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들어 길거리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는 이름이 하나 있다. 10~20대들이 입고 다니는 티셔츠에 새겨진 이름, 마크 곤잘레스(Mark Gonzales)가 바로 그것. 많은 이들이 바나나로 오해하는 ‘엔젤(Angel)’ 로고로도 잘 알려진 마크 곤잘레스는 국내 패션 기업 배럴즈에서 전개하는 라이선스 브랜드로, 적당한 가격대와 공격적인 마케팅을 앞세워 2020년에만 매출 300억을 넘볼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서울의 길거리가 ‘엔젤’ 로고로 채워지기 시작하면서 마크 곤잘레스는 어느새 꽤 익숙한 이름이 되었지만, 정작 그 이름의 주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무신사에는 ‘미국의 전설적인 프로 스케이터이자 아티스트’라고 친절히 설명되어 있지만, 단 한 문장으로 그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한 번이라도 이 수수께끼의 인물에 대한 궁금증을 품어본 적 있는 이들을 위해, 이번 VISLA 인물 열전에서는 스트리트 스케이트 보딩의 선구자이자 전방위 예술가인 마크 곤잘레스의 삶을 보다 심도 있게 들여다보고자 한다.
1980년대, 스트리트 스케이트 보딩의 탄생
마크 곤잘레스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기에 앞서, 우선 그가 스케이트 보딩을 시작한 1980년대 미국 스케이트보드 신(Scene)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1980년대 초반, 미국에는 크게 두 종류의 스케이트보딩 스타일이 신을 양분하고 있었다. 하프파이프(Half-Pipe)나 풀(Pool) 등의 기물을 사용하여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버트(Vert) 스케이트 보딩이 한 축을 이뤘고, 일반 스케이트보드보다 좀 더 작고, 얇은 보드 위에서 화려한 동작을 선보이는 프리스타일(Freestyle) 스케이트 보딩이 다른 한 축을 이뤘다. 토니 호크(Tony Hawk)와 로드니 뮬런(Rodney Mullen)으로 각기 대표되는 이 두 스타일은 80년대 후반으로 넘어갈 수록 서서히 힘을 잃게 되는데, 버트 스케이팅의 경우 높은 보험 비용과 각종 사고로 인한 소송으로 스케이트 파크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하며, 프리스타일 스케이팅의 경우 정확히 알려진 내용은 없으나 부담스러운 실루엣과 화려한 컬러가 돋보이는 패션이 당시 많은 이들의 박해(?)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의 힌트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버트 스케이팅과 프리스타일 스케이팅이 남긴 아쉬움을 채우고자 등장한 새로운 스타일이 바로 스트리트 스케이트 보딩(Street Skateboarding)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스케이트보드’라는 단어를 듣고 떠올리는 대부분의 장면, 즉 스케이트보드를 탄 채 계단을 뛰어넘고, 난간 위로 미끄러지는 모습들은 모두 스트리트 스케이트보딩에 속한다. 1978년, 앨런 겔판드(Alan Gelfand)가 올리(Ollie)를 발명하며 쌓아 올린 기반 위에 싹 틔운 스트리트 스케이트보딩은 도심 전체를 하나의 큰 스케이트파크로 삼았으며, 계단, 벤치, 난간 등 거리 위 다양한 장애물을 활용해 스케이트 보딩의 재미와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했다. 스트리트 스케이트보딩으로 인한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는 필라델피아의 러브 파크(LOVE Park)로, 한때 직장인들의 점심 식사 장소로 애용되었던 이곳은 이후 스케이트보딩의 역사 속 많은 주요 장면들을 빚어내는 공간이 된다.
스트리트 스케이트보딩의 탄생과 함께 신에는 많은 변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각종 트릭에 적합하도록 양 끝에 킥(Kick)이 있는 데크들이 등장했으며, 스케이터들이 운영하는 스케이트 샵과 ‘트래셔 매거진(Thrasher Magazine)’, ‘트랜스월드 스케이트보딩 매거진(Transworld Skateboarding Magazine)’ 등 관련 매체가 속속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1980년대 말, 파웰 페랄타(Powell Peralta), 산타 크루즈(Santa Cruz), 비전(Vision) 등의 등장은 스케이트보드 문화와 패션을 널리 알리는 데 크게 일조했다.
