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 영화 “타짜” 中 에서…
어느덧 쌀쌀해진 가을로 접어들었다. 결국 올해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생각에 싸늘해진다. 10월은 어느새 명절로 자리 잡은 핼러윈이 있는 달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다양한 코스튬과 밤새 이어지는 파티를 구경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동안 탈 일상적인 핼러윈 분위기를 기다려온 사람들에게는 올해는 정말 아쉬운 해지만, 정작 코스튬은커녕 바 구석에서 잭 콕으로 어색함을 해소하던 이들도 많았을 터. 차라리 이럴 때는 편안한 집에서 마음껏 웃을 수 있는 통쾌하고 화끈한 영화를 보고 싶다. 10월 비즐라 비디오 방(VISLA VIDEO ROOM)에서는 ‘10월 핼러윈의 화끈한 B급 영화’ 몇 편을 준비했으니, 부디 입맛에 맞기를.
“오늘도 평화로운(Super Margin)”
중고 거래사기 ‘감독’ 실화 “오늘도 평화로운(Super Margin)”은 성능 좋은 맥북을 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작품일 것이다. 목공소에서 일하며 영화 감독을 꿈꾸는 영준(손이용)은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맥북을 구입했지만,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복수를 다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특히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세상이 무너진 것과도 같은 심리 상태를 사실적으로 그리며, 수 많은 중고 거래 사기 피해자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든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큰 요소는 스릴러와 느와르를 넘나드는 패러디 대축제다. 영화 “테이큰(Taken)”의 리암 니슨 (Liam Neeson)의 전화 장면을 패러디한 장면과 보이스 피싱 일당의 본거지에서 내뱉는 “아저씨”, “해바라기”의 명대사들, 더 나아가 “원티드 (Wanted)”와 “이퀼리브리엄(Equilibrium)”의 화려한 쌍권총 액션 신(Scene)을 뻔뻔하고 코믹스럽게 패러디했다. 화룡점정은 “해바라기” 김래원의 명대사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했냐!”를 영준이 악당들에게 내뱉은 후, 오히려 악당이 “해바라기 봤구나?”라며 어떤 영화를 패러디했는지 친절하게 설명하는 것.
한편 핼러윈 기간 중 주성치 영화 “파괴지왕(破壞之王)”을 코스프레하는 다소 마이너한 사람을 본적이 있는데, 이 영화야말로 그 캐릭터를 완벽하게 코스프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괴지왕”의 주인공 하금은(주성치)의 룩은 물론 매번 사기만 당하는 모습까지 비슷하다. 어찌됐건 주인공 영준은 맥북을 얻어 영화 감독이 될 수 있을까? B급보다는 C급을 표방하는 감독의 철학이 짙게 묻어난 이 영화는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건네는 듯하다. 우리도 핼러윈 기간만큼은 누구나 자신이 되고 싶었던 모습의 욕망을 코스튬으로 내뿜지 않았던가.
“델타 보이즈(Delta Boys)”
네 명의 남자가 정장 셔츠에 검정 넥타이를 하고 옥상에 서 있다. 한참을 떠들다 잠시 숨을 죽이더니, 손가락을 튕기며 박자를 맞추고, 입을 열어 노래를 시작한다. 반주도 없고, 청중도 없다. 심사위원도 없고, 심사위원이 없기에 심사도 없고, 심사가 없기에 상금도 없다. 그리고 이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기에 나에겐 이들의 다음도 없다. 남는 건 노래를 마무리하며 손을 모으는 이들의 표정 정도인데, 분명 웃고 있지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쉽지 않다. 그래도 ‘Don’t forget the smile’. 방금 들었던 대사를 곱씹어 본다.
9회차 촬영과 250만 원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델타 보이즈”엔 B급 영화 특유의 과잉된 액션, 낭자한 선혈, 기괴한 분장은 없다. 영등포 뒷골목이나, 종로3가 구석 어딘가에서 만날 법한 남자 네 명이 라면을 끓이고, 삼겹살을 굽고, 노래를 부를 뿐이다. 그럼에도 “델타 보이즈”는 몇 번이고 다시 돌려볼 정도로 강렬한데, 그 까닭은 영화 내내 지속되는 웃음에 있지 않나 짐작한다.
