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SLA VIDEO ROOM – 녹음綠陰

INTRO

녹음 綠陰
푸른 잎이 우거진 나무나 수풀. 또는 그 나무의 그늘

계절의 변화를 눈치채게 되는 순간이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계절이 변하는 과정을 깨닫는다기보다는 어느새 완성돼 있는, 그러니까 계절의 도착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 말이다. 어느새 아스팔트 가장자리나 보도 블록 틈 사이로 솟아있는 풀들을 보며 봄을 느낀다든지, 빌딩 너머로 보이는 산이 물든 것을 알아차릴 때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고, 잠이 덜 깬 채 마주한 아침 공기가 서늘하고 날카롭게 피부로 달려들 때 겨울과 대면하는, 그런 순간들.

그렇다면 여름이 왔다는 것은 습하고 뜨거운 날씨, 거리에 풍기는 악취, 대중교통 속 땀내 섞인 체취가 주는 불쾌감, 늘어난 벌레들, 잠을 깨우는 모기 소리 등으로도 인정하게 되지만, 무엇보다 여름 앞에 주저앉게 되는 순간은 녹음綠陰을 마주할 때다. 색이 차오를 대로 차오른 초록 잎들, 생기를 내뿜는 나무 기둥, 그로부터 파생된 가지들을 보고 있자면 앞서 언급한 여름의 부정적인 것들을 모두 제압할 정도로 강력한 기운 앞에서 넋을 잃고 마는 것이다.

갖가지 이유로 어지럽고, 기운을 차리기가 영 쉽지 않은 요즘, 모니터 속 영화를 통해서라도 녹음이 주는 생명력을 전해 받을 수 있도록, 이번 비즐라 비디오 방(VISLA VIDEO ROOM)은 “달마야 놀자” 와 “이웃집 토토로”를 소개한다.


“달마야 놀자”

무더운 여름이 빨리도 찾아왔다. 여름이 오면 산으로 바다로 떠나야 하는 우리들은 현재 발이 묶여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렇게 재미없고 힘든 난이도의 인생을 마주한적이 있었나 싶다. 사회적 거리두기 역시 꽤 오랜기간 지속되고 있는데, 이번에 소개할 영화는 정말 사회적 거리두기에 충실했고, 나아가 산에서 느낀 어떤 깨달음과 우정에 관한 이야기를 그려낸 작품이다. 바로 영화 “달마야 놀자”다.

영화 “달마야 놀자”는 2001년 개봉한 코미디 영화다. 2000년대 초반 불던 조폭/코미디 장르의 계보를 이어가던 작품이다. 어떻게보면 멀티 캐스팅이라고할 만큼 쟁쟁한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고 나름의 흥행도 거둔 작품이다. 큰 위기를 겪은 조폭 재규(박신양)와 부하들이 도망칠 곳을 찾던 중 왕구라(김수로)가 농담처럼 “막말로 머리나 깎고 중이나 되면 모를까”라고 뱉었던 말이 계기가 되어 한 사찰로 숨어들게 된다. 그 사찰은 핸드폰도 터지지 않는 첩첩산중. 그야말로 푸른 나무로 둘러싸인 자연 그 자체인 장소다.

스님들은 조폭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고 그들을 쫓아내기 위해 한 판 승부를 펼친다. 그 과정은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그러나 영화가 웃기기만한 것은 아니다.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대사 곳곳에 배치시켜 잔잔한 울림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결국 조폭들은 사찰을 떠나게 되지만, 들어올 때와 나갈때는 확실히 달라진다. 미운정도 정이라고,조폭들과 스님들은 서로를 인정하는 친구가 되었다.어찌됐건 조폭들은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사찰로 도망쳐왔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도 우연한 도피는 곧 휴가가 아니었나 싶다. 지금 우리가 목말라하는 여행 역시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떠올리는 것일 테니까.

최승원(Contributing Editor)


“이웃집 토토로(となりの トトロ , My Neighbor Totoro)”

영화가 시작되고, 오프닝 곡이 끝나고 나면 화면의 전경엔 논이 자리 잡고, 후경엔 초록이 짙은 나무들과 하늘 그리고 구름 몇 점이 펼쳐진다. 화면 오른쪽에선 이삿짐을 가득 실은 트럭 한 대가 등장해 화면 왼쪽을 향해 가로질러 간다. ‘메이’네 가족이 토토로 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이웃집 토토로”는 어머니의 입원으로 ‘메이’, 언니 ‘사츠키’, 아버지 타츠오가 시골로 이사오며 벌어지는 소동극이다.

영화를 수수께끼 풀이처럼 접근하는 것이 익숙한 우리는 “이웃집 토토로”를 보며 자연스레 ‘정체를 밝히고자’ 머리가 움직인다. 저 까만 덩어리들은 누구인지, 토토로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고양이 버스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등등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일본의 수많은 민간신앙이 위세 없이 영화를 감싸고 있기에, 그것들이 내보내는 신호를 해석하기 위해 머리가 바빠지기도 한다.

물론 위와 같은 방식으로 영화를 볼 때, 그 재미가 더해지는 영화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이웃집 토토로”는 해당하지 않는 것 같다. 당연하다는 듯이 완연한 초록으로 이들 가족과 영화 전체를 감싸고 있는 나무들처럼, 이 소동극을 그저 웃음이 나면 나는 대로, 가슴이 조이면 조이는 대로, 화면과 나 사이의 거리 사이에 유년 시절의 기억을 집어넣고 그 거리를 조금 좁히는 방식으로 “이웃집 토토로”를 본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가볍게 흔들리는 여름의 나무들을 바라볼 때 특별한 생각 없이도 즐거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최직경(Contributing Editor)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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