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가볍고 더 작게, 편리와 하이테크놀러지가 로망인 시대에 굳이 불편을 감수하고 턴테이블 위 바이닐을 올려 듣는 행위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나? 새삼스럽지만 우린 꽤 오래전부터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음악을 재생할 수 있는 찬란한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 따라서 지금 시대에 음반을 구매하는 행위에는 다양한 의미와 나름의 철학이 담긴다. VISLA 시리즈 ‘디거의 노래’는 디지털 시대의 기행종, 바이닐 컬렉터들을 찾아가 그들의 수집 철학을 묻고, 더불어 컬렉터들의 애장 음반을 추천받고자 한다.
5월 ‘디거의 노래’ 주인공은 디제이, 프로듀서로 활동하는 엘라이크(L-Like). 최근 바이닐 수집에 흥미가 생겨 열심히 LP를 모으는 중이라는 그의 수납장엔 묵직한 소울, 훵크 명반과 힙합 음반이 다수 자리했다. 두꺼운 투명 겉 비닐에 정성스럽게 포장된 음반들을 보아 추측하건대, 그는 바이닐에 깊은 애정을 쌓아가는 듯했다. 엘라이크와 바이닐을 주제로 나눈 대화를 하단에 공개한다.
간단한 소개를 부탁한다.
프로듀서, 디제이로 활동하는 엘라이크다.
레코드를 모으게 된 계기를 알려줄 수 있나?
디제이 스프레이(DJ Spray)에게 바이닐을 선물 받은 것이 첫 계기가 됐다. 그런데 선물 받을 당시는 턴테이블이 없어서 들어볼 방법이 없었지. LP로 음악을 듣는 일에 호기심이 생겨 턴테이블까지 구매하게 됐는데,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대비가 매력적이었다. 그때부터 모으기 시작해서 가끔 판을 구한다.
구매한 턴테이블 모델은?
테크닉스(Technics)의 ‘SL-1200 MK5’를 구했다. 주변 디제이들이 많이 권한 모델이다. 덕분에 잘 쓰고 있다.
바이닐을 모으기 전, CD나 테이프 등의 타 피지컬 포맷을 소장하기도 했나?
내가 음악에 관심을 가질 때는 막 MP3가 나오기 시작했고, CD나 테이프, 바이닐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주변 소문에 의하면 요즘엔 음반을 정말 많이 구매한다고 들었다. 바이닐 수집에 빠진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물리적인 형태로 소장한다는 행위가 좋은 에너지를 준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서다. 온라인 디지털 플랫폼으로 간편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LP를 소장하고 이를 듣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본론으로 돌아가 오늘 소개할 바이닐을 어떤 주제로 소개할 것인가?
‘현재진행형’으로 정했다. 준비한 LP를 어떻게 잘 전달할까 나름 고심하며 고른 주제다. 소개를 위해 고른 LP의 절반은 고등학생 때 듣던 음악.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요즘 많이 듣는 곡이다. 신기하게도 고등학교 때 듣던 음반이 주로 밴드, 연주 기반의 음반들이 많다. 나머지 셋이 샘플링 기반의 힙합 앨범인데, 요즘 음악 흐름과 맞물린 것 같았다. 아무래도 소울, 훵크 등의 과거 음악을 샘플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리고 그러한 샘플 기반의 음악이 또 어떻게, 어디로 흘러가게 될지가 궁금해지는? 또 현재 바이닐을 열심히 수집하고 있으니 중의적 의미로 ‘현재진행형’을 주제로 설정했다. 하하.
이제 애장 음반을 소개받고자 한다. 처음으로 소개할 LP는?
첫 LP는 샤카탁(Shakatak)의 [Invitations]이다. 이 밴드는 17살, 피아노 학원에서 카피 숙제를 내줘서 알게 됐는데 계속 듣다 보니 좋아지게 된 밴드였다. 사실 “Night Birds”와 “Day by Day”를 카피하는 것이 숙제였는데, 음악이 너무 좋아서 추가로 “Invitations”과 “Stranger”를 찾아 들었지. 특히 샤카탁의 멜로디 라인에서 피아노 톤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피아노 톤은 독특했고 포근하면서 사람이 얘기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추억이 담긴 앨범인데, 레코드 숍 모자이크(Mosaic)에 가니 우연히 팔고 있었다. 그래서 바로 구매했다. 저렴한 가격이 한몫했다.