그 웃음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의 남루함을 화려하게 드리블해 배를 잡게 만드는 “기생충”의 웃음과는 다르다.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 옆자리로 나를 자리 잡게 한 뒤, 마음속 어디쯤 머물던 기억을 복원시켜 함께 피식거리고, 깔깔 대게 만드는 웃음이다. 이 웃음엔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일말의 불편함도 없이 웃을 수 있는 순간이란 얼마나 소중한가. 영화의 스펙터클이나 그로테스크가 주는 강렬함은 영화를 떠나 현실로 복귀하는 순간 삽시간에 사라져버리지만, 관객의 기억을 소환해 자신과 섞어버린 뒤 결국 웃게 만드는 영화의 강렬함은 또 하나의 기억으로 점점 더 단단해진다.
“델타 보이즈”를 보면서, 자신의 스타일을 뽐내기 위해 쓰이는 단어 정도로 치부돼버린 것 같아 등한시했던 B급 영화를 다시금 생각했다. B급 영화는 대공황 속 할리우드가 맞은 위기를 극복하고자 제시된 타개책이었고, 이후 50년대엔 독립영화들이 가진 상상력과 자유성 그리고 그로 인해 생성되는 가능성을 대표하는 명사였으니까. 즉 B급 영화의 역사는 제한적 상황이 주는 절망을 전복시켜 희망으로 향하고자 했던 사투의 흔적이며, 표면적으론 그저 기괴해 보이던 영화들 역시 그 나름의 치열한 싸움을 이어가는 과정이었을 테다.
“블루벨벳(Blue Velvet)”
올해는 핼러윈을 핑계 삼아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서 가면 뒤에서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볼 수 없을 듯해 아쉽다. 핼러윈은 그리스도교에서 세상을 떠난 성인과 신자들을 기념하기 위한 ‘만성절’이란 날의 전야제다. “왜 동방에 아무 상관 없는 작은 나라에서 난리야?”라고 혀를 차며 거리를 둔 채 엷게 뜬 눈을 이용해 칼처럼 재단하던 사람들도 올해는 심심하겠다. 영화 속 흰 줄 마약 중독자들처럼 그것이 주는 흥분에 중독돼있었을 텐데… 많은 사람이 핼러윈 코스튬에 왜 그렇게 열광을 했을까? 각기 다른 이유이겠지만 사견을 하나 더 붙여본다면, 가면 뒤 그림자를 볼 수 있는 날이 평소에는 없어서이지 않을까? (평소엔 명분이 없다 아입니까 명분이.) 많은 사람이 방법을 모르거나, 시간이, 여유가 혹은 보고 싶지 않아서일 테다.
세상을 음양의 안경을 쓰고 본다면 핼러윈은 일 년 중 음기가 가장 강한 날일 것이다. 낮과 밤, 산 자와 죽은 자, 남자와 여자. 또 음양으로 무엇을 껴맞춰 볼 수 있을까? 분석심리학의 칼융은 인간의 정신을 ‘Ego’와 ‘Shadow’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건강한 정신이란 조화와 균형을 이룬 상태의 영혼이라 말한다. 균형으로 이루어져 있는 세상이라면 한 개인의 균형도 중요할 테고, 외면뿐만 아니라 내면의 돌봄 또한 중요할 것이다. 핼러윈은 바쁜 현대 사회인들에겐 내면을 돌아보기 위한 일종의 심리치료극의 날 같은 것 아닐까? 그렇다면 어떠한 문화와 상관없이 그날이 주는 계기에 열광하는 게 이해되지 않은가? 평소 꽁꽁 싸매놓은 자신의 그림자를 위한 해방의 날. 그 모습이 한편으론 정원 위 꽃보다는 흙 아래 꿈틀거리는 벌레들과 비슷할 수도 있지만, 그 자체도 아름답다. 코로나 때문에 사라져버린 심리치료극의 날을 대신해서 데이비드 린치 (David Lynch) 감독의 화끈한 명상체험 영화 “블루 벨벳 (Blue Velvet)”을 추천할까 한다.
