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일반 스포츠 브랜드의 정식 매장, 혹은 국내에 유통되지 않았던 의류나 운동화를 병행 수입, 판매하던 소위 ‘멀티숍’이라는 의류 매장이 압구정과 신촌, 이대에 등장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2000년대 중반에는 해외의 스트리트웨어 브랜드의 본격적인 인기와 더불어 이를 정식으로 수입하고 유통하는 매장이 생겨남과 동시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국내 여러 편집 스토어의 개념을 세웠다.
그리고 최근, 이러한 편집 스토어에 새로운 변화가 일고 있다. 이전까지의 편집 스토어가 많은 이가 원하는 브랜드나 아이템을 발 빠르게 들여오는 역할을 수행했다면, 근래의 또 다른 흐름은 숍 오너의 취향을 한껏 반영한 소규모 브랜드 그리고 그들이 직접 만들어낸 PB 제품을 선보이는, 독립적인 브랜딩을 기반으로 한 편집 스토어가 속속 문을 여는 중이다.
이번 코너를 빌어 소개하는 가스스테이션(GASSTATION), 차일드후드 홈(The Childhood Home), 포스티스(POHS-TIHS)가 바로 그곳으로 이 세 곳의 숍 모두 그들의 감각과 흥미에 맞춘 다양한 브랜드, 제품을 소개하며, 거리의 색을 더욱 다채롭게 하고 있다. 조금은 지루해진 지금의 패션 마켓에 신선함을 더하고 있는 세 곳의 숍을 소개한다. 마지막 주자는 오랜 시간 한국 서브컬처 신(Scene) 내 무수한 이력을 남긴 그래픽 디자이너 옥근남이 운영하는 신사동의 비밀스러운 편집 스토어 포스티스다.
먼저 포스티스에 관한 소개를 부탁한다.
포스티스는 오프라인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언더그라운드 브랜드와 독립적인 아티스트들을 소개하기 위해 마련된 아주 작은 공간이다.
주로 어떤 상품을 취급하고 있나.
언더그라운드 브랜드의 그래픽과 디자인이 담겨있는 티셔츠와 독립 아티스트들의 진(Zine), 그 외 나의 취향이 담긴 잡동사니 등을 취급하고 있다.
판매 중인 대표적인 브랜드, 혹은 제품 몇 가지를 추천하자면.
대표적인 브랜드는 따로 없지만, 포스티스에서만 만날 수 있는 브랜드가 있다. 대한민국에서 은밀하게 제작되는 알렘빅 서비스(Alembic Service)라는 브랜드인데 그래픽이 상당히 재미있다.
숍을 둘러싼 변기와 휴지 마스코트가 인상적인데, 화장실을 콘셉트로 한 이유가 있다면?
특별한 이유는 없다. 매장을 계약해놓고 이름을 정하지 못해서 몇 개월간 머리를 싸매다가 약간 포기하는 심정으로 ‘Shit Shop’을 떠올렸다. 이걸 거꾸로 읽어보니 생각보다 괜찮더라. 그러다 의식의 흐름대로 화장실 변기로 캐릭터를 만들어보았다.
어떤 연유로 숍을 오픈하게 되었는지.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3년 전쯤 개인적으로 인생의 큰 굴곡을 지나오면서 번아웃 증상이 크게 다가온 적 있다. 많은 클라이언트와 주위 사람들을 실망시켰고, 스스로에게도 큰 실망을 느낀 순간이었다. 돈도 명예도 더 이상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더라. 순수하게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떠올렸을 때 나의 숍을 오픈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숍의 기획부터 문을 열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다.
일단 공간부터 찾기 시작했다. 내가 활동하기 편한 압구정, 신사동을 중심으로 공간을 찾아 다녔다. 당시 콤팍트 레코드 바(Kompakt Record Bar)의 진무 형님이 많은 도움을 주셨다. 내가 만드는 브랜드나 작업물보다는 어디에도 소개되지 않은 브랜드 위주로 채우고 싶었다. 사실 취급 브랜드나 인테리어 등 숍의 오픈은 1월 전부터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본업인 그래픽 작업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 중이어서 미루고 미루다 입점한 브랜드들을 위해서라도 더는 미룰 수 없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오픈했다.
간결한 인테리어 구성 역시 숍의 탄탄한 내실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하다. 공간 내부 특히 신경 쓴 부분이 있는지.
첫 번째로 나의 본업인 그래픽 작업을 편하게 할 공간이 있어야 했다. 그러려면 어느 정도 매장과 작업공간이 분리되어야 했고, 버스정류장 옆 신문이나 잡지 같은 걸 판매하는 가판대가 있으면 했다. 나의 작업 반경과 매장 내 동선을 고려한 가판대 설계에 가장 공을 들인 것 같다.