앨범에서 추천할 트랙은?
“Invitations”도 추천하지만, 이건 워낙 유명한 곡이라 오히려 “Stranger”를 추천하고 싶다.
디제이로 다양한 베뉴에서 활약하는 동시에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다. 샤카탁 등의 훵크는 샘플로 수집했을 법한데.
샘플링은 아직 본격적으로 시도해보진 않았다. 이제 막 바이닐을 수집했으며, 추후 스튜디오를 넓힌 뒤 진행할 계획이다. 추후 영화 음악, 게임, OST 판에서 샘플을 채취해보고 싶다. 그동안 주로 ‘스플라이스(Splice)’에서 샘플을 찾았다. 그런데 우연히 바이닐로 샘플로 음악 작업하는 영상을 보고 관심이 생겨 바이닐을 차근차근 모으고 있다.
다음 소개할 바이닐은?
다음은 토토(Toto)의 [IV]. 평소 록 음악을 만들지도, 잘 듣지도 않아서 내가 소개하기엔 생뚱맞긴 한데, 그래도 토토의 [IV]은 스테디셀러이며 워낙이 명곡이 많이 수록된 음반이기도 하니까. 내가 토토를 좋아하는 포인트는 그들이 록 장르로 구분되지만, 그루브를 타게 되는 록 음악이라서다. 앨범 [IV] 에서는 트랙 “Rosanna”와 “Africa”을 특히 좋아했다. 이 또한 고등학생 때 카피하며 많이 들었고 2019년 서울 레코드 페어에서 구매했다.
실용음악을 공부하면서 카피 숙제를 받으며 한 곡을 집중적으로 분석했다고 밝혔다. 그렇게 분석하며 피아노 외 다른 악기나 어느 요소에 매료되기도 하나?
그런 경우도 많았다. 악기뿐만이 아니라 악기의 위치, 패닝(Panning)에 신경 쓴 흔적을 발견하고 거기에 몰두하여 듣기도 하고, 톤과 레이어, 라인, 선율 등 매료될 요소가 너무나도 많았다. 사실 그 취향이 하루하루 달라지기도 한다.
요즘은 어떤 지점에 빠져있나?
요즘엔 케이트라나다(KAYTRANADA)의 샘플링과 그의 독특한 패닝에 푹 빠져있다. 평소에 듣던 음악들보다 색다른 믹스 같아서 신선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케이트라나다 앨범 [99.9%]를 소개하려고 하지 않았나? 내친김에 케이트라나다 음반 소개를 부탁한다.
케이트라나다의 [99.9%]는 그야말로 대박 작품. 일단 난 케이트라나다의 광팬이다. 그가 내한했을 땐 맨 앞에서 지켜보기도 했다. 아무튼 [99.9%]는 프로듀서로 바라볼 때 많은 충격을 안겨주는 앨범이다. 또한 샘플링이 멋지기도 하고. 샘플링을 기반으로 재즈, 훵크, 소울을 모두 담은 100점짜리 앨범. 사실 힙합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옛날에 좋아했던 앨범은 대부분 샤카탁과 같은 연주 앨범이었고. 따라서 샘플링 개념을 알게 된 지도 3년밖에 안 됐다. 심지어 올드스쿨이 뭔지도 몰랐다. 그래서 [99.9%]에서 큰 충격을 받지 않았나 싶다.
[99.9%]에서 추천할 트랙은?
“BUS RIDE”가 최고다. 카리엠 리긴스(Karriem Riggins)의 드럼이 저만치 앞으로 나온 것이 독특했다. 찢어질 듯 말 듯 한 오픈 하이햇 또한 너무 멋지다. 케이트라나다의 안목 또한 부럽다. 다방면에 재능을 갖춘 오각형의 인간인 듯. 샘플을 고르는 안목도 있고, 누구와 함께 음악을 만들어야 할지 알며, 옷도 잘 입고,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했다.