이 같은 거대한 변화의 선봉에 서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마크 ‘더 곤즈(The Gonz)’ 곤잘레스다. 비록 그는 토니 호크나 로드니 뮬런처럼 많은 트릭을 ‘발명’하지는 못했지만, 그 덕분에 오늘날 스케이트 보딩은 하프파이프를 넘어, 전 세계 길거리로 빠르게 흡수될 수 있었다. 2011년, 트랜스월드 스케이트 보딩이 토니 호크와 로드니 뮬런에 이어 그를 ‘역대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스케이터’로 꼽은 것은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사우스 게이트(South Gate)의 멕시칸 보이
“보통 사람들이 길을 걸으며 하나를 본다면, 마크 곤잘레스는 열을 본다. 게다가 그는 그 열 가지와 소통하기까지 한다.”
스파이크 존즈(Spike Jonze)
1968년 6월 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사우스 게이트에서 태어난 마크 곤잘레스는 13살에 처음 스케이트 보딩을 시작했다. 그는 매우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었는데, 부모님은 그가 아주 어릴 적 이혼했으며, 아버지가 양육비를 제대로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가정 형편마저 여유롭지 않았다. 어두운 집안 분위기는 그의 학교생활에도 영향을 끼쳤고, 사고뭉치로 낙인찍힌 그는 여러 학교로 전학 가기를 반복했다.
암울한 일상 속에서 그를 구원해 준 것은 스케이트보딩이었다. 당시 그가 사는 곳에서 몇 동네 떨어진 곳에는 어린 랜스 마운틴(Lance Mountain)이 살았는데, 그의 집에는 캘리포니아주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수준의 램프(Ramp)가 설치되어있었다고 한다. 스케이트 파크가 하나둘씩 없어지기 시작하자 갈 곳을 잃은 스케이터들은 그의 집을 찾아오곤 했는데, 마크 역시 그의 집에 방문하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랜스 마운틴에 따르면 마크는 주로 다른 스케이터들이 없는 이른 아침 시간대에 버스를 타고 찾아와 그의 집 문을 두드리곤 했다고. 당시 랜스 마운틴은 그의 이름조차 몰랐고, 그저 혼자 램프를 타는 이상한 꼬마 정도로만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상한 멕시칸 꼬마 아이’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일취월장하며 다른 스케이터들의 관심을 사로잡게 된다. 랜스 마운틴은 마크 곤잘레스의 잠재력을 처음 발견한 날을 기억하는데, 그는 “그때 나는 마크를 버스 정류장으로 데려다주는 길이었어. 그 애가 갑자기 차에서 내리더니, 보드를 타고 정류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지. 워후….. 그날 마크의 모습은 스트리트 스케이트보딩의 시작을 알리는 큰 변화였어. 차에서 내린 후, 마치 풀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탈 때처럼 도로와 연석(Curb) 위를 자유자재로 움직였지”라고 회상하며, “마크는 로드니 뮬런의 프리스타일에 올리를 더했고, 부드러운 흐름까지 갖추고 있었어. 당시 스케이터들은 파도처럼 기능할 수 있는 수직의 벽면이나 언덕의 비탈들을 찾아다니곤 했는데, 적당한 지형을 찾으면 트랜지션(Transition, 수평에서 수직으로 혹은 그 반대로 변하는 커브 구간)을 타고 가다가 끄트머리에서 트릭을 펼치는 식이었지. 하지만 그 친구는 트랜지션을 생략하고, 평범한 지면에서 기물 위로 뛰어올라 묘기를 펼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야. 그야말로 엄청난 진보였지”라고 설명했다.
15살이 되었을 때, 마크 곤잘레스는 이미 준수한 스케이터가 되어 있었다. 나타스 카우파스(Natas Kaupas)와 함께 진보적인 스트리트 스케이트보딩을 선보인 그는 알바(Alva)와 첫 스폰서 계약을 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스케이터로서의 역사를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는 학교를 그만두었고, 스케이트 보딩으로 돈을 벌기 시작했으며, 신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비주얼 아티스트인 토마스 캠벨(Thomas Campbell)은 당시의 마크 곤잘레스를 두고 “미친 수준의, 그야말로 끝내주는 스타일을 보여주는 멕시칸 소년”이라고 묘사했다.