본격적으로 데이비드 린치가 자신의 세계관을 펼쳐내기 시작한 첫 작품으로, 영화는 B급 성장 미스터리 로맨스 영화라고 할 수 있을듯하다. 그가 어둠을 표현하는 방식은 우릴 당황스럽게 하고, 강렬하며, 친절하지 않다. 하지만 그런 그의 영화에서 특별한 점이라면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처럼 아는 쪽에서 모르는 쪽으로 행해지는 힘의 방향을 감독은 끝까지 확정하지 않는다. 그런 점들이 이 영화가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권위적이지 않고 각자의 경험을 존중하는 태도를 만들었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요즈음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을 보면 온통 싸움과 고발 그리고 끝없는 자기 의견 피력과 사과로 점철되어 있다. 자폐적이다 싶을 정도로 요즘 시대에는 남의 이야기를 듣고 품어주는 사람이 많지 않은 듯하다. 인터넷 속 사람들이 투명 인간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인가? 모니터가 꺼지고 검은 화면이 날 비추는 거울이 될 때 우리의 어두움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까?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블루 벨벳”으로 파란 벨벳 커튼 뒤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체험해 보자.
“지구가 끝장 나는 날(The World’s End)”
쌀쌀해진 날씨와 바뀌어 가는 바깥 풍경에 올 한 해도 그 끝을 향해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될 때 떠오르는, 매년 연말 반복되는 비슷한 유형의 고민. “나는 이번 한 해 무엇을 성취했는가”를 생각해봤자 골치만 아플 고민임을 알면서도 찰나와 같던 연휴는 다음 해를 기약해야 하고, 정신 차려보니 시간은 벌써 이렇게나 흘러가 버린 상황이라면 마음속 후회와 조바심을 남몰래 키워가는 것도 이상하지만은 않겠다.
적극적으로 코스튬 의상과 나들이 준비를 했을 수도, 서양 잔칫날에 유난 떨 필요 없다며 회의적인 태도로 임했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 기억 속의 핼러윈은 생각이 많아지는 계절에 마음의 환기를 빌미로 삼삼오오 모여 재미난 작당을 하던 그런 날이었다. 더불어 혼자만의 주책맞은 고민에 빠져들지 않기 위한 좋은 핑곗거리였을 수도. 적응하기 벅찰 정도로 짧은 기간에 생활환경은 급변했고, 그 움직임에 발맞추어 가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 역시 두말할 것 없다. 모두가 각자의 해소법을 찾아 헤매는 듯한 요즘, 이렇다 할 대안이 없다면 코미디 영화 한 편 시청하는 게 가장 뻔하면서도 직관적이며, 효과적인 기분전환 방법이 아닐까.
에드가 라이트(Edgar Wright) 감독의 ‘코네토 트릴로지(Cornetto Trilogy)’ 중 하나인 “지구가 끝장나는 날(The World’s End)”은 과거의 영광 속에 살고 있는 주인공 게리 킹(사이먼 페그)이 고교 시절 친구들과 재회해 어릴 적 끝내 실패한 12개 펍 (Pub) 순례에 다시 한번 도전하던 중, 의도치 않은 외계 종족과의 싸움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가 오랜만에 돌아간 고향 모습은 어딘가 이질적으로 느껴지고 만나면 반갑기만 할 것 같던 친구들도 마음 같지 않다. 주인공은 대놓고 싫은 눈치를 주는 일행을 상대로 뻔뻔하게 굴어가며 마을을 외계인이 장악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12개 펍 도장깨기를 이어가는 뚝심을 보여주는데, 보통의 기준, 철들지 못한 어른아이 취급 받는 게리 킹이 처한 현실적인 상황 속 이야기와 비현실적 설정의 조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감정을 교차하게끔 한다.
외계 종족과 아포칼립스를 소재로 한 코미디 영화이지만 극이 진행되는 중간마다 등장하는 의미심장한 대사들은 살면서 누구나 처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 씁쓸한 감정에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법한 위로를 전해준다. 너무 몰아붙이지 않아도, 혹은 미성숙하거나 앞뒤가 일치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느낌이다. 가끔은 도처에 만연해있는 강박에 가까운 긴장을 풀고 조금 더 편안하게 사건을 바라보는 것은 어떨까. 골머리 앓던 일이 예상치 못하게 해결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미지 출처 | Naver 영화, Rotten Tomatoes, 영상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