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저에게 당한 몬스터들의 애환을 달래는 게임, “빌런 매니저” 플레이 후기

한창 “풋볼매니저”라는 게임을 처음 접했을 당시, 그러니까 10년도 전의 이야기인데, 그때만 해도 축구 게임의 근본은 역시 “피파(FIFA)” 혹은 “위닝 일레븐”이라는 오만한 생각에 사로잡혔었다. ‘감독’을 흉내내는 “풋볼매니저” 쯤은 유치한 연극 놀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하지만 워낙에나 후기가 좋았던 지라 속는 셈 치고 플레이했던 추억의 게임 “풋볼매니저”는 새로운 게임 세계의 지평을 열어 주었다. 팀의 전략과 선수 영입은 물론, 출장 시간에 불만을 품고 ‘언해피’가 뜬 선수들의 멘탈을 다독여주는 일까지… 셀 수 없이 많은 감독의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어느새 실제 매니저가 된 듯 선수 한 명 한 명과 팀에 애정이 싹트고 자연스레 본인의 임무에 녹아들게 된다.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면서도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이상적인 가상 인물의 구축은 현실에서 맛보지 못한 달콤한 인생을 경험하게 했다.

그리고 최근 우연히 또 한 번의 달콤한 유혹을 하는 게임을 발견했다. 이름하여 “빌런 매니저(Villan Manager)”. 혹 ‘빌런(Villan)’의 스펠링이 틀렸다고 벌써부터 지적한다면, 앞으로의 게임 진행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게 될 테니 맞춤법쯤은 잠시 잊는 것이 좋겠다. 좌우지간 “빌런 매니저”는 이름 그대로 게임 속 등장하는 ‘악당’들을 관리하는 매니저의 역할을 수행하는 게임이다. 다시 말해, 온갖 아이템으로 무장한 유저들에게 두들겨 맞은 악당들의 불만과 애환을 달래는 매니저가 된다는 참으로 창의적인 콘셉트의 게임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비슷한 것이라곤 매니저 역할을 수행한다는 콘셉트뿐, “풋볼 매니저”와 “빌런 매니저”는 상당한 간극을 가진다. 전자에서의 역할이 한 구단을 주무르는 감독이라면 후자에서는 그저 게임을 처음 시작하는 유저들이 찾는 스테이지1을 관리하는 말단 매니저에 불과하다. 겉으로 보이는 스타일에도 큰 차이를 보이는데, “빌런 매니저”는 게임 보이 시절의 “포켓몬”식 2D 화면을 차용한 레트로 게임으로, 아기자기한 캐릭터들과 나누는 대화 그리고 유저들과의 전투가 게임의 주 콘텐츠를 구성한다. 조작법도 방향키와 스페이스바로만 이루어진 극도로 단순하게 구성됐다.

게임의 전체적인 스토리는 이렇다.

“나는 몬스터들의 고충을 처리하기 위해 파견된 스테이지 1의 하급 관리인이다. 게임 유저들에게는 ‘빌런걸즈’ 도끼를 드랍해줘야 하며, 동시에 몬스터들의 ‘즐거운’ 업무 환경도 조성해야 한다. 임무에 실패하면 ‘튜토리얼’ 매니저로 강등된다”

게임을 시작하면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짜증날 정도로 귀를 때리는 전화벨 소리다. 전화를 받기 위해서는 주변에 배치된 의자, 돌덩이 등을 밀어 길을 만들어 나아가야 한다. 이때 제한 시간 내에 전화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일찌감치 좋은 매니저가 되려는 일념을 접어야 한다(돌을 밀어 게임의 퍼즐을 풀어간다는 점에서 게임보이 시절 “포켓몬스터” 골드버전에서 마주한 얼음 동굴이 생각나기도…). 정체 모를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받고 나면 수행해야할 임무가 주어지고 이내 맵을 돌아 드디어 스테이지1의 초원으로 나가게 된다.

스테이지1에서 본인을 기다리는 건 이미 유저들에게 두들겨 맞을 대로 맞아 만신창이가 된 슬라임과 ‘소’ 몬스터 둘. 비록 스테이지1일지라도 이들을 찾아오는 유저는 ‘현질’과 ‘자동사냥’ 심지어는 초보인 척하는 고수 등으로, 가장 낮은 단계에 위치한 이들은 유저들에게 흠집하나 내기 쉽지 않다. 단 한 번도 유저들에게 승리를 거두지 못한 불쌍한 스테이지1의 용사들… 이들의 사기는 날로 꺾여만 가고 온갖 부상과 알레르기를 달고 산다. 그리고 때로는 이들을 달래며, 때로는 화를 내며 게임을 끌고 가야 하는 것이 매니저의 임무. 이 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임무를 똑바로 수행하라는 본부의 끊임없는 압박도 견뎌야 하는 것이 우리네 회사 생활을 돌아보게 한다… 과연 빌런 매니저는 무사히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빌런 매니저”는 ‘Stage1 – zigeunerweisen’이라는 부제를 갖는다. ‘치고이너바이젠(Zigeunerweisen)’은 19세기말 활동한 스페인의 바이올리니스트 파블로 데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의 대표작을 일컫는데, 게임의 전반적인 흐름에 크게 관여하진 않지만 게임의 비밀스러운 매력을 탐구하는데 도움이 되는 키워드이니 기억해 두는 편이 좋겠다. 또한 이외에도 종일 ‘쌀밥’ 타령을 하는 할아버지 혹은 숨겨진 비밀 공간 역시 게임의 또 다른 이야기를 제공한다. 의문이 생긴다면 맵 이곳저곳을 누비며 온갖 실험을 해보자.

사실 “빌런 매니저”를 플레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본인 컴퓨터의 문제인지 게임 자체의 문제인지 규정할 수는 없지만, 시작부터 게임이 수차례 다운되며 이 게임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라는 의구심을 품게 했다. 무엇보다 게임의 가장 큰 골칫치거리는 도대체 이 게임의 목표가 무엇인지, 도대체가 이 바보 같은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개발자가 구축해 놓았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이다. 다행스럽게도 개발자와의 이메일을 몇 차례 주고받은 뒤에야 게임의 한계를 알 수 있었고, 이후에는 조금이나마 마음 편히 게임을 즐기게 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불편을 제쳐두며 계속해서 게임을 플레이하게 하는 것은 단연코 ‘유저에게 당한 몬스터들의 애환을 달랜다’는 게임의 독보적인 콘셉트 때문이겠다. 어떻게 하면 몬스터를 맛있게 요리할지만을 생각하며 여타 게임을 플레이하던 본인에게 “빌런 매니저”는 분명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준 게임이며, 그 점 하나만으로도 숱한 짜증과 불편을 견디기에 충분했다.

취사는 새로운 시작, 보온은 불러오기다.

이제 와서야 “빌런 매니저”의 배경에 대해 (아는 만큼이나마) 소개하자면 2019년 일민미술관에서 개최된 ‘퍼폼플레이스’ 전시를 위해 개발된 게임으로, 게임 제작 공동체 ISVN의 멤버 김정각 개발자의 작품이다. 현재는 그가 인스타그램 프로필에 걸어둔 링크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으나 이 수고스러움 마저 견디기 싫다면 다행스럽게도 오는 4월 12일부터 일민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에서도 직접 플레이해 볼 수 있단다. 화끈한 맞춤법 파괴와 극도로 불친절한 설정과 좀처럼 나아지지 않은 게임 스토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엾은 몬스터들에게 자꾸만 쓰이는 게임 “빌런 매니저”. 우리는 언제쯤 사장이 될 수 있을런지…

김정각 인스타그램 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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