빈플랜트(Beanplant)와 올리
“80년대 중반에 스케이트 보딩을 시작하고, 그와 함께 자란 이들에게 마크 곤잘레스는 신(God), 그 자체다”
에드 템플턴(Ed Templeton)
젊은 시절의 마크 곤잘레스가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각인 시킨 데는 두 가지 사건이 크게 작용했다.
첫 번째 사건은 1984년 11월, 그가 당시 스폰서였던 알바의 보드를 타고 빈플랜트(Beanplant)를 선보이는 장면이 트래셔 매거진의 커버에 실린 것이다. 모든 스케이터가 주목하는 잡지의 커버에 등장하면서 그는 빠르게 인지도를 쌓을 수 있었으며, 이내 비전의 스케이트보드팀에 합류하게 된다. 이미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그에게 트래셔 매거진은 프로 스케이터로 가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두 번째 사건은 1986년 여름, 샌프란시스코 엠바카데로(Embarcadero)에서 일어났다. 지금과 달리 스케이터들이 많이 찾지 않던 그곳에서 마크 곤잘레스는 한쪽 벽에서 올리를 구사하면서 뛰어올라 다른 쪽 플랫폼에 성공적으로 착지했다. 스트리트 스케이트보딩의 태동기였던 당시에는 상상도 하기 힘들었던 이 업적을 통해 그의 이름은 동료 스케이터들에게 전해졌고 그가 올리를 선보인 구간은 “곤즈 갭(Gonz Gap)”이라는 별명이 붙어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해에 마크 곤잘레스는 나타스 카우파스와 함께 계단 난간에서 트릭을 펼친 첫 번째 스케이터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스케이트보드와 함께 도심 속 기물들을 하나하나 정복해나가기 시작했으며, 스트리트 스케이트보딩 전도사로서 그 매력을 널리 퍼뜨렸다.
블라인드 시대
“마크 곤잘레스는 바람처럼 빠르며, 숲처럼 조용하고, 불처럼 용감하며, 산처럼 굳건하다.”
후지와라 히로시(Fujiwara Hiroshi)
전술했듯 트래셔 매거진의 커버를 장식한 후 비전 스케이트보드팀에 합류한 그는 1985년에 오션사이트 스트리트 콘테스트를 우승하는 등 자신의 기량을 맘껏 선보인다. 하지만 그가 비전에 머물렀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는데, 1988년에 그는 좀 더 다양하고 창의적인 행보를 보여주고자 비전에서 나와 동료 스케이터인 스티브 로코와 함께 블라인드(Blind)라는 브랜드를 런칭한다.
당시 더 월드 인더스트리(The World Industries)의 설립자였던 스티브 로코는 비전과 심스(SIMS)의 오너였던 브래드 도프만(Brad Dorfman)이 자신을 심스 팀에서 쫓아낸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때 비전은 마크 곤잘레스와 마크 ‘게이터’ 로고스키(Mark ‘Gator’ Rogowski)의 프로 모델 보드의 성공에 힘입어 업계 최고 브랜드로 우뚝 올라선 상태였는데, 스티브 로코는 이 거대 브랜드에 큰 엿을 날릴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에게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은 마크 곤잘레스였다. 당시 마크는 단순히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스티브 로코에게 접근했고, 어렵지 않게 의기투합한 이들은 새 브랜드의 이름으로 ‘비전’의 반대말인 ‘블라인드’를 선택한다. 스티브 로코의 사업가적 기질과 마크 곤잘레스의 예술가적 면모로 무장한 블라인드는 이후 비전의 명성을 위협할 정도로 빠르게 대중의 관심을 얻게 된다.
