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커스터마이징의 맛

인간은 끊임없는 예술적 욕망을 안고 살아간다. 이 욕망은 미술, 음악, 글 등 다양한 갈래로 표출되기도 하지만 특정한 분야가 아니더라도 외형을 꾸미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구로 이어져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개성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필자에게 있어 욕구 표출은 다름 아닌 게임 속에서 이루어졌다. 바로 캐릭터 커스터마이징으로 말이다. 

게임을 즐기는 이들은 커스터마이징의 맛을 알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디지털 쪼가리 몇 개 바꾼다고 뭐가 달라지겠냐 할지 모르겠다. 게임에서 외형을 비롯한 복장, 무기 등을 꾸며 남들과 다른 나만의 것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게임을 즐길 하나의 콘텐츠가 되니 필자 같은 게임 오타쿠들은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는 것. 80년대 초기 롤 플레잉 게임부터 최근에 출시된 게임 중 커스터마이징 시스템이 돋보인 몇 가지를 살펴보며 플레이어의 광기 어린 욕망을 함께 감상해 보자.


더 블랙 오닉스(The Black Onyx)

2D 기반의 픽셀 그래픽이 한계였던 80년대 게임만 해도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1984년 일본에서 발매된 롤플레잉 게임 “더 블랙 오닉스”는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시스템을 최초로 도입한 게임 알려졌는데, 당시 구현할 수 있었던 커스터마이징 기능은 5가지 색상의 복장과 50종의 헤어스타일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정도의 커스터마이징으로 플레이어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는 없을 터, “더 블랙 오닉스”와 같이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해 주지 못했던 90년대 초 롤 플레잉 게임이 2000년대 들어 향상된 그래픽과 함께 개편된 커스터마이징 시스템을 갖춘 후속 시리즈로 업데이트되며 캐릭터 외형을 보다 더 섬세하게 다듬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커스터마이징을 다루는 플레이어의 성향이 조금씩 기괴해지는데, 오픈 월드 액션 롤 플레잉 게임 “엘더 스크롤”의 네 번째 시리즈에선 캐릭터 얼굴 상하좌우 너비, 이목구비 크기, 눈동자와 머리카락 등을 조작해 의도적으로 웃기거나 흉측한 외형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엘더 스크롤(The Elder Scrolls)

일인칭 액션 RPG “엘더 스크롤”은 방대한 오픈 월드 속에서 자유로운 플레이와 흥미로운 스토리를 선사하는 명작으로 꼽히는 게임이다. 1994년 “엘더 스크롤”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 “아레나”는 꽤 실험적인 게임이었는데, 당시 여타 RPG와 차이를 둔 커스텀 캐릭터 시스템으로 플레이어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외형 변환은 다른 게임과 비슷한 수준이었으나 스킬을 조합해 커스텀 클래스를 만드는 시스템은 “아레나”가 출시되었을 당시 전무했고 게임 내 날짜, 요일, 시간이 존재하는 세계관과 축제, 전쟁 등의 이벤트는 21세기에 출시된 게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기도 하다.

시리즈가 거듭되며 이런저런 수정을 거쳐 “엘더 스크롤”의 세 번째 시리즈 “모로윈드(Morrowind)”를 시작으로 엑스박스, 플레이스테이션 콘솔 버전으로 출시되어 다수의 올해의 게임 상을 수상하면서 “엘더 스크롤”의 위상은 높아져 가기 시작했다. 게임 좀 해봤다 싶은 사람은 “엘더 스크롤”을 직접 플레이하지 않았어도 기괴한 외형이나 민망한 천 쪼가리를 걸치고 플레이하는 등의 스크린샷을 본적이 있을 테다. 이는 “엘더 스크롤” 시리즈 플레이어가 유독 열광하는 모드(MOD, Modification) 탓인데, 모드는 기존 게임 요소를 변형해 만든 2차 창작 콘텐츠를 일컫는 말로 말도 안 되는 성능의 아이템을 추가하거나 게임 내 등장하는 NPC, 캐릭터의 외형을 변형하고 누드 모드와 성행위 모드 까지 추가해 버리는 기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사실 그쯤 되면 모드의 용량이 게임 원본의 용량을 초과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져 버린 상황이 되어버리기도. 모드를 사용해 영화 “스타워즈”의 광선검을 휘두르거나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의 몬스터볼을 던져 사냥하는 기괴함을 보여준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rld Of Warcraft)

2004년 출시해 세계 게임 명예의 전당에 최초로 헌액된 전설적인 온라인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MMORPG로 꼽힌다. 지금은 인기가 한풀 꺾였지만, 한때 이 게임으로 인생을 말아먹을 뻔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리라. 게임 내 보스몹을 처치하기 위해 수십 명의 플레이어가 하나의 파티로 묶여 그들을 통솔하는 “공대장” 출신은 게임뿐 아니라 사회에 나와서도 무슨 일이든 잘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떠도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역시 커스터마이징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온라인 게임 역시 출시 초기에 지원하지 않았던 커스터마이징의 영역을 지속적인 업데이트로 가능케 했는데, 2세대 온라인 롤 플레잉 게임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아이템 형상을 복사해 다른 아이템에 덮어씌우는 형상 변환 시스템을 적용했다. 콘솔 게임 기반인 “엘더 스크롤”과 같이 외형이 극적으로 변하지 않지만, 플레이어가 원하는 모델을 정해놓고 그와 비슷한 외형을 가진 아이템을 찾아 모으는 소소한 재미를 선사한다. 사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외형에 집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업적, 퀘스트, 수집 등 게임 내 콘텐츠가 있기에 “엘더 스크롤”에 비하면 집에서 차 마시는 수준의 커스터마이징이다. 물론 고인물은 다르겠지만.

