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맞이한 휴가, 가까워지는 봄의 기운을 만끽하며 친구와 한강 공원을 열심히 걸었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걷다가 돌아가려고 보니 여기까지 와버렸네? 싶도록. 그 먼 길을 다시 돌아 예약해 둔 뷰가 끝내주는 호텔에 들어갔다. 신발 속의 발이 저릿저릿해서 빨리 벗고 싶은 마음에 급히 한쪽 신의 뒤축을 다른 한쪽의 뒤축으로 누른 뒤 발에 힘을 주어 들어 올렸다. 그러자 ‘투두둑’하고 신발의 밑창이 뜯어진 사건.
다이소에 가 신발 밑굽용 접착제를 사야겠다며 친구의 신발을 빌려 신었다. 그렇게 발을 처음 넣게 된 건 나이키 에어리프트(Nike Air Rift). 지금껏 ‘끈이 있는’ 신발에 집착해 온 내게, 발을 멋대로 구겨 넣어도 쏙 들어가는 편안함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신발 끈이 있어야 진짜 멋! 이라는 내 편견을 가볍게 깨부순 사건이랄까. 메리 제인이라는, 더없이 소녀 같은 실루엣이 스니커 브랜드에 등장하는 것만으로 손쉽게 믹스매치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매력적이기도 했다. 더욱이 최근 발레 코어의 열풍으로 메리 제인 스니커는 더욱 다양한 모양으로, 다양한 브랜드에서 자주 볼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모아본 스니커 브랜드의 메리제인 슈즈를 소개한다.
Nike Air Rift
첫 순서부터 너무나 뻔하고 흔해서 김빠지는가? 하지만 1996년, 러닝화와 샌들을 결합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메리 제인의 실루엣을 가진 스니커의 본보기가 된 이 스니커를 빼놓을 수는 없다.
여러 차례 리폼과 복각을 걸쳐 현재 우리가 기억하는 색상과 형태가 된 나이키 에어리프트의 또 다른 포인트는 다름 아닌 스플릿 토 디자인. 자칫 투박해 보일 수 있는 외형에 단 하나의 디테일을 추가함으로써 일상복에도 매치할 수 있는 제품으로 거듭났다. 이로써 믹스매치의 귀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용도는 러닝화다. 즉, 달릴 때도 착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시무시한 활용도를 지녔다.
ROA Pala
이탈리아의 하이킹 브랜드 로아(ROA) 역시 메리 제인에서 영감을 받은 신발을 선보인 바 있다. 아웃도어 제품의 높은 기능성과 패셔너블하게 착용할 수 있는 모던한 디자인을 지향점으로 삼는 그들답게 팔라(Pala) 역시 깔끔한 외관을 가졌다. 특히 바디의 옆부분, 로아 로고 버튼은 전통적 형태의 메리 제인을 연상케 하기도. 하지만 속단은 금물이다. 하이킹 브랜드답게 밑창은 비브람 소재를 이용해 내구성을 강화했으며, 몸체에 사용된 가죽이나 스웨이드 소재는 방수 처리를 거쳤다.
참고로 로아는 24 SS 시즌, 또 다른 디자인의 메리 제인 슈즈 ‘로제스(Rozes)’를 발매했다. 팔라와는 달리 벨크로를 사용해 신고 벗을 수 있어 두 가지 디자인을 비교하는 재미도 챙길 수 있을 듯.
BRAIN DEAD X OAKLEY FACTORY TEAM FLESH SANDAL
오클리(OAKLEY)는 지난 2022년, 이노베이션 랩 ‘오클리 팩토리팀(OAKLEY FACTORY TEAM)’을 새로이 재공개하며 브레인데드(BRAIN DEAD)와 손잡았음을 알렸다. 그리고 그 해 공개된 플레쉬 샌들(FLESH SANDAL). 당시 래플을 통해서만 구매할 수 있었던 해당 제품에 당첨되지 못한 이들이 울부짖는 소리는 날로 커져만 갔고, 오클리 팩토리 팀은 그다음 해 새로운 컬러웨이를 선보였다. 솔리드 패턴과 플레인 컬러의 바디, 상대적으로 가벼운 고무 밑창을 사용하여 활용도와 활동성을 끌어올린 첫 번째 컬렉션과는 달리 색상과 패턴을 다양하게 사용하며 현재까지도 포인트가 될 수 있는 디자인을 꾸준히 선보이는 중이다.