스케이트보드 문화에 관심이 없는 이들은 블라인드라는 이름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겠지만, 스트리트 패션을 좋아한다면 한 번쯤 그 브랜드에 영향을 받은 의류들을 목격했을 수 있다.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블라인드의 로고는 마크 곤잘레스가 1989년에 직접 디자인한 것인데, 2007년에 슈프림(Supreme)은 그에게 이 스타일을 그대로 살린 자사 로고 제작을 의뢰했고, 이후 그 로고는 여러 시즌에 걸쳐 다양한 제품에 사용되었다. 실제로, 마크 곤잘레스는 이외에도 슈프림과 많은 작업을 함께했고, 이에 대한 내용은 뒷부분에서 추가적으로 다뤄질 예정이다.
다시 블라인드로 돌아가 보자. 이 브랜드가 스케이트보드 역사에 남긴 업적 중 하나는 1991년에 공개된 “비디오 데이즈(Video Days)”라는 제목의 스케이트 필름이다. 우리나라에는 “그녀(Her)”의 감독으로 잘 알려진 스파이크 존즈(Spike Jonze)가 촬영한 이 VHS 영상에는 마크 곤잘레스 뿐만 아니라 가이 마리아노(Guy Mariano), 루디 존슨(Rudy Johnson), 제이슨 리(Jason Lee) 등 브랜드의 멤버들이 총출동한다.
영상에서 조던 리히터(Jordan Richter) 다음으로 등장하는 마크 곤잘레스는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의 “Traneing In”에 맞춰 동네를 구석구석 누비는데, 그의 파트에 대해 스케이터 네스터 저킨스(Nester Judkins)는 “나는 아직도 ‘비디오 데이즈’를 종종 보면서 충격을 받곤 해. 특히 마크 곤잘레스는 마치 ‘이 트릭이 가능한가?’라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고 그때그때 지형지물에 맞춰 대응하는 것 같은 모습이지. 완전 즉흥적인 스케이터야”라고 말했다. “비디오 데이즈”는 스트리트 스케이트 보딩이라는 장르를 대표하는 영상이자 지금까지도 가장 영향력 있는 스케이트 필름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으며, 스티브 로코는 훗날, 이 영상에 등장하는 초기 블라인드 팀원들이 자신이 그동안 운영했던 모든 브랜드의 팀원 중 최애 멤버들이었다고 회상했다.
이후의 행보
1993년, 마크 곤잘레스는 비전을 떠났을 때와 비슷한 이유로 블라인드를 떠난다. 그는 두 개의 새로운 브랜드를 시작하게 되는데, 그 중 첫 번째는 ATM 클릭(ATM Click)이고, 두 번째는 지금은 사라진 60/40 스케이트보드(60/40 Skateboards)다. 시간이 좀 더 흐른 뒤 그는 리얼 스케이트보드(Real Skateboards)팀에 소속되었다가 2002년에는 짐 티보(Jim Thibaud)와 토미 게레로(Tommy Guerrero)와 함께 디럭스 디스트리뷰션(Deluxe Distribution)의 자회사인 크루키드 스케이트보드(Krooked Skateboards)를 런칭한다.
다소 난잡한 그의 행보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듯이, 마크 곤잘레스는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다양한 브랜드의 후원을 받았지만 거의 항상 좋지 않은 관계로 마무리되었고,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새로운 브랜드를 런칭하곤 했다. 그가 이전 회사와 빚었던 갈등 중 대표적인 것은 ATM 클릭을 전개할 당시, 비전에서 판매되었던 자신의 시그니처 보드의 그래픽을 도용한 사건이다. 그는 디럭스 디스트리뷰션으로 거점을 옮긴 후에도 리얼 스케이트보드와 크루키드 스케이트보드에서 해당 그래픽을 재차 사용했으며, 다른 브랜드와 모델에 대해서도 이 같은 짓궂은 행위를 반복하곤 했다.
이미 하나의 이이콘이 된 마크 곤잘레스는 스케이트보드 신 외부에서도 활발한 영역을 펼쳐나갔다. 그는 넘치는 끼와 재능의 소유자였는데, “사우스랜더(Southlander)”를 비롯한 다양한 영화에 출연했고, 코코넛 레코드(Coconut Records)의 “Any Fun” 뮤직비디오를 직접 감독하기도 했으며, “소셜 프라블럼(Social Problems)”, “하이 테크 포이트리(High Tech Poetry)”, “브로큰 드림(Broken Dreams)” 등을 발간하며 글솜씨를 뽐내기도 했다. 특히 이 남자의 미술적 감각은 간단히 다루고 넘어가기에는 아쉬울 정도인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더욱 자세히 알아보자.