메이플스토리(MapleStory)

비슷한 시기 한국 온라인 게임의 커스터마이징도 빼놓을 수 없다. 1996년 한국 최초의 온라인 게임 “바람의 나라”를 성공적으로 제작, 배급한 넥슨은 “크레이지 아케이드”, “메이플스토리”, “카트라이더”를 차례로 성공시키며 시장에서 영향력을 뻗치기 시작했는데 이때 넥슨은 게임 내 현금과 1:1 대응하는 캐시로 아이템을 구매할 수 있는 상점 시스템을 이용하여 캐릭터를 치장할 수 있는 아이템을 판매하는 전략을 채택해 커스터마이징 콘텐츠의 수익화를 끌어냈다. 필자 역시 이 유혹에 빠지고 말아 부모님 몰래 집 전화로 10만 원을 현질(과금) 했던 기억이 있다. 얼마나 철없는 시절의 이야기인가… 변명을 하자면, 그 시절엔 게임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외형이 소위 ‘구리면’ 제대로 된 유저 취급도 받지 못했던 시기였다. 그 정점을 찍은 “메이플스토리”는 2D 횡 스크롤 MMORPG를 채택하고 있음에도 특유의 대두 캐릭터로 승부하며 커스터마이징 대신 “코디”, “룩”이란 용어로 귀여움을 겨뤘다. 이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메이플커마” 사이트에 자신의 캐릭터로 타투까지 하는 사람이 있으니 말 다 했다.

소울칼리버(SOULCALIBUR)

커스터마이징이 빛을 발하는 게임은 역시 액션 대전 게임이 아닐까? 실력과 별개로 기괴한 외형은 상대로 하여금 멘탈 데미지를 입히기 마련. 일본 게임 개발사 “반다이 남코”가 출시한 격투 게임 쌍두마차 “소울 칼리버”와 “철권” 중 “소울 칼리버”는 한계가 없다 싶을 정도의 높은 자유도의 커스터마이징 시스템으로 이쪽 세계의 끝을 보여준다. 오죽하면 하라는 격투 대결은 안 하고 커스터마이징 콘텐츠에만 몰두하는 플레이어가 많아져 커스터마이징 대회가 열릴 정도니 말 다 했다. 격투 게임 계열에 속하는 “철권”, “스트리트 파이터” 역시 커스터마이징 시스템을 제공하나 소울 칼리버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밀 수준. 특히나 기본 외형마저 차마 눈에 담기 힘든 SM 코스튬의 대머리 아저씨 캐릭터 볼도를 베이스로 한 커스터마이징은 캐릭터 특유의 몸동작과 기술에 완벽 호환하는 작품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니 이것이 가히 예술이라 할 수 있겠다.

겟엠프드(Get Amped)

한국의 온라인 액션 대전 게임 “겟엠프드”는 스킨 시스템으로 플레이어가 직접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는 것을 넘어 다른 사람이 만든 파일을 자신의 캐릭터에 적용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를 통해 애니메이션과 영화 속 인물은 물론이고 실존 인물을 모델링하여 스킨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스킨 파일을 적용하여 커스터마이징하는 시스템은 사실 “겟엠프드”가 인기를 얻게 된 메인 콘텐츠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전문적으로 스킨을 만들어 판매하는 스킨 제작자는 온라인 게임 거래소를 통해 자신의 스킨 창작물을 판매하였는데, 적게는 5천 원부터 의뢰받아 고퀄리티 스킨을 만드는 제작자는 10만 원이 넘어가기도 하였다. “겟엠프드” 운영 측도 고퀄리티 스킨 제작자를 고용해 게임 아이템 홍보에도 활용했다고 하니 이정도면 완벽한 상부상조가 아닌가.


이젠 대다수의 온라인 게임이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시스템을 지원하면서 플레이어는 커스터마이징을 하나의 콘텐츠로 영위하기 시작했다. 단순하게 복장과 헤어스타일을 바꿀 수 있는 수준의 커스터마이징을 넘어 체형을 변형하고 이목구비를 과하게 변형하는 등의 기괴한 커스터마이징 스크린샷이 온라인에 떠돌면서 하나의 놀이이자 작품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게임 커스터마이징은 자신의 취향을 게임 속에서 드러내는 콘텐츠 섞기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뒤틀린 욕망이건, 아름다움을 추구하건, 캐릭터 커스터마이징으로 표출되는 예술적 욕망의 결과물들을 재밌게 지켜보는 것도 하나의 오락이 되지 않을까?


이미지 출처 | Google, Reddit, The escapist, 메이플커마, 유튜브 videogamedunkey

RECOMMENDED P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