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된 사진과 글자는 실제 사물보다 훨씬 사실적이었지요. 그래서 단지 인쇄매체를 통해 공표된 것만이 진실했다고나 할까요.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진으로 찍혀야 한다는 게 세계에 대한 우리의 유일무이한 개념이었지요.
“The Utopia of a Tired Man” – Jorge Louis Borges
박진우: 제가 중, 고등학교때 오타쿠 짓을 했던 히로스에 료코를 직접 찍은 사진입니다. 중, 고등학교 시절 일본에 가면 히로스에 료코를 우연히 볼수 있지 않을까 같은 망상을 하곤 했는데, 그 일이 재작년 겨울, 일본 여행에서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시부야의 거리에서 말이지요.
김관령: 작년 겨울 재수가 끝나고 고등학교 때 동아리에서 만난 일본 교포형의 집에 방문하게 되었다. 휴대폰 대리점에서 일을 하는 형을 기다렸다가 밤 10시에 만나서 오랜만이라며 인사하며 집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시선이 자연스레 24시간 세일 마트, 규동 식당의 아프리카 외국인 노동자로 갔다. 내가 알던 일본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
형은 시장 모퉁이의 건물 꼭대기 층에 살고 있었다.
짐을 풀고 선물로 사간 너구리 라면을 먹으며 형이 말했다. “え あのさ(야 있잖아). 밑에 야쿠자가 있으니까 쿵쿵거리면 안 돼. ほんま 怖い(진짜 무서워)”.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라면을 먹고 슈퍼도 갈 겸 산책을 하는데 술에 취한 할아버지가 고성방가를 하고 있었다.
얼떨떨한 오사카에서의 첫 밤이었다.
아침이 되고 구수한 냄새에 눈을 떴다. 구수한 냄새의 주인공은 형의 누나가 피는 아이코스 냄새였다(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새벽에 들어와 못 마주쳤나 보다). 인사를 하고 형과 순서대로 씻으러 갔다. 화장실 문이 부서져서 형이 부서진 문을 문틈에 걸쳐줬는데 어릴 때 누나랑 치고받고 싸우다가 부서졌다며 웃었다.
기울어진 수건 서랍함과 세면도구 통, 곳곳에 떨어진 1엔과 10엔, 창문에선 햇빛이 들어와 푸른빛 타일을 비췄고 욕실이 빛났다.
아름다웠다. 거리가 깨끗하고 사람들이 친절하다는 일반적인 일본의 이미지보단 어딘가 부족한 욕실, 문 닫은 가게 슬레이트의 낙서가 마치 기쿠지로의 여름과 같은 일본의 과거, 진짜 일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얼른 카메라를 챙겨 와 셔터 스피드를 낮추고 조리개를 열었다.
어머니의 얼른 밥 먹으라는 소리에 전자레인지 즉석밥, 소고기, 계란말이를 아침으로 먹었다. 꼴에 손님이라고 대접받았다. 먹던 중 눈이 부셔서 밖을 보니 밤에는 보이지 않던 동네의 모습이 보였다. 지붕 슬레이트 기와에는 녹이 슬어있었고 외벽에는 갈라진 틈을 메꾼 콘크리트 흔적이 보였다. 하늘은 푸르렀고 차가운 공기가 기분 좋았다.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서려는데 어머니께서 맛있는 걸 사 먹으라며 오천 엔을 쥐어주셨다. 빠칭코에서 좀 더 땄으면 만 엔을 줬을 텐데 이번엔 오천 엔만 받아, 하면서 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시장 중앙통로로 역까지 걸어가는데 조용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오히려 활기차고 묵직했다. 오래된 후지필름 가게, 빛바랜 박스로 가득 찬 문구점, 넝쿨이 정리되지 않은 공터, 자전거 타고 스쳐가며 하는 안부 인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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