전방위 예술가
누구든 한 가지 매력만으로는 ‘식상하다’라는 평을 받기에 십상인 요즘, 프로 스케이터들 역시 다양한 매력으로 자신을 차별화시키곤 하는데, 바로 이 같은 부분에서 마크 곤잘레스는 진정한 트렌드 세터였다고 할 수 있다. 마크 곤잘레스는 본업인 스케이터로서 역사에 한 획을 그었을 뿐 아니라, 현재 미술가, 그리고 작가로서도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그 역시 어린 시절에는 예술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 여느 아이들처럼 크레파스로 그림 그리는 것을 즐기고, 예술 작품을 보고 감동을 느끼곤 했지만, 그는 자신이 스케이터가 된 후에야 비로소 미술에 대한 열정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15살에 프로 스케이터가 된 후 여러 나라를 여행한 그는 새로운 것을 볼 때마다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영감을 기록했고, 이 과정에서 미술 역시 스케이트보딩과 마찬가지로 어디에서든 즐길 수 있는 활동이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렇게 하나의 취미로서 시작된 그의 낙서들은 이후 진(Zine)이 되었고, 점점 더 커져 다양한 미술 작품이 되었다.
광범위한 그의 예술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지만, 그의 작업물 중 젊은 세대들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역시 슈프림과의 협업 디자인들일 것이다. 앞서 언급된 슈프림 블라인드 로고 외에도 그의 작업물은 매우 다양한데, 몇 가지를 언급하자면 람(Ramm), 쉬밍크스(Schminx), 버터플라이 클라운(Butterfly Clown), 피스 페이스(Piss Face), 그리고 잘못된 철자가 매력적인 슈프림(Supream) 그래픽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마크 곤잘레스의 작품들을 대개 순수하고 직관적이며, 장난기 넘치는 요소들로 가득한데, 한 예로 슈프림(Supream) 로고의 경우 슈프림 런칭 초기, 마크가 슈프림에 보냈던 편지에서 종종 발견되곤 했던 맞춤법 실수에서 비롯되었다는 귀여운 일화가 있다. 이외에도 그는 슈프림의 뉴욕, 런던, 시부야, 파리, 브루클린 매장 등에서 벽화와 조형물을 통해 자신의 예술세계를 뽐내기도 했는데, 이쯤 되면 마크 곤잘레스가 슈프림의 예술적인 방향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마크 곤잘레스의 예술 작품을 둘러싼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그의 작품이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전 대통령의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보기에도 부와 권력의 대명사인 도널드 트럼프와 거침없는 청춘의 아이콘, 마크 곤잘레스의 부조화가 흥미로웠는지 이 일화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정작 마크 곤잘레스 본인은 이에 대해 “내게는 작품의 구매자를 결정할 권한이 없고, 이에 대해 별로 할 말도 없다”라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또한 그는 도널드 트럼프 정도의 유명인이 자신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느낌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낯선 느낌이다. 스케이트 보딩, 그리고 스케이터로서의 삶이 주는 즐거움들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간혹 훌륭한 스케이트 스팟을 찾아 혼자, 때로는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다음 날 다시 돌아가 보면 그 스팟이 사라진 경우가 있다. 딱 이런 느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며 다소 철학적인(?) 대답을 내놓기도 했다.
‘스트리트 스케이팅의 아버지’ 마크 곤잘레스는 올해 우리 나이로 54세에 접어들었지만, 해외 매체를 통해 종종 전해지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청춘’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스케이트보딩이 그렇듯이, 마크 곤잘레스 역시 세상을 떠나는 그 날까지 꼬장꼬장한 꼰대가 될 일은 없지 않을까. 이 부족한 글을 통해 그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했다면, 아래 링크를 통해 그의 유튜브 채널을 방문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때로는 철없는 아이 같고, 때로는 심오한 예술가 같은 그의 취향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 Eric Hendrikx, Thrasher Magazine, cablife, Supreme New York, Matt Mart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