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대가 애플 뮤직(Apple Music)이나 스포티파이(Spotify)를 통해 음악을 접한다면 예전에는 ‘소울식(SoulSeek)’ 혹은 ‘마이스페이스(Myspace)’가 있었다. 특히 지금의 ‘블로거(Blogger)’로 개명한 ‘블로그스팟(Blogspot)’은 내가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접하기 시작한 발단이었다. 그렇게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블로그스팟에서 하나둘씩 보았던 것들이 때로는 눈앞에서 펼쳐지거나 직접적인 경험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내가 호주로 넘어와 이민자의 삶을 살면서도 그 생활은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평소 나의 하루는 새벽 4시에 시작된다. 시드니의 강한 햇빛과 35도를 오가는 살인적인 더위 속에서도 지붕 위에서 작업을 해야 하는 일의 특성상 팔과 손은 물론 얼굴까지 가리며 작업을 이어간다. 가지고 올라온 물은 그늘이 없는 곳에서 금세 뜨거워졌지만 억지로 삼킨다. 내가 일하는 한인 회사의 대표는 가끔 현장을 찾아와 “뭐 하는 거냐. 우리랑 같이 일하는 저 백인 새끼들이 우리 뭐라고 생각하겠어. These stupid Asians. 이 일이 회사에게 얼마짜리인 줄 알고 있나. 너 영주권 받고 싶지. 나 지금 너 협박하는 거 맞아”라는 말들을 회사 동료와 나에게 일일이 찾아와 쏟아내고, 나는 최대한 그것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한다.
20미터의 지붕 위에서 안전장치 없이 위태한 것은 물리적인 상황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회사의 권고로 두 달 넘게 쉬었으며, 그런 이유로 매일 참치 한 캔과 인스턴트 쌀밥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한동안 수입 없이 1,800불 넘게 생활비가 나갔으며 그 사이 생일을 맞이했고, 서울에서 펑크 신에서 활동했던 동료의 비보를 듣기도 했다. 겨우 얻은 임시 직장으로 페인트 업체에서 일을 3주 동안 납 페인트를 바르는 위험한 일을 하면서도 달링허스트 주민들의 우려로 나는 방호복이 아닌 우비를 입고 일을 했고, 손목과 팔에 납 페인트가 묻어 살점이 녹아내리기도 했다.
다시 일하던 곳으로 넘어와서도 비자를 연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가 확실치 않았다. 만료일은 다가오고 있었고, 본래 일하던 업체에서 근무한 일수를 겨우 채워야 비자 조건에 충족하는 상황이었다. 뜨거운 날씨와 무거운 물건을 옮기는 일 때문에 무릎과 목은 좋지 않았고, 20미터 지붕 위에서 잠이 쏟아지는 것은 너무나 괴로웠으며, 울퉁불퉁한 지붕을 다니다 잠결에 넘어질 뻔한 적은 수도 없이 많다. 또한 가끔 눈을 돌릴 때마다 지붕 아래 아득한 광경이 펼쳐지고 의식은 그 아래보다 더 깊은 곳을 향했다. 이민자의 삶은 정말 쉽지 않았지만, 그동안 몇 달간의 일들은 충분히 이 상황을 버티게 해 주었다. 모든 걸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지난 8월의 일들을 회상해 본다.
한국에서 하드코어 밴드를 20년 넘게 해온 기석 형은 몇 달 전부터 시드니에 놀러 올 수 있다고 언질을 줬다. 여러 날에 걸친 몇 번의 대화가 오간 뒤 올해 8월에 올 수 있겠다는 답을 받았다. 그는 호주의 밴드 친구들을 만나볼 수 있는지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최근 시드니 하드코어 밴드 스피드(Speed) 멤버들이 일본 투어를 다녀와서 한국에서 자신들을 보러 온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내게 한국 친구들이 내가 호주에서 많은 사람들을 알고 지내며 좋은 생활을 하는 듯 보인다고 전했다. 나는 호주로 넘어와 현지의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사실 이 관계는 한국에서 해왔던 생활을 호주에서도 그대로 해 온 것뿐이다.