본인 또한 국내 서브컬처 신(Scene)에서 오랜 시간 몸담은 인물로 유명하다. 언제, 어떻게 이러한 문화에 빠져들게 되었나.
고등학생 때 홍대에서 펑크밴드 활동을 하면서 언더그라운드 문화에 빠져들었다. 자연스럽게 펑크록과 하드코어, 스케이트보드, 힙합 등 소위 말하는 서브컬처에 빠져들었고, 군 제대 후 제이에스(Jayass)의 제안으로 처음 일하게 된 휴먼트리에서 스트리트웨어 브랜드 디자인과 디렉팅을 하면서 브랜딩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인생의 절반 이상을 이곳에서 머무르고 있다.
스토어를 찾는 이에게 무엇을 제안하고 싶은가.
대한민국에는 좋은 편집 스토어와 멋진 브랜드가 정말 많다. 다들 너무 멋있고 잘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숍과 브랜드가 1층과 2층에 자리 잡았다면, 그 지하에는 우리가 있다. 우리 같은 숍이 있기에 한 건물에 공실 없이 구성지게 가득 차는 거다. 어떤 신(Scene)이든 언더그라운드가 있기에 더욱 깊이 있게 존재하고 발전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주요 상권인 가로수길과는 조금 떨어진 주택가에 문을 열었다. 지금 이 공간은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해외를 방문했을 때 동네 골목골목을 걷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조그맣고 재밌는 숍을 발견해 엄청 흥분했던 순간이 있었다. 마치 내 주변에서 나만 이 숍을 알고 있는 그런 기분.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이 공간을 계약했던 것 같다.
그래피티와 스케이트보드, 펑크 등 다양한 분야에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는데, 포스티스라는 숍에 본인의 취향을 어떤 방식으로 반영하고 있는지.
일단 문화적인 이해와 방향성이 맞는 친구들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단지 멋지고 예쁜 티셔츠를 만들고 싶거나 나만의 옷을 만들고 싶어 하는 이들도 좋지만,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브랜드를 찾아내고, 그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려고 계속 살펴보는 중이다. 브랜드가 아니어도 좋다. 자신 있는 친구들은 언제든지 POHS TIHS 숍 어카운트로 디엠을 주길.
이전 적지 않은 시간 편집 스토어 휴먼트리와 함께했다. 그때와 지금, 국내 패션 마켓 내 눈에 띄는 변화가 있을까?
패션 마켓에 관심을 줄인 지 오래되어서 잘 모르지만, 확실히 지금이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브랜드를 만들고 표현하는 데 훨씬 적극적인 것 같다. 실제로 소셜 미디어가 없던 시절에는 블로그나 카페, 패션 커뮤니티에서 홍보하는 게 전부였지만 지금은 각자 자신들의 채널에서 직접 제품이나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들어내고 있는 점이 크게 변화된 부분인 것 같다.
실제로 부천에 사는 18살의 친구가 만드는 풀보이(POOLBOY)라는 브랜드를 소개받게 되었는데, 스케이트보드도 타고, 그래픽을 만들어 티셔츠 위에 실크스크린 프린팅을 하고, 친구들과 나눠 입거나 직접 홍보하고 판매하더라. 아직은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어떠한가. 어떻게 보면 이들의 모습이 진짜 인디펜던트, DIY, 스트리트 브랜드의 시작과 가장 닮아있는 것 같아서 흥미로웠다.
앞으로의 예정된 계획은 무엇인가, 뭔가 재미난 일을 준비하고 있을 것 같은데.
어렸을 때부터 말도 안 되는 그래픽들이 인쇄된 종이 쪼가리를 모으는 것을 좋아했는데, 실제로 한국에서도 언더그라운드 신에서 인디펜던트, DIY 진 붐이 분 적이 있었다. 포스티스를 오픈과 함께 ‘POHS TIHS PAPERS’라는 출판사도 만들어 정기적으로 진 출판을 하려 한다. 한국의 종이 쪼가리 문화 발전에 VISLA 매거진과 함께 힘을 보태고 싶다. 여름쯤에는 주위 친구들과 힘을 합쳐 로컬 진으로 이루어진 장을 한번 만들어볼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비슷한 형태의 편집 스토어나 브랜드를 준비 중인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조언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재밌고 멋있는 것을 많이 만들어 달라. 곧 포스티스를 통해 소개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ditor│오욱석
Photographer│강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