Converse Chuck Taylor All Star Mary Jane Ox Flats
메리 제인 특유의 깔끔하면서도 소녀 같은 무드를 사랑한다면 이 스니커를 주목해보자. 명실상부 컨버스(Converse)의 아이콘이자 늘 스니커 문화의 중심에 있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인 클래식의 클래식, 척 테일러가 메리 제인 디자인으로 변모한 적이 있다는 걸 다들 알고 있는가? 90년대의 메리 제인 형태에 영감을 받아 제작된 해당 제품은 기존의 척 테일러와 동일하게 흰색의 밑창과 앞코, 그 위에 까만 한 줄로 강한 대비 감을 이루는 포인트 디자인, 바디를 이루는 면 소재로 구성됐다. 하지만 이에 플랫폼 굽과 동그란 버클 디테일을 추가하며 한 끗 차이의 디테일이 얼마나 다른 결과물을 낼 수 있는지를 몸소 증명하기도.
COMME des GARÇONS x Salomon RX 3.0
21 SS 시즌, 꼼데가르송(COMME des GARÇONS)의 레이 카와쿠보(Kawakubo Rei)는 살로몬(Salomon)과의 협업으로 스포티한 스타일의 메리제인 슈즈를 공개했다. 살로몬의 기존 모델인 RX 3.0을 베이스로 했다고 알려졌지만, 기본적인 형태만 본뜬 후 메리제인 디테일을 추가함으로써 가볍고 가동성 좋은 살로몬의 장점은 유지하되 꼼데가르송의 아방가르드한 무드를 동반했다. 메쉬 소재로 경량성을 잃지 않으며 밑창에 쿠션을 더해 착용감을 극대화한 해당 슈즈를 발표하며, 레이 카와쿠보는 “살로몬의 디자인에 대한 열린 마음과 열정에 감탄했다”며 만족스러운 후기를 전한 바 있다.
Asics x Cecilie Bahnsen GT-2160
앞서 언급된 스니커처럼 투박하거나, 깔끔하거나, 기능성을 내세운 메리 제인 스니커만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발레 코어의 유행 이후 섬세한 실루엣, 조금 더 페미닌한 디테일의 슈즈도 속속들이 등장하는 중. 지난 2023년, 덴마크 출신의 세실리에 반센(Cecilie Bahnsen)은 아식스(Asics)와 협업하여 메리 제인 디자인의 스니커를 선보였다. 실버와 블랙 두 가지 컬러웨이, 스니커를 뒤덮은 곡선적 패턴을 통해 세실리에 반센의 꾸뛰르적인 요소가 아식스의 스니커에 완벽히 녹아든 모습. 신발 끈을 일부 살려 리본으로 묶음으로써 세실리에 반센의 사랑스러운 무드를 추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단순한 색상이 아니라 에나멜 블랙과 메탈릭 실버 색상을 사용하며 심미성을 끌어올린 것 역시 관전 포인트. 메시 스니커=기능성 위주의 디자인이라는 편견을 완벽하게 깨준, 더없이 사랑스러운 메리 제인 스니커라고 볼 수 있다
Kiko Kostadinov X ASICS X Heaven by Marc Jacobs GEL-LOKROS
아식스(ASICS)와 키코(Kiko Kostadinov)가 지속적인 협업을 이루며 두 브랜드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와중에 등장한 협업. 이번에는 헤븐 바이 마크제이콥스(Heaven by Marc Jacobs)도 합류하며 사랑스러움과 키치함을 한층 더했다. 발등을 겹겹이 감싸는 가죽 슈레이스 디테일은 물론, 스니커의 바디를 수놓은 별 모양의 패턴까지 곳곳에 숨은 요소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러블리한 디테일에 눈길을 빼앗긴다면 뒤에 숨은 키코의 철학을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 테크웨어의 강자이던 키코 코스타디노브와 아식스가 합심하여 신발의 뒤꿈치와 앞코에 쿠션을 강화하고, 이전 두 브랜드의 협업 제품이던 젤 키릴(GEL-Kiril) 모델을 본뜬 굽을 추가하며 발레 코어와 테크웨어의 완벽한 믹스매치를 이루어냈기 때문.
발레 코어는 한 때 돌풍처럼 지나갈 유행일지도 모르지만, 메리 제인 스니커는 예상보다 오랫동안 우리 곁에 있었으며, 단순히 존재해 온 게 아닌 시대의 트렌드에 맞춰 진화해 왔다. 외면하지 못할 만큼 성큼 눈앞으로 다가온 봄, 신발 끈을 꽁꽁 묶어야 하는 스니커는 잠시 옆으로 밀어두자. 대신, 허리를 숙일 필요 없이 신에 발을 구겨 넣고 당장 뛰쳐나가 봄 내음을 느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미지 출처 | Nike, SNKRS, Roa, BRAIN DEAD, StockX, FARFETCH, Kream