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년 남짓한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 동안 서울 내 클럽을 중심으로 한 나이트라이프의 지형은 사뭇 다른 형태로 바뀌었다. 클럽을 포함한 유흥업소를 대상으로 한 집중적인 단속은 자연스레 사람들의 발걸음을 도심을 벗어난 산으로, 바다로, 그리고 비교적 제한이 느슨한 바(Bar)로 옮기게 했다.
그 무렵부터 이태원에서 클럽을 즐기는 이들을 비롯해 음악과 춤에 목마른 다양한 연령층을 흡수한 장소가 있으니, 바로 보광동 작은 골목에 자리한 볼레로(Bolero)다. 1층과 지하 공간, 작지만 은밀한 사교장 같은 형태로 영업하던 볼레로는 그때부터 디제이, 아티스트,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을 이어주었다.
2년의 성공적인 영업을 동력 삼아 볼레로가 최근 제일기획 근처 이태원 대로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전 영업장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파인 다이닝까지 곁들인 볼레로가 한층 더 성숙한 모습으로 손님을 맞는다. 볼레로를 운영하는 두 오너, 천민성과 손기정에게 공간의 시작과 성공적인 변화 과정을 물었다.
지금의 형태를 갖추기 이전, 보광동 시절의 볼레로가 궁금하다. 인적 드문 곳에서 와인바로 시작했는데.
천민성: 처음에는 아는 형과 함께 바버 숍 콘셉트의 작은 위스키바로 프라이빗하게 시작했다. 지인들만 오는 무드로 운영하다가 동업자가 그만두고 나서 와인바로 형태를 바꿔서 운영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처음의 볼레로는 아마 이 시기일 거다. 와인바를 함께하던 친구가 나간 뒤, 기정이가 합류하며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다.
손기정: 회사에 다닐 때 홍대에 바를 차릴 생각으로 민성이 형과 준비하다가 막상 퇴사하고 나니 코로나도 터지고 왠지 낙동강 오리알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지금 사정을 형과 이야기하다 자연스레 볼레로를 함께하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렀다. 난 어차피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낭떠러지였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10년 간 알고 지낸 민성이 형과 함께라면 뭐라도 해볼 수 있을 거 같았고, 고맙게도 흔쾌히 동업을 수락했다.
둘의 지난 10년이 궁금하다. 어떻게 알고 지냈나?
천민성: 원래는 볼트 82라는 클래식 바에서 기정이와 슈케어 일을 했다. 거기서 우리는 바 문화에 반했다. 손님을 응대하는 서비스라든지 바의 독특한 매력에 빠져들었고, 기정이와 함께 우리도 이런 거 한 번 해보자는 식으로 대화를 자주 나눴다. 언젠가 ‘바의 매력을 알려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겠지’ 하고 막연히 상상했다.
영업 도중 지하 공간에 디제이 부스를 마련하며 1층과는 사뭇 다른 뮤직바 형태를 갖췄다. 그때부터 많은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는데, 콘셉트와 영업 방식을 바꾼 이유는 무엇인가?
손기정: 원래 볼레로 지하는 단체 손님이 편하게 마실 수 있도록 마련한 자리였다. 그런데 그 정도로 활용하기에는 공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차피 우리 둘 다 음악도 좋아하고, 클럽에도 자주 놀러 다녔으니 지하에 디제이 부스를 만들어서 손님이 음악을 들으며 놀 수 있게 하면 어떨까 싶었다. 마침 1층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때문에 주변 가정집의 민원 신고가 잦은 상황이었다. 형이나 내가 좋아하는 유럽의 바가 있다. 입구는 바버 숍인데, 막상 들어가면 클럽인 거다. 그런 식으로 볼레로도 1층은 조용하게 와인이나 위스키를 즐기고 싶은 이들이 앉아있고, 지하에는 클럽의 형태로 공간을 운영하면 재밌을 거 같았다. 형도 동의해서 결국 홍대에 바를 차리려고 모았던 돈을 지하에 투자했다. 처음에는 코로나도 한창인 시기라 긴가민가했지만, 오픈하자마자 손님이 엄청나게 몰려서 짜릿했지.
천민성: 코로나가 막 터진 시기에 지하 공사가 겹쳤는데 그때 1층에서 매출이 고작 몇만 원 나올 때였다. 사실 그 시기에 돈을 투자해서 지하를 바꾼다는 게 좀 부담스럽기도 했다. 어쨌든 손님이 와서 1층에서는 좀 편안하게 술을 마시고 지하에 내려가 춤도 추고 놀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생각한 대로 사람들이 볼레로를 즐기는 모습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손기정: 유럽이나 일본의 후미진 골목에 있는 힙한 바를 상상하며 공사했는데, 생각처럼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우리의 의도를 알아주고 즐겨서 정말 기분 좋았다. 그때 민성이 형과 공사하길 잘했다고 서로 이야기 엄청 많이 했다.