힙합을 비교적 최근에 듣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조금 의외다. 스테이지에서 플레이할 때 힙합을 자주 틀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때의 힙합 셋을 모두 지우고 싶다. 지금도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음악이 마냥 좋으면 그냥 틀곤 했었다. 신중하게 음악을 고르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그렇다면 힙합을 접하게 된 계기는?
우연히 유튜브에서 프로듀싱 튜토리얼 영상을 보다가 어떤 사람이 훵크, 소울을 잘라서 힙합으로 만드는 것을 보고 힙합을 듣기 시작했던 것 같은데, 사실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연주 음악을 좋아해서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다음으로 소개할 바이닐은?
데오다토(Deodato)의 [Love Island]. 오늘 소개할 음반 중 발매년도가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역시나 고등학생 때 자주 들었고 특히 학원을 왔다 갔다 하는 버스 안에서 많이 들어서 당시를 떠오르게 하는 향수 같은 앨범이다. 따뜻하고 포근한 소리를 담고 있어서 귀가할 때 많은 위로를 받았다. 이건 김밥 레코드(Gimbab Record) 할인 매대에서 정말 저렴하게 구했다. ‘이 명반이 왜 안 팔려서 할인 매대에 있지?’라는 생각으로 반갑게 구매했다. 추천곡은 “San Juan Sunset”이다.
다음으로 소개할 바이닐은?
톨 블랙 가이(Tall Black Guy)의 [Let’s Take A Trip]이다. 케이트라나다와 마찬가지로 이 앨범 역시 나의 프로듀싱에 많은 영향을 줬다. 앞서 디제이 스프레이에서 선물 받은 LP가 바로 이것. 친해진 뒤에 톨 블랙 가이의 이야길 꺼내니 대뜸 바이닐을 선물로 주더라. 아무튼, 나의 첫 LP였고 너무 기뻐서 이 앨범 또한 스스로 카피해보려 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코드가 생각보다 간단했다는 사실. 정말 깜짝 놀랐다. 반드시 코드가 많고 라인이 많지 않아도 좋은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또한, 단단한 킥, 스네어와 자연스럽게 라인이 변화되는 것이 멋지기도. 사운드클라우드로 디지털 음원을 많이 찾아 들었는데, 독특한 구성과 색깔이 다양한 트랙이 많았다. 그중 가스펠 소스를 챱(Chop)해서 만든 리믹스가 기억에 제일 남는다.
추천할 트랙은?
마세고(Masego)가 참여한 “Peace And Love”를 추천한다.
마세고가 피쳐링을 참여했지만, 그의 보컬이 도드라진다기보다는 하나의 화음 악기로 역할 하는 것 같아 인상적이다.
그래서 오히려 좋다. 트랙에 잘 스며든 것 같고.
다음으로 소개할 바이닐은?
루츠 매뉴바(Roots Manuva)의 [Dub Come Save Me]이다. 이 앨범은 디제이 코커(DJ co.kr)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는 워낙 음악을 재밌게 잘 틀고, 영국 힙합과 덥(Dub)에 식견이 넓다 보니 그를 따라 루츠 매뉴바까지 찾아 듣게 됐다. 신기한 게 과거에는 ‘덥’이란 단어가 아예 보이질 않았는데, 이 앨범을 듣고 난 뒤 덥이 눈에 자주 보이기 시작한 것. 이를테면 이펙터 프리셋에 덥 에코(Dub Echo) 등의 이펙터가 전혀 보이지도 않았고 사용할 생각도 없었는데 이 앨범을 계기로 요즘은 몇 번씩 사용해보고 있다. 역시 음악을 많이 듣는 것이 정말 중요하구나 싶었다.
앞서 음반을 소개하며 제작의 레퍼런스가 되었다고 꾸준히 언급했는데, 그러한 본인의 작업물은 어디서 들을 수 있는지.