호주 생활 2주도 안 되어서 시드니의 음악 플랫폼 에프비아이 라디오(FBi Radio) 시상식에 무작정 찾아가 스피드와 1300 멤버들을 만난 것에서 시작해, 노매드 라디오(Nomad Radio)에서 디케이 오디오(Decay Audio) 멤버들을 만났으며, 108 웨어하우스(108 Warehouse)의 친구들, 차이나 하이츠(China Heights) 갤러리의 에드워드와 샬을 만났다. 이는 한국에서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녔던 습관 그대로 해온 결과다. 이들과 만나며 나는 시드니를 좀 더 이해하기 시작했고, 주변 한국 친구들은 물론 현지인 친구들과도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것에 보람을 느꼈다. 특히, 며칠 전 래퍼 짱유와 프로듀서 제이플로우의 한국 듀오 그룹 힙노시스 테라피(Hypnosis Therapy)가 시드니에서 디제잉 믹스셋을 플레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데, 그들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나에게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시드니에서 프로모터를 해보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정말 그렇게 되어서 스폰서 비자라도 생긴다면 좋겠지만.
다시 돌아와서, 아직 내가 호주 생활을 하면서 한국에서 놀러 온 친구는 잘 없었기에 기석 형의 시드니 방문 소식은 너무나 반가웠고 누굴 불러서 뭘 해야 할지 고민했다. 게다가 그의 방문이 기대가 컸던 건 미국 밴드 피들헤드(Fiddlehead)가 시드니에 투어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특히 피들헤드의 멤버 팻 플린(Pat Flynn)은 기석 형 그리고 나의 보스턴 지인 댄(Dan)의 친구였지만 내가 그를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기석 형이 오기 전 나는 댄에게 영상통화를 걸었지만, 그는 시차 때문인지 바쁜 이유에선지 연락을 받지 못했다.
피들헤드의 호주 투어를 앞두고 주변인들이 주고받은 얘기는 역시 해브 하트(Have Heart)였다. 2002년부터 2009년까지 7년 정도 짧은 활동을 한 해브 하트가 너무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은 사실이다. 2016년도에 본 적 있는 프리(Free)나 울프 휘슬(Wolf Whistle) 같이 해체 후 결성한 밴드들이 존재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지금까지 해브 하트를 추억하며 그들의 음악을 찾아 듣곤 한다. 만 명 정도가 모였던 해브 하트의 2019년 일회성 재결합 라이브를 영상에서 흘러나온 시네이드 오코너(Sinéad O’Connor)의 밥 말리 커버 음원과 찰스 부코스키(Charles Bukowski)의 시 ‘파랑새(Bluebird)’ 인트로를 시작으로 그들의 음악이 연주되는 영상을 봤을 때 그 충격은 대단했다. 다만, 나는 해브 하트보다는 팻 플린이라는 인물에 나는 관심이 갔다. 펑크의 급진적인 정치적 태도와 폭력적인 보스턴 하드코어 신(Scene)을 경험한 그는 기존의 하드코어 신과 다른 태도를 보이며 밴드를 이끌어 왔고, 다양한 이야기를 사람들과 주고받은 인물이다.