성공적인 변화 과정을 겪었다. 로컬에서 활동하는 여러 디제이와 호흡하고 그들의 바이브를 받아들이며 어떤 것들을 느꼈는지 궁금하다.
손기정: 가장 좋은 피드백은 역시 디제이에게서 나온다. 우리는 그들의 피드백을 최대한 잘 반영하려고 했다. 보광동의 작은 가게에 사람들이 몰릴 수 있던 이유는 역시 디제이의 힘이다. 물론 베뉴가 주는 매력과 이미지도 있지만 디제이는 당시 볼레로의 가장 큰 에너지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디제이의 피드백을 하나 말하자면, 볼레로는 다른 클럽과는 다르게 작은 베뉴가 주는 매력이 있기 때문에 클럽의 파티 타이틀을 따라가지 말고 작은 유닛처럼 계속해서 공간과 잘 어울리는 디제이들과 정기적으로 함께하는 게 좋겠다고 누군가 말한 적 있다. 우리는 그 방식을 따랐고,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코로나의 여파로 많은 클럽이 영업을 중단하며, 묘한 반등의 효과를 누렸다. 그 당시 이태원의 분위기와 볼레로를 찾는 손님층의 변화를 체감했는가?
손기정: 사실 매체나 정부에서 클럽과 유흥, 술집을 집중적으로 쪼던 상황이라 엄청 불안한 마음으로 운영했다. 볼레로에 인파가 몰린다는 뜻은 곧 집중 단속 대상이 된다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천민성: 주말마다 경찰이 왔고, 소음 문제도 심각해져서 동네에서 아예 찍혔다.
손기정: 반대로 코로나 시국에 사람들의 정서가 엄청나게 메말라있다는 걸 느꼈다. 클럽들이 모두 영업 정지 대상이 되며 음악과 술을 즐길 공간이 사라지다 보니 사람들이 이 작은 곳을 찾고 또 행복하게 즐기고 있구나 하고. 억압된 사람들의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기도 했다.
사람이 몰리는 곳엔 언제나 경찰이 뒤따른다. 이와 관련한 재밌는 에피소드 하나 공개할 수 있을까?
손기정: 디제이 소울스케이프(DJ Soulscape)가 솔로로 틀던 날,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그때 처음으로 살짝 영업시간을 넘겼는데, 경찰이 들어온 거다. 진짜 여기서 다시는 영업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무릎을 꿇었다. 어쨌든 그분들도 우리의 심정을 이해한다며 잘 타이르고 넘어갔지만, 그 당시에는 이제 볼레로가 잘 되려고 하는 타이밍에 진짜 모든 걸 잃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멋진 공간에 관한 운영자들의 아이디어와 논의 과정이 궁금하다. 가보지 못한 외국의 유명한 장소를 검색하거나 서울 내외 다양한 베뉴를 확인하며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가?
손기정: 앞서 언급한 볼트 바에서 일할 때 디스코 파티가 한 번 열린 적 있는데, 클래식한 바에서 디스코 음악이 나오니 분위기가 마치 “위대한 개츠비”의 한 장면처럼 너무 좋은 거다. 그걸 보고 많이 느꼈다. 사실 외국에는 굳이 클럽이 아니더라도 디제이들이 와서 좋은 음악을 꾸준히 플레이하는 업장이 되게 많다. 파인 다이닝과 함께 음악을 즐긴다든지 하는.
장소불문, 좋은 음악이 곳곳에 스며든다는 건 그 자체로 문화가 만들어지는 요소가 아닌가.
손기정: 맞다. 클럽에서만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건 편견이니까. 그래서 파인 다이닝의 형식을 갖춘 지금의 볼레로에서도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해보고 있다. 평일에는 제대로 파인 다이닝, 바의 서비스를 갖추고 주말에는 파티도 즐길 수 있게.
볼레로가 자리한 이태원, 한남동은 개성 넘치는 베뉴가 즐비하다. 타 업장과 다른 볼레로의 매력은 무엇이라 자부하는지 듣고 싶다.
손기정: 볼레로가 어떤 모습이 됐든 간에 계속해서 언더그라운드적인 면모를 가지고 가고 싶었다. 신(Scene)에서 활동하는 디제이들과 꾸준히 호흡한다든지, 클래식 바에서 느낄 수 없는 공간 분위기라든지. 외모는 매끈하더라도 알맹이는 러프한 그런 업장.