올해가 지나기 전에 음반을 발매할 예정으로 총 9곡이 수록되었고 6곡이 보컬 곡, 3곡이 인스트루멘탈 트랙이다. 인스트루멘탈의 경우는 케이트라나다와 톨 블랙 가이에게 영감을 얻었다. 그들과 같이 드럼으로 큰 영감을 주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
보컬, 래퍼의 목소리를 빌려왔던 지난 프로덕션 때문에 곧 발매될 앨범의 인스트루멘탈이 되려 기대된다.
사실 인스트루멘탈 음반을 제작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큰 도전이다. 인디펜던트 음반이라도 상업적으로 이어질 수 있고, 그런 상업적인 부분도 무시할 순 없으니까. 내가 인스트루멘탈 곡을 만들었다는 이야길 꺼내면 피드백 또한 반반 나뉘기도 했다. ‘그럴 거면 보컬을 얹혀라’ 혹은 ‘멋있는 도전’이라는 의견. 그래서 생각한 것이 차라리 반반 합치자는 것이다. 사실 연주 기반의 곡을 두 곡 제작한 적이 있었다. 근데 보컬 곡보다 피드백은 적어서 연주곡을 제작하는데 용기가 부족했다. 그러나 이번 앨범을 통해 인스트루멘탈 또한 나의 음악적 색깔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또 케이트라나다 앨범을 들으며 인스트루멘탈을 반드시 넣어야겠다 다짐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바이닐은?
알 재로(Al Jarreau)의 [Breakin’ Away]이다. 알 재로 역시 고등학교 1학년 때 즐겨듣던 뮤지션이다. 음악 학원에서 언니들이 권해서 들었던 뮤지션인데 라이브에서 베이스를 연주하는 듯한 모션과 함께 스캣하는 모습이 강렬히 기억에 남았다.
본인은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냈기에 80년대 소울, 훵크 음악을 공유하는 고등학생의 모습을 상상하니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는데, 한편으로 그러한 환경이 어릴 적부터 조성된 것이 부럽기도 하다.
실용음악 학원이나 학교에 다니면서 음악에 대한 교류는 너무 좋았다. 근데 아무래도 재즈를 위주로 공부하는 곳이기 때문에 힙합에 대한 정보 많이 부족했던 거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미디와 힙합에 관심이 생겨 자연스럽게 실용음악 학교를 자퇴했다.
[Breakin’ Away]에서 추천할 트랙이 있나?
사실 다 좋은데, 이 앨범에서는 “Breakin’ Away”을 가장 즐겨듣는 편. 다른 앨범에서는 “Spain”을 추천한다. 또한 알 재로는 라이브가 재밌으니 음원과 라이브를 함께 찾아 듣는 것을 권한다.
오늘 고른 바이닐은 모두 과거에 듣던 음반들이다. 반면 레코드 숍이 취급하는 바이닐 중 다수는 들어본 적도 없는 미지의 음악일 것. 단순 호기심으로 집으로 데려온 바이닐은 없었나?
최근 다이브 레코드(Dive Record)에서 한 장 구해오긴 했다. 일단 가격이 비싸니까 들어보고 싶은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서 매장에서 직접 들어봤는데 조금 특이했다. 난잡하고 거친데, 나름 정교하게 벨런스가 잡힌 음반. 집에서 집중해서 듣고 싶은 음반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걸 집에서 음원으로만 들었다면 그냥 스킵했을 것 같다. 돈을 지불하고 사 오는 과정이 있었기에 더욱더 애착을 두게 되는 것 같더라. 그런 마음에서 더 들어보니 내가 들었던 음악들과 다른 것이 들리기도 하고. 그래서 뭐든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마지막 질문이다. 지금 구하고 싶은 판이 있다면?
다니엘 휴메어(Daniel Humair)의 [Drumo Vocalo]. ‘디거의 노래’ 섭외를 받고 시리즈를 꼼꼼히 정독했는데, 에스피오네(espionne)가 소개한 [Drumo Vocalo]가 너무 좋더라.
에디터 │ 황선웅
포토그래퍼 │김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