하드코어를 접하기 전 나는 펑크 음악과 그에 대한 정보를 많이 접하던 사람이었다. 어스로튼(Aus-Rotten), 톡식 나르코틱(Toxic Narcotic), 디스럽트(Disrupt), 레지스턴트 컬쳐(Resistant Culture) 같은 밴드들이나 프로페인 엑시스턴스(Profane Existence) 같은 콜렉티브를 디깅하고 한국 펑크 친구들을 사귀면서 운동권이나 민중음악(Protest Songs)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주고받곤 했다. 그에 이어 하드코어 펑크를 접할 때도 카타르시스(Catharsis), 레이스트레이터(Racetraitor) 같은 밴드의 행보를 좇았고, DIY나 대안(Alternative)에 관한 가치를 기반으로 신을 바라보았다. 이 때문에 하드코어 신에 속한 이들이 내게 다가와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즐거운 부분도 있었지만, 때로는 과한 음악적 분석과 밴드에 대한 찬양을 들을 때마다 식상함을 느끼곤 했다. 그에 반해 나는 실질적으로 신 안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나가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 때문인지 한창 하드코어를 접할 때 봤던 해브 하트의 2009년 마지막 라이브 영상은 아직도 뇌리에 남는다. 하드코어 공연을 처음 접하는 경찰이 스테이지 위로 올라와 어수선한 분위기를 조성했을 때 팻은 당황하지 않았으며, 관중은 서로를 신경 써가며 공연을 즐겼다. 팻은 공연 수익이 여성보호 단체에 기부되는 뜻깊은 의미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 영상을 보고 있자니 오래전 내가 서울에서 열린 띵즈 위 세이(Things We Say)의 마지막 공연을 부모님과 함께 가려 했을 때와(물론 들어가지 않았지만) 호주에 오기 전 한국에서 공연기획을 하면서 생겨났던 크고 작은 일들을 연상된다. 나는 친구와 가족에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자신 있게 보여주고 싶었으며, 서울에 있는 친구들의 밴드가 쏟아낸 노력과 서울의 펑크, 하드코어 신에 대한 가치를 모두에게 공유하고 싶었다. 큰 브랜드들에 협찬을 받기 위해 공연 기획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그들은 ‘펑크 파티’라는 명칭을 자주 썼고 대외적으로 펑크, 하드코어 공연 문화에 대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 수많은 고민을 쏟아내었다.
이 한 가지 에피소드로 인상적인 여운을 남겼던 해브 하트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피들헤드라는 밴드로 옮겨지기 시작했고, 이전과 다른 사운드와 가사는 피들헤드를 이해하기 위한 동기가 되었다. 특히 팻 플린은 학교 선생님이란 직업을 가지면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아이를 가지게 된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는 피들헤드를 통해 삶 속에서 위태로운 현실을 그려내고 동시에 새로운 세대들에게 전달하고픈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는 밴드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에게서 음악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보다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면 좋은 대화 상대라는 느낌이 강했다.
다사다난한 날들을 보낸 탓에 한국에 생활한 날이 멀게만 느껴졌지만, 1년 만에 만난 기석 형은 그 모습 그대로였다. 여전히 그는 일로 바빴고 어느 정도 업무 스트레스도 있었지만 오랜만에 만나 좋은 음식을 먹으며 마음의 여유를 찾는 듯했다. 그는 피들헤드를 따라 멜버른에도 가보자고 했을 땐 자금적 상황으로 반신반의했지만 일단 알겠다고 했다.
나는 다음 날 일을 마치고 민지를 오랜만에 만났다. 비슷한 나이대로 시드니에 머물렀던 기간이 나처럼 오래되지 않았던 민지는 턴스타일(Turnstile) 호주 투어 때 백스테이지로 불러서 공연을 함께 본 것처럼 내가 경험한 것들을 공유한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하나다. 한국 친구가 많지 않았기에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민지를 만나는 것은 꽤 반가웠다. 그가 떠나기 전 꽃을 사달라고 부탁했다. 민지는 공연에 참석하지 않지만 기석 형과 한인 친구들을 공연장에 데려갈 생각에 들떴다. 그렇게 피들헤드의 공연도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피들헤드의 시드니 공연이 있기 전날, 모두가 함께하는 식사 자리가 있어 나도 참석했다. 중국 음식점에 들어가 원탁 주변으로 모여 앉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피들헤드의 베이시스트였던 닉(Nick)의 옆에서 그가 사 온 와인을 같이 마시고 있었고, 기석 형은 오랜만에 만난 팻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식후에 우리는 밖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제야 팻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후 다른 일행이 카지노로 향했지만, 나와 기석 형은 다음 날 일정을 위해 금세 나왔고 멜버른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나는 돌아가는 길에 팻에게 전해줄 것이 없는지 고민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와 방에서 책 한 권을 찾아냈다.
호주에 와서 책을 읽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하루에 적어도 몇 장씩은 읽으려 했다. 그러다 최근에는 책을 선물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는데, 이는 P의 영향 때문이다. P는 펑크나 하드코어를 듣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새로운 것들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고 나에게 묻곤 했다. 내가 관심 있어 하는 것들을 보여줄 때마다 그 친구도 관심을 가졌고 나의 주변인들과 거리낌 없이 대화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도 호주에서도 내가 하드코어 신에 있으면서 이를 대외적으로 알려주고 싶었던 노력에 제대로 응해주었던 유일한 사람이 P다.
한때는 그와 함께 길을 돌아다니다 발견한 서점에 무작정 들어갔다. 서점의 내부를 둘러보다 노란색 책을 발견했고 그것을 P에게 보여줬다. 미셸 자우너(Michelle Zauner)의 ‘H 마트에서 울다’는 이미 2년 전에 발매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실물로 본 건 처음이었다. 이 책을 먼저 읽어본 P에게 책에 대한 소감을 물었고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 이후 와이즈 블러드(Weyes Blood) 공연에 함께 가서도 그는 아버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것이 마음에 걸린 나는 스피드의 멤버 젬(Jem)에게 가족을 잃어서 슬픈 친구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기도 했다. 젬은 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대하지 말고 그저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하게 대해주면 스스로 안정을 되찾을 거라는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었다. 다음 날 그의 말대로 나는 P를 다른 공연에 데려갔고 나의 친구들과 대화하며 그가 즐거운 시간을 가지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공연장을 나오기 전 나의 은인이었던 다른 친구에게 ‘H 마트에서 울다’를 선물했다. 그렇게 시드니에서 살며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면 그 책을 몇 권 선물해주기도 했다.
이번에도 팻에게 그 책을 선물해줄까 싶었지만 그가 역사선생님이라는 점을 생각해 그에 걸맞은 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의 친구 댄에게 두 권을 책을 선물 받은 적이 있어 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마침 방에 가장 아끼는 책이 한 권 있었는데, 영어 원서로 된 김은국(Richard E. Kim)의 ‘순교자(The Martyred)’였다. 저자 김은국은 책 서문에 ‘이상한 형태의 사랑’을 언급하며 허무주의를 극복하게 해 준 카뮈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근무를 하고 있었지만, 일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라 일요일을 포함해 12일 정도 쉬지 않고 일을 했기에 피로가 심했다. 그럼에도 토요일에는 페인팅 일을 마치고 곧바로 공연장으로 향해 게스트 밴드를 체크했다. 피들헤드와 일정을 소화한 기석 형과도 공연장에 다시 만났다. 그리고 피들헤드 투어를 주선한 라스트 라이드 레코드(Last Ride Records)의 매도(Tom Maddocks)에게 매진된 멜버른 공연을 다음 날 가려고 하는데 추가 티켓이 있는지 물었더니, 그는 흔쾌히 AAA 패스를 건네주며 그걸 쓰라고 했다. 이후 북적거리는 스테이지를 피해 기석 형을 따라 대기실로 올라갔고, 피들헤드의 멤버들과 다시 만나 인사를 나눴다.
소음이 나는 스테이지와 달리 대기실을 잠잠했으며 피들헤드 멤버들은 공연할 시간대가 가까워지면서 조금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멤버들이 악기 세팅을 하러 잠시 나간 사이 나는 팻에게 다가가 선물이 하나 있다고 말을 꺼냈다. ‘순교자’를 그에게 내어주며 공백이 있는 맨 첫 장에 나의 이름과 년도가 적혀있는 부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사인과 년도를 적어달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이 책을 다 읽으면 댄에게 전해주고 똑같이 기록할 것을 부탁한다고 이야기했고, 그는 그제야 내가 누군지 알아차리고 평창 올림픽 시즌 때 댄을 가이드해줬었냐며 내게 물었다. 그렇게 댄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책에 대한 이야기도 잠시 나누곤 그는 스테이지에서 보자며 자리를 비웠다.
크로우바(Crowbar)라는 이름의 공연장은 이번 피들헤드의 시드니 공연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했지만, 해외에서 투어 온 밴드들이 공연하는 굉장히 큰 규모의 공연장이다. 이미 여러 번 이곳에서 공연을 봤지만 피들헤드의 셋이 준비될 때의 광경을 보니 이처럼 꽉 찬 모습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 연령대 또한 다양했기에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일부 사람들을 보고는 그들이 해브 하트를 기억하는 세대들인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은 긴팔 버튼 셔츠에 해브 하트 맨투맨을 입고 있었다. 2010년대 전 하드코어 신에서 볼 수 있었던 그 옷차림은 요 몇 년 사이 정말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피들헤드의 시드니 공연은 크로우바에서 본 공연 중 단연 최고였다. 특히 젊은 세대들이 스테이지에 많이 나와 다이빙과 싱얼롱을 열심히 했다. 내게도 오랜만에 가슴 뛰는 공연이었다. 첫 곡의 인트로부터 무작정 스테이지 다이빙을 하며 이곳저곳을 다녔다. 공연 전날이 파워 트립(Power Trip)의 라일리 게일(Riley Gale)의 기일이었고, 미국과 한국에서 만나 나에게 큰 영감 주며 한국 하드코어 신에 대한 격려를 해줬던 것을 잊지 않았기에 민지와 공연에 온 한국 친구들이 사다 준 꽃을 스테이지 위로 뿌렸다. 크라스(Crass) 셔츠를 입고 있던 팻은 이게 무슨 웨딩 세레머니인가라는 말을 하면서도 한 손에 꽃하나를 꽉 쥐며 노래를 이어 나갔다.
공연이 끝난 후, 나는 기석 형과 젬 그리고 그의 아내 젬마(Gemma)가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날 정도로 분주했다. 나는 미처 제대로 인사할 여유도 없이 급하게 가방 속에서 큰 꽃 두 송이를 젬과 젬마에게 전했고 밤 12시를 넘겨 공연장을 나온 뒤 집을 들러 짐을 싸서 바로 공항으로 향했다. 새벽 4시에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거치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과연 지금 하는 행위가 현실을 피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나를 위해서인가. 다음 비자를 위한 5천 달러와 점점 다가오는 비자 만료일이 신경 쓰였지만 그 사이 나는 멜버른에 도착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일을 하고 날밤을 새며 멜버른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피곤한 기력이 가득했다. 급하게 커피와 빵을 삼켜 허기진 배를 채우곤 두 시간을 조금 더 기다려서 기석 형과 합류했다. 우리는 곧바로 숙소로 향했고 체크인을 하자마자 기석 형이 팻의 연락을 받고 멜버른 시티 쪽에 있는 서플라이 스토어(Supply Store)로 향했다.
마침 그들도 서플라이 스토어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동안 피들헤드 멤버들은 서플라이 스토어의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위한 폴라로이드 사진을 촬영했고 사진 위에 각자의 사인을 남겼다. 다시 만난 팻은 나에게 책의 저자인 리처드 김이 누군지 처음에는 몰랐지만, 샵에 오기 전에 검색해 보니 아는 인물이라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렇게 한국의 역사와 김은국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카뮈에 대해 잠깐 이야기했다. 나는 아직 카뮈를 이야기하는 게 서툴렀지만 역사와 문학에 대해 팻과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에 기쁨을 느꼈다. 이후 우리는 공연장으로 향했다.
피들헤드의 멜버른 공연이 진행되는 공연장은 크로우바보다 더 큰 규모처럼 보였다. 그리고 대기실 벽면에 붙어있는 과거 공연 포스터를 살펴보자 그곳이 빌리 아일리쉬(Billie Eilish)와 더 킬러스(The Killers)가 공연했던 장소였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공연이 진행되면 어떤 분위기가 될지 궁금해졌는데 공연의 게스트 밴드들의 연주를 보고 난 사람들의 분위기는 의외로 잠잠했다. 나는 피들헤드 때는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반신반의하며 공연에 데려온 한인 친구를 스테이지 위로 올려 보냈고 오른쪽 끝에서 함께 헤드라이너를 기다렸다.
그날이 피들헤드의 마지막 투어이기에 내심 조바심이 났다. 전날 시드니에서 봤던 광경은 물론 그들의 음악이 너무나도 좋았기에 연주 시간이 다가올수록 아쉬움도 느껴졌다. 나는 피들헤드의 첫 곡 인트로가 나오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관객들을 향해 스테이지 다이빙을 했다. 관객들도 그제야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스테이지 끝으로 돌아와 피들헤드가 연주하는 영상을 인스타그램에 올렸고 그걸 본 댄이 나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 공연 중이었기에 말을 할 수 없었던 나는 댄에게 손 인사를 하며 팻이 공연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다시 손 인사를 하며 그와의 통화를 마쳤다.
때로는 잠잠하게, 때로는 격정적인 그들의 라이브 속에서 사람들은 싱얼롱으로 화답했고 스테이지 다이빙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팻은 관객에게 밀쳐지고, 마이크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리고 스테이지 다이빙을 하는 사람들의 발에 머리를 맞고 고통스러워하는 팻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하면서도 그는 끝까지 공연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곡 전에 호주 투어를 하면서 느낀 소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이후 기석 형은 그가 나에 대한 이야기도 공연 도중에 했다고 말했는데 그 당시 잘 들리지는 않았다. 공연이 끝나고 나는 투어를 기획한 매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기석 형과 팻에게 가서 이야기를 나누며 마지막 사진을 찍고 피들헤드와 헤어졌다. 부조리로 가득 찼던 생활과 불확실한 미래를 감지하면서도 알 수 없는 자신감에 차서 사람들을 대했던 그 당시 나의 태도를 어렴풋이 기억한다.
다음 날 일정까지 보낸 기석 형은 호주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이틀 후 나는 아낄 수 있는 부분을 아껴가며 계좌에 17달러를 남기고 3개월 만에 급여를 받았다. 게다가 본래 일하던 곳으로 돌아가 다음 비자 조건을 충족하기 위한 출근 일수를 채웠고 만료 4일 만에 새 비자를 받아냈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지만 새 비자를 받기 위해 계속 버텼다. 그동안 준비해 왔던 것을 모두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보다는 다음 새로운 경험을 기대하고 현지에서 알게 된 사람들을 다시 만나야 하겠다는 생각에 가득 찼다.
피들헤드의 호주 투어는 공연장에서 사람들로부터 다시금 영감과 동기를 얻게 된 중요한 나날이었다. 이후에도 나는 순탄치 못한 생활이 이어져왔지만, 그때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내가 할 일을 해나갔다. 호주로 건너와 생활한 지 1주년을 축하받았고, 세상을 먼저 떠난 동료의 모습을 영화 “리턴 투 서울(Return To Seoul)”에서 다시 보았고, 최근 다시 만난 P에게 새로운 사람들과 공연을 소개해줬으며 그 친구는 밝은 표정으로 화답해 줬다. 11월 10일은 스피드와 1300 친구들을 처음 만난 날이다. 갖가지 어려움을 대면하려고 노력하자 비로소 가치 있다고 생각한 것들이 다가왔다. 앞으로도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내가 추구한 비전을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되지 않을까.
이미지 출처 | Sabrina Loong, 여창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