보광동에서 한남동으로 거처를 옮기며 파인 다이닝, 바, 클럽이 묘하게 뒤섞인 독특한 공간의 콘셉트가 완성되었다. 새로운 볼레로에 관한 어떤 아이디어가 뒷받침됐는지?
손기정: 과거 유럽의 ‘카바레’ 문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한국은 이 단어에 조금 이상한 인식이 있는 거 같지만 실제 유럽에서 성행하던 카바레는 당대 지식인, 문화예술인 등이 모여 술도 마시고 공연도 즐기는 그런 장소였다. 그걸 모토로 가게를 한층 더 발전시킨 형태가 지금의 볼레로다.
천민성: 조금 더 성숙해진 모습의 볼레로다. 우리가 상상하던 형태의 공간에 조금씩 더 가까워지고 있다.
다이닝은 분명 많은 인력과 손길이 필요한 사업이다. 이 일의 중심은 누가 맡고 있나?
손기정: 내 고등학교 친구가 현재 볼레로의 셰프를 맡고 있다. 호주에서 일하다 온 친구인데, 가게 오픈 때부터 계속해서 설득해서 결국 함께하게 됐다. 술에 곁들일 만한 간단한 스낵류가 강점이고, 이외에도 스테이크, 파스타, 제철 음식과 같은 메인 메뉴가 6개월마다 변경된다. 우리가 디제이를 섭외하는 것처럼 다이닝 분야에도 기존 업장과는 조금 다르게 재밌는 아이디어를 실현해보려고 한다.
10년간의 우정을 기반으로 한 동업 그리고 고등학교 친분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동료까지, 자연스럽게 성장한 볼레로 스태프의 스토리가 흥미롭다. 둘은 어떤 관계의 파트너인가?
손기정: 형은 체계적이고, 현실적이며, 사리 판단이 분명하다. 그 점에서 리더십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면은 부족하지만 계속해서 재밌는 걸 생각하고 일을 벌이고 싶어 하는 쪽이다. 서로 다른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둘 다 취향이 비슷하다는 점이 좋은 파트너 관계의 핵심인 거 같다. 그래서 충돌하는 부분이 거의 없다.
천민성: 동업하는 동안 크게 싸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걱정이 많아서 뭔가 하나를 하더라도 여러 번 생각하는 성격인데, 기정이는 그냥 밀어붙이니까 그게 서로 잘 맞는 듯하다. 상대에게 자존심을 내세우기보다는 서로 다른 생각을 종합해서 결정하니 오히려 별 탈 없이 잘 가고 있는 거 같다.
둘의 개인적인 취향이 궁금하다. 좋아하는 술이나 음악을 가감 없이 알려 달라.
천민성: 위스키. 그중에서도 피트한 것들을 좋아한다. 아드벡이나 탈리스커. 좀 변태 같은 향인데 먹다 보면 중독된다. 음악은 건반이 들어간 하우스. 요즘에는 트랜스에 빠져있다.
손기정: 글렌 모렌지, 오반 그리고 라프로익. 내가 좀 취향이 대중없고 넓은 게 음악도 다양하게 듣는다. 색소폰 들어간 음악도 섹시한 거 같고, 디트로이트 하우스도 즐겨 듣는다. 힙합, 소울, 훵크 다 좋아하고 듣는데, 아무래도 볼레로를 운영하다 보니 가게와 어울릴 법한 음악에 손이 가는 편이다.
좋은 공간은 어떤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손기정: 손님의 표정을 보면 그곳이 어떤 공간인지 대번에 알 수 있다. 어색하고 뻘쭘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짜 이곳을 즐기고 있다는 표정. 사실 좋은 공간의 비결은 간단한 거 같다. 좋은 음악, 좋은 술, 맛있는 음식이 있다면 그곳은 곧 좋은 장소가 아닐까 한다.
천민성: 마지막으로 서비스. 공간을 운영하는 이들의 서비스를 보면 그 공간이 느껴진다. 업장 측에서는 손님이 즐길 수 있고 편안하게 머물다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길고 길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의 악몽에서 드디어 벗어났다. 시간적인 제약은 일단락된 셈인데, 이제 두 운영자는 볼레로를 중심으로 어떤 일을 더 꾸미고 싶은가?
손기정: 새로운 F&B 사업에 도전할 계획이다. 이외에도 아직 정확하게 정해진 것은 없지만 작은 페스티벌도 생각 중이다. 볼레로의 이름이 업장 밖으로 나가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기대된다.
Editor │ 권혁인
Photographer │ 김소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