 노을 모두, 아시아인이 영미권 인디록에 진입한 사례다) 일군의 음악과 비교하게 만든다.

아울러 이는 자율적 개인처럼, 즉 산업에 의해 구성된 강박적인 여성성 추구와도 상이한 길을 걷는다. 소녀시대라는 이름에서 떠올릴 수 있는 소녀성, 원더걸스가 추구했던 팝 뮤직의 디바 이미지, 이외에도 다양한 케이팝 여성 아이돌은 기존의 여성성을 조합해 말 그대로 ‘우상’을 창조했다. 그러나 뉴진스를 본 이들은 오히려 일본의 아이돌 그룹 ‘스피드(SPEED)’, 그중에서도 “Body & Soul” 뮤직비디오를 떠올린다. 스피드의 음악은 훨씬 자연스럽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군무를 춘다. 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여성성은 그간 민희진이 디렉팅했던 SM 아이돌 걸그룹에선 볼 수 없던 것이었다. 에프엑스나 레드벨벳은 여성성을 만들고, 또 재생산하는 일련의 시청각 장치를 기이하게 부풀리는 데서 유래한다. 혼자만의 유행어를 만드는 4차원 여자아이들(에프엑스), 인형을 닮은 것을 넘어 인형이 되어버린 여자아이들(레드벨벳).

민희진의 미적 전략은 주체(소비자)와 대상(아이돌) 사이에 존재하는 판타지와 거리를 활용하는 케이팝의 병리적 측면을 노골적으로 과장한다. 그 아슬아슬함은 ‘재귀적 인지’의 경계에서 오간다. 예컨대 그것은 너무 과장되어 있지만, 또 너무 과장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판타지가 판타지임을 깨닫기를 거부하는 구간에서 발생한다. 판타지가 사람들의 무의식을 떠나 자율적인 존재처럼 움직인다. 현실에서 유래한 판타지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전후 필름 느아르를 프로듀싱한 전설적인 제작자 ‘발 류튼’이 사회의 불안감과 공포를 활용했듯, 민희진의 아트 디렉팅은 케이팝이 우리 시대의 소외를 적절히 이용했을 뿐 아니라, 얼마간은 그러한 소외적 감각을 창출했다고 믿는 편이다.

역설적으로 민희진이 제작한 뉴진스는 케이팝의 병적인 느낌을 깨끗이 지운다.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아이들이 미소를 짓는다. 뉴진스의 아트 디렉팅이 케이팝 1세대와 J-팝을 차용한 것은 이런 단절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들이 짓는 자연스러운 미소는 마치 수정주의 서부극에서 카우보이들이 흘리는 ‘땀’과 닮아있다. 레오네의 서부극 3부작이나 페킨파의 서부극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총잡이들의 더러운 행색이다. 얼굴에는 땀자욱이 있고, 옷은 때로 가득하다. 그들은 우리 주변의 인간 같다. 단지 옛날 옛적 서부에서 왔을 뿐이다. 그러한 리얼리즘은 서부극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이것을 수정주의 서부극이 기존 서부극의 진화 판본이라는 주장으로 들어선 안 된다. 20세기 이후의 (대중) 예술사는 중간중간 혁신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시계열적’인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패션처럼 유행이 돌고 돈다. 역사는 계속해서 순환한다.

그러므로 중세-근세 이런 발전론적 도식이 대중예술에는 통하지 않는다. 서부극은 역사가 부재한 공간, 서부극을 이루는 원형적 요소(남자, 총, 말)이 순환하는 수평적인 지평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서부극은 신화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가 그렇듯, 하나의 신화에 부속되는 여러 다른 줄거리가 있을 뿐이다. 어쩌면 케이팝도 역사상의 많은 장르와 같이 이 같은 지위를 차지했다고도 느껴진다. 그곳은 J-팝, 캔디팝, 블록버스터 팝, 뭄바톤, 순정만화의 주인공, 근육질 마초, 힙합, 이런 모든 시청각적 요소가 케이팝의 신전에 있다. 뉴진스가 참고하는 건강한 자연스러움조차 케이팝 신화에 귀속될지도 모른다. 나는 뉴진스의 음악이 케이팝이 그동안 방기한 영역을 다루고 있다고 느낀다. 뉴진스의 등장은 환영할만한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어떤 불안감도 동반한다. ‘자연스러움’조차 문화적 표상이자 판타지로써 소비되기 때문이다.

케이팝은 문화 없는 문화산업이고, 주체가 부재하는 판타지의 공간이다. 그러한 병리적 측면이 나쁘다고 보지 않는다. 서부극이 미국의 원주민을 학살한 백인의 판타지를 반영했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니다. 동시에 서부극이 매력적이라고 해서, 그러한 판타지가 옳은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케이팝에서 하나의 대상으로서만 소비되는 아이돌의 모습을 다시금 전유하는 소비행위에서 흥미로운 실험이 일어날 수 있지만, 그러한 소비행위가 판타지를 윤리적으로 만들진 않는다.

뉴진스의 음악이 지향하는 자연스러움과 일관된 무드는 케이팝이 변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반갑지만, 한편으로 케이팝이 자연스러움의 영역까지 점유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나는 뉴진스 멤버들의 자연스러운 미소에 매혹되면서도, 어떤 불안감을 껴안고, 그들의 미소를 바라본다.


Writer │